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58
158
인연 (1)
* * *
노인은 올비아 산맥의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지금까지 엘런의 속도대로였다면 최소 5일은 넘게 걸렸을 것 같은 길을 노인은 하루가 조금 덜 걸렸다.
엘런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도 않고 척척 찾아가는 노인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때로는 마법보다 인간의 감이나 경험이라는 게 더 신비롭기도 하지 않습니까?’
엘런은 머릿속으로 프로뱅에게 말을 걸었다.
-나도 그 분야에 대해서 연구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지. 그런데 도저히 확인이 불가능해서 일찍이 때려치웠다.
‘스승님은 도대체 안 해본 연구가 무엇입니까?’
-내 말이 허풍 같아 보이느냐? 에잉, 이제 내가 만만해졌다는 것이냐? 감히 하늘같은 스승의 말에 토를 달 정도가 되었나 보군.
프로뱅의 투덜거림에 속으로 웃음을 터뜨린 엘런이었다.
이제 그에게서 마법을 배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미 엘런은 마법적인 측면에서 그를 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뱅은 또 다른 의미에서 스승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걸어가다 보니 적적하네만, 이야기나 좀 합세.”
앞서 걸어가던 노인이 지나가듯 한마디 했다.
엘런이야 이곳까지 오면서 계속 프로뱅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지만, 그들이 대화를 하는 동안 노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희가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요.”
앞으로의 일에 대한 생각에 파묻혀 있던 엘런은 줄곧 프로뱅과 대화만 나누고 있었다.
“저는 베리라고 합니다.”
아차 싶었던 엘런은 그제야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자신의 이름이 여기까지 전해졌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해 가명을 말해 주었다.
“하루가 지나서야 통성명을 하는군. 자네도 참 입이 무거운 사람이야. 나는 라포라고 하네.”
그저 길잡이 역할일 뿐이었지만, 오랫동안 이어지는 적막함이 싫었던 라포였다.
통성명 끝에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보아하니 동부 대륙에서 넘어온 사람 같은데 이렇게 먼 곳까지는 뭣 하러 온 건가? 상인이라고 하기엔 들고 있는 물건도 없고 말이야.”
라포는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뭐 특별히 무슨 일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닙니다. 동부 대륙인들에게 이곳 서부 대륙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단순히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온 것이지요.”
엘런도 적당한 말로 둘러댔다. 그저 지나가는 인연 정도의 사람에게 자신의 진짜 목적까지 일일이 보고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호기심 때문에 이곳을 아티팩트 하나만 들고 혈혈단신으로 건너려 했다라……. 단단히 미친 게로군.”
물론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엘런의 행동이 미친 짓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곳을 건너려면 단순히 실력만 좋아서는 될 것이 아니었다.
뛰어난 방향감각을 자랑하는 사람도 필요했으며, 몬스터들로부터 일행을 지킬 강자도 필요했다.
그리고 몇 주 동안 지속하는 산행인 만큼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 줄 사람도 필요했다.
다른 곳과 달리, 올비아 산맥은 그 흔한 열매조차 채집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식량 문제가 가장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곳이었다.
그 밖에도 많은 전문가가 필요했기에 이곳을 지나는 행렬은 자연스럽게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저는 뭐 괜찮습니다. 여행에 익숙해진 사람이라서요.”
그러나 잘 훈련된 자라면 그런 제약쯤은 불편 정도로 치부할 수 있었다.
하물며 엘런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기에 그런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는 어르신이야말로 이런 곳을 혼자 다니시면 위험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길을 안다고 해도 산적이나 몬스터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곳인데 말입니다. 특히 몬스터의 수는 많다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할 정도가 아닙니까?”
엘런의 말에 라포는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서는 자신감이 한껏 묻어나왔다.
“지금 나를 걱정한 건가? 그것도 올비아 산맥에서? 걱정하지 말게나. 난 자네가 젖먹이이던 시절부터 이 산을 돌아다녔으니까. 길쯤이야 눈감고도 찾고 몬스터쯤이야 피해 다니는 건 일도 아니지. 뭐 사실은…….”
말을 이어 가던 라포의 눈에 걱정스러움이 담겼다.
“원래는 이 정도로 준비 없이 무작정 들어오거나 하지는 않네. 게다가 요즘 들어 몬스터의 수가 급격히 늘기도 했고 말이야. 손녀딸을 치료할 만한 약초를 구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한 게지. 그 약초가 이 산에서만 나거든.”
약초라는 말에 엘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늙은이가 그만 주책없는 말을 했네. 이제 저곳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자네가 말한 서부 대륙이라는 곳일세. 지도와는 조금 다르게 도착하긴 하겠지만, 훨씬 빠른 길로 온 것이니 믿어도 좋네.”
라포는 눈가를 훔친 뒤 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갑자기 북받쳐 오른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처럼 보였다.
“그럼 혹시 그 약초를 구하긴 한 겁니까?”
엘런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뒤를 돌아본 노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품안에서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래도 이렇게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 뭔가. 지금까지 몇 번이고 허탕을 치고, 이전에 구해 놓은 약초도 거의 떨어질 때였는데 말이야. 오늘은 날이 좋은 것 같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약초는 옅은 푸른색의 꽃이었다.
