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65
165
이프루를 향해 (3)
* * *
“나를 알고 있었나?”
엘런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조금은 당황한 모습이었다.
“어디선가 들었습니다.”
“타르나드 사제와 나눈 이야기를 쥐새끼처럼 몰래 훔쳐 들었나 보군.”
엘런은 양쪽 어깨를 으쓱였다.
“그저 들렸다고 해 두죠.”
“역시 생각대로 실력이 만만치가 않은 자야.”
아크렌이 몇 발자국 걸어 나왔다.
지금까지 골목의 그림자에 숨어 있어 실루엣만 볼 수 있었던 그의 모습이 달빛을 받아 형상을 갖추었다.
“너의 정체가 무엇이지? 무엇을 위해 이곳을 왔나?”
그것은 마치 엘런을 심판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뭐 별다를 게 있겠습니까? 그저 여행을 온 것입니다.”
“그저 여행객이라…….”
아크렌은 엘런의 과장된 몸짓과 회피하는 것 같은 대답 때문에 슬슬 짜증이 났다.
자신은 상대를 의식하고 한순간도 긴장을 놓치지 않고 있었는데, 정작 상대는 자신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네놈의 주위로 세상의 조화가 깨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런 네놈이 그저 여행객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란 말인가? 그것도 이 시기에 등장한 자를?”
그는 등에 메고 있던 검에 손을 가져갔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달려들 기세였다.
화륵.
반면에 엘런은 손을 펼쳐 가벼운 불꽃을 일으켰다.
1서클의 파이어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주변을 밝혔던 불꽃은 등장만큼이나 금방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 조화를 깨뜨린다는 게 바로 이런 겁니까? 이건 그냥 마법이라는 겁니다.”
아크렌은 엘런의 손 위에서 일어난 왜곡을 보고는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라고 마법을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서부 대륙과 동부 대륙의 교류가 활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닫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상인들이 오가는 만큼 많은 문물이 오가기도 했다. 당연히 마법에 관한 지식이나 마법사들도 서부 대륙으로 흘러들어 왔다.
에레네스의 크루세이더씩이나 되는 그가 마법사들을 만나보지 않았을 리도 없었다.
‘그러나 이자는 다르다.’
마법사와 대련을 펼쳐 보기도 했던 그였지만 단 한 번도 이 정도의 왜곡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마법의 발현 자체가 자연의 법칙을 왜곡시킨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에레네교는 그 행위 자체가 에레네가 창조한 완벽한 세상을 왜곡시키는 옳지 못한 것으로 상정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봐 온 그 누구도 엘런만큼 심각한 왜곡을 일으키는 자는 없었다.
“위험한 인물이다.”
“그냥 여행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얼마 전에 교황께서 받은 신탁에서 언급되었던 세상의 혼란을 일으킬 씨앗이라는 게 바로 네놈인 것 같군.”
엘런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한 일이었다.
느닷없이 자신을 쫓아온 자가 자신이 마법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악의 축으로 몰았다.
그러나 아직은 참고 넘겨 줄 수 있었다.
밀너도 단순히 종교적 신념에 의해 적대감을 가지는 것뿐이고, 그들 중엔 기본적인 입장 자체는 호의적인 사람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 검 뽑으면 그때부터는 전투입니다.”
그러나 이 이상을 넘으면 엘런도 자신에 대한 적대감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스릉.
“닥쳐라! 신성한 에레네의 조화를 깨뜨리는 자여, 그분의 칼 앞에 순응하고 교황 앞에서 조사를 받아라.”
그러나 아크렌은 엘런의 경고를 무시하고 검을 뽑았다.
원래도 연한 금빛을 띠던 검이었으나 달빛을 받으니 당장이라도 죄인을 심판할 것 같은 신성한 빛을 발했다.
“명을 재촉하는군.”
그렇다 해도 그는 엘런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다.
처음에 관심을 보인 것도 그저 이 대륙의 평균보다 강한 실력자라는 정도가 다였다.
동부 대륙에서 이미 인간을 넘는 자들과 숱한 전투를 벌이고 온 그에게 아크렌은 그저 한낱 인간이었다.
“에레네시여, 악을 처단할 힘을 내려 주시옵소서.”
우웅.
“그게 신성력이라는 건가?”
겉보기에는 밀너가 내려 준 축복으로 인해 에블린 마을 주민들의 사기가 올라가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결과물은 전혀 달랐다.
아크렌의 몸에 옅은 금빛이 일었다. 그러자 그에게서는 여태까지와는 다른 강한 힘이 느껴졌다.
“굴복하라!”
그의 검이 커다란 반원을 그렸고 미처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금빛이 꼬리를 남겼다.
그러나 역시 그뿐이었다.
‘프로즌 패터.’
양발이 얼어붙어 버린 그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근접전을 벌여야 하는 검사에게 움직이지 못하는 제약은 곧 패배와도 같았다.
“무슨 술수를 벌인 것이냐?”
아크렌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얼어붙어 버린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에게는 안 익숙할지 모르지만, 나는 즐겨 쓰는 기술이야.”
엘런은 움직이지 못하는 아크렌을 향해 스태프를 겨눴다. 이 상황이라면 무슨 마법을 사용하든 그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후회할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엘런의 웃음에 아크렌은 순간적으로 공포감을 느꼈다.
엘런에게서 천마 전쟁 당시 인간을 학살하고 다녔다고 전해지는 마왕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닥쳐. 먼저 검부터 휘둘러 놓고 입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
엘런은 아크렌이 입을 여는 것 자체를 막아 버렸다.
‘매직 미사일.’
엘런은 자신이 가진 기술 중에서 가장 깔끔하게 사람을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을 사용했다.
가느다랗지만 위력만큼은 치명적인 빛줄기가 아크렌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다.
우웅-.
파삭.
빛줄기가 아크렌의 미간에 닿기 직전, 그의 얼굴 앞에 금빛의 막이 하나 생겼다.
마치 배리어와 비슷한 것 같은 막이었다.
‘사라졌다고?’
그러나 배리어와 다른 점이 있었다.
배리어처럼 마법을 막는 개념이 아니었다.
막에 부딪힌 마법이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마치 그것은 마법을 무효화시킨다는 느낌이었다.
“칫, 이것까지 사용할 줄은 몰랐건만.”
“너야말로 이상한 수를 쓰는군.”
엘런은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매직 미사일을 쏘았다.
그러나 조금 전과 같은 매직 미사일 한 줄기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아크렌의 사방팔방에서 날아들어 빈틈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젠장.”
아크렌은 자신이 크루세이더라는 사실도 잊었는지 거친 말을 내뱉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구체를 꺼냈다.
“완전히 잘못 건드렸군.”
파앗.
그 구체를 땅으로 던지자 그곳에서는 눈을 뜨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빛이 쏟아져 나왔다.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밝음에 엘런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크루세이더라는 놈이 이상한 수만…….”
밝은 빛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고작 몇 초였다.
빛이 멎고 나자 엘런은 겨우 눈을 떴다. 그 여파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는지 여전히 눈이 시렸다.
“도망친 거야?”
빛이 사라지고 다시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에는 엘런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아크렌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이가 없군.’
먼저 공격을 걸어온 크루세이더라는 자가 위기에 처하자 몸을 내빼 버렸다.
자신이 생각한 크루세이더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트래킹.’
그는 추적 마법을 사용했다.
위치를 이동한 상대를 찾을 때, 마법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그러나 트래킹을 몇 번이고 중첩 사용해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트래킹은 마나의 흔적을 쫓는 추적 마법이었다.
이 마법으로는 신성력을 기본적인 힘으로 삼는 크루세이더를 추적할 수는 없었다.
‘이거 일이 점점 복잡해지는군.’
그는 교황청 소속의 크루세이더였다.
아직 이곳의 구조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강자로 분류할 수 있는 인물인 만큼 교황청 내에서도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에 대해 보고를 올리기라도 한다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요소가 많았다.
‘이거 이프루로 들어가기도 전에 수배당할 수도 있겠어.’
어쩌면 사제들과 친해져 내부의 정보를 빼 온다는 전략은 전면 폐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교황청과 척을 두게 되었으니 사제들이 자신을 좋게 봐줄 리가 없었다.
‘갑자기 일이 꼬였어.’
돌아오는 길 내내 최상의 시나리오를 짜고 있던 엘런은 허탈함이 느껴졌다.
한 크루세이더의 독자적 판단과 공격으로 자신의 계획이 이토록 바뀔 줄은 몰랐다.
웅성웅성.
그때, 이곳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엘런과 아크렌이 일으킨 소동을 들은 것 같았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겠다.’
괜히 소란을 더 일으키기 싫었던 엘런은 급한 대로 몸을 숨겼다.
* * *
골목에서 나온 엘런은 그대로 숙소로 돌아왔다.
여러모로 일이 많았던 터라 일단은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일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엘런은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먼저 이렇게 시비를 걸어오는 데 순순히 돌려보낼 수도 없고 말이야.’
그는 사건을 몰고 다니는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되면 정면 돌파로 가는 수밖에.’
사제와 친해질 수 없다면 차라리 교황청에서 수배를 시작하기 전에 빨리 이프루로 가는 것이 좋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이렇듯 그는 여러 가지 대안을 생각하며 숙소 문 앞에 섰다.