엘런도 전 세계의 모든 식물을 모두 익힌 것은 아니었기에 저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노인이 약초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올비아 산맥에서만 활동했다고는 해도 20년이 넘도록 약초를 캔 사람이라면, 멘도사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이마저도 손녀딸에게 전해 주지 못하고 죽을 뻔한 걸 도와줘서 자네에게 고맙기도 하네.”
라포는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아닙니다. 그렇게 감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올비아 산맥을 빠져나갔다.
휘잉.
이 거대한 산맥이 끝나는 부분에 이어진 곳은 지평선이 보일 정도인 드넓은 평야였다.
장애물이 하나도 없었기에 이곳의 바람은 세차면서도 자유롭게 평원을 내달리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오는 길도 특히 수월했군. 운이 따르는 것 같단 말이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해 본 라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 만족한 눈치였다.
“자, 이곳이 서부 대륙이라고 불리는 곳이네. 더 정확히 말해 주자면 이곳은 토마르 왕국의 자넷이라는 지방이네. 지도를 가지고 있다면 확인해 봐도 좋아.”
“지도를 한 번 보고 오기는 했습니다.”
엘런은 이미 아르곤을 통해 입수한 대략적인 지도를 머릿속에 넣어놨기 때문에 따로 그것을 꺼내 볼 필요는 없었다.
“그래, 이제 어디로 갈 건가? 여행을 떠날 예정이라면 우리 마을에 들렀다 가겠는가? 거기서 식량이나 필요한 것들을 챙겨갈 수 있을 것이야. 이래 봬도 이 근방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네.”
엘런도 라포의 제안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당분간은 라포와 붙어 있을 생각이었는데 잘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시다면 저도 어르신을 따라가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내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도록 하지.”
히이잉.
“여기에 타시지요.”
엘런은 레클리스에 올라타며 말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산길을 걸어오며 충분히 휴식을 취한 상태였다.
오랜만에 질주를 준비하는 그는 뒷발을 구르며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사양하지는 않겠네. 덕분에 빨리 도착할 수 있겠군.”
라포까지 올라타자 레클리스는 기다렸다는 듯 평원을 질주했다.
* * *
레클리스 덕분이었는지 그들은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라포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에 몬스터들을 만나지도 않았다.
라포가 몬스터들의 흔적만 보고도 그것들을 피할 만한 길로 안내해 주었기 때문이다.
몬스터에 대한 경험이 많은 엘런도 그런 라포의 실력에 감탄했다.
이 정도의 실력이 아니었다면,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올비아 산맥을 돌파할 수 없었을 것이기도 했다.
토마르 왕국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시도 라포 덕분에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이곳을 줄곧 돌아다녔다는 그의 말은 가짜가 아니었는지, 문지기들과도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엘런도 큰 의심 없이 그곳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곳이 우리 마을인 에블린이네. 자넷 성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지만, 마을치고는 그 규모가 좀 큰 편이지.”
그들은 커다란 목책이 세워져 있는 마을 입구를 지났다. 목책이라는 방어책조차도 웬만한 마을에서는 세워 놓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 보면 마을의 크기가 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 마을 내부도 보통 마을의 2~3배 정도는 되는 크기였다.
마을로 들어온 라포는 조금이라도 빨리 손녀딸에게 약을 먹여야 한다며 곧장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콜록콜록.”
문밖에서부터 기침 소리가 들렸다.
목이 쉬어 있는 것이 하루 이틀 기침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거기서 잠시 쉬고 있게. 내 금방 약을 만들어 올 테니.”
그렇게 말한 라포는 약초를 들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남은 엘런은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집 안에서는 약초 냄새가 이리저리 섞여 있었다.
-확실히 처음 보는 약초가 많군.
‘엘프의 숲에서 모든 식물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봅니다.’
엘런도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혹시나 멘도사가 있을까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하긴, 그렇게 희귀하고 재배도 어려운 꽃이 이런 곳에 널려 있을 리가 없지.’
잠시나마 헛된 기대감에 부풀었던 엘런은 금방 체념했다.
“약초 냄새 때문에 머리가 조금 어지러울 수 있네.”
어느새 약초를 달여 손녀에게 가던 라포가 발걸음을 멈췄다.
“괜찮습니다. 어지러울 정도는 아닙니다.”
“이 집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은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리던데 말이야.”
그는 허허 웃으며 달인 약초를 손녀에게 먹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방금까지 들리던 기침 소리가 순식간에 멎었다.
쾅쾅쾅.
그때 누군가 라포의 집 문을 두드렸다.
불친절하고 거친 노크 소리로 봐서는, 찾아온 손님이 주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노크 소리를 들은 라포의 얼굴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라포의 미간에 있던 주름이 깊어졌고 얼굴색도 퍼렇게 질렸다.
“라포 영감,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나오시오.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왔으니 대답이 없으면 이 문짝을 부숴 버리겠소.”
쾅쾅.
노크 소리가 커짐과 더불어 손님의 목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알겠네, 나가겠네, 나갈 테니 문짝은 좀 가만두게나.”
출입문 앞에선 라포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는 문을 열었다.
끼익.
“왜 그러는 겐…….”
그러나 그는 말을 마저 할 수가 없었다.
아기의 얼굴만 한 주먹이 그의 가슴을 때렸기 때문이다.
퍼억.
갑작스러운 주먹질에 라포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엘런도 당황하고 말았다.
“이건 또 무슨…….”
문 앞에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사내들이 서 있었다.
“이 영감이 보자 보자 하니까.”
그들은 빚쟁이들이나 할 것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