엘런은 손잡이를 돌리려던 손을 멈췄다.
‘오늘 날이라도 잡은 건가.’
엘런의 입에서는 당장이라도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자신의 방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냥 제압해 버린다.’
한 명에게서는 제법 강한 기운이 느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자는 비전투 인원이라고 분류해도 될 정도였고, 강한 자조차도 아크렌과 비슷한 정도였다.
안 좋은 일이 겹치다 보니 정신적으로 지쳐 버린 엘런은 어떤 전략적인 선택도 하기 싫어졌다.
그 전략을 무시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굳이 돌아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덜컹.
결정을 내린 그는 거칠게 문을 열었다. 눈에 보이자마자 얼려 버리든, 묶어 버리든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오셨소? 이토록 무례하게 방문한 나를 용서해 주시오.”
그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대뜸 사과부터 하는 상대에게 마법을 난사할 수는 없었다.
“누구요?”
그러나 엘런의 기분이 안 좋은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아주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는 라뷔에. 토마르 왕국의 국왕이오.”
엘런의 갈색 눈동자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크게 흔들렸다.
“그대의 침소에 무단으로 침입한 것을 용서하시오.”
토마르의 국왕이라면 이 토마르 땅의 모든 것이 그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는 연신 사과만 내뱉고 있었다.
‘로미우가 그대로 왕이 되었다면 이랬을까?’
문득 그런 그에게서 과거의 로미우를 떠올렸다.
이 왕의 과거도 로미우와 다를 게 없을 것 같아 보였다.
“동부 대륙에서 여행을 떠나 온 베리라고 합니다. 토마르의 국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도 일국의 왕인 자였다.
엘런은 익숙한 동작으로 그에게 예를 표했다.
“예를 거두어도 좋소.”
“감사합니다.”
“그대의 능력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소.”
엘런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라뷔에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한시가 급한 자의 모습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에블린 마을에서 몬스터 대군을 단신으로 몇 시간도 안 되어 처리했다고 하더이다.”
엘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몬스터의 침공이 끝나고 거의 곧바로 케롤로 출발했다.
이곳까지 자신의 소문이 퍼졌다고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상시 정보원이라도 두고 있었던 건가?’
아르곤을 운영하는 그는 자연스럽게 정보원에 대한 것부터 떠올렸다.
“크루세이더 아크렌과도 전투를 벌이고 왔고 말이오.”
“저를 미행이라도 하셨습니까?”
지금까지 자신을 미행하는 것 같은 낌새는 전혀 받지 못했다.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마나 스캔이나 뷰 마나 포스에 감지되는 자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신성력은 마법이라는 것에 잘 감지가 안 되나 보오.”
그 궁금증을 풀어 준 것은 라뷔에였다.
“허락 없이 미행한 것도 미안하오, 그대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소. 이해해 주시오.”
“이해해야 할 것이 무척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정말 미안하오.”
엘런이 불만을 내비치자 그는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그래, 무엇이 그렇게 궁금하고, 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엘런은 라뷔에가 빙빙 둘러 가며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모든 걸 빨리 끝내고 싶었다.
“혹시 내 편이 되어 줄 수는 없겠소?”
엘런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면식도 없는 자에게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고 하는 부탁을 들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들만 하시는군요.”
“이해하오. 하지만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만 알아주시오.”
“송구하지만, 저는 이미 모시고 있는 주군이 있습니다.”
한 번에 두 명의 군주를 모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엘런이 서부 대륙으로 온 이유는 단지 멘도사 때문이었다.
그것만 구한다면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괜히 복잡한 정치놀음에 끼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이제 곧 교황청에 쫓길 일만 남지 않았소? 에레네스에게서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오.”
그럼에도 라뷔에는 포기하지 않았다.
“걱정은 감사하지만,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만 돌아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엘런의 말에 그는 실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대의 생각이 그렇다니 알겠소. 오늘은 돌아가리다.”
“제 뜻을 헤아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로부터 잠시 후, 라뷔에는 엘런의 인사를 받으며 여관 밖으로 나왔다.
그들의 허름한 차림 때문에 그 누구도 그가 국왕인지 알지 못했다.
“이대로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지금은 아주 위험한 상황이 아닙니까?”
그들이 여관 밖으로 나오자 지금까지 라뷔에의 옆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사내가 이제야 입을 열었다.
“판톤 경, 괜찮소. 나는 첫 만남에서부터 알 수 있었소. 저자는 호의를 베풀면 분명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할 인물이오. 그리고 이곳 서부 대륙에서 에레네스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우리의 곁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