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66
166
에레네 동산 (1)
* * *
라뷔에와의 만남이 있고 바로 다음 날, 엘런은 급하게 이프루를 향해 레클리스를 몰았다.
어차피 아크렌을 만났을 때부터 최대한 빨리 에레네 동산을 방문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토마르의 왕까지 연결되었다.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피하는 게 상책이다.’
복잡한 문제는 동부 대륙에서도 넘치게 경험했다.
왕과 마탑과의 알력 싸움을 생각하기만 해도 진저리가 낫고, 그로 발생한 최악의 결과인 내전까지 마무리시키고 이곳에 왔다.
엘런은 더 이상 그런 정치 문제에 끼기 싫었다.
다행히, 그는 언제든지 이프루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동이 트기도 전에 길을 떠난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결국 챙겨 나왔구나.
‘저도 예감이 안 좋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달리는 말에서 엘런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는 다른 손으로 주머니에 있던 작은 패 하나를 꺼냈다.
주머니에 쏙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의 패였다.
매끈한 베이지색의 패에는 ‘신도증’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을 정도로 단순한 패였다.
그것은 라뷔에가 떠나고 나서 테이블에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엘런이 모르는 사이에 놓고 간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걸 안 받아들일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에레네교의 신도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신분패였다.
서부 대륙의 대부분이 에레네교를 믿는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왕실에서는 만들기 가장 쉬운 신분패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엘런에게는 어떤 것보다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현재 여행객의 신분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을 만한 게 하나도 없다.
자넷령에 들어갈 때도 라포의 보증을 받았고, 케롤로 들어갈 때도 밀너가 써 준 편지로 보증을 받았다.
문제는 이런 방법이 통하는 것도 평시라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엘런이 제시한 대체 수단을 통해 그의 신분을 증명하고 성안으로 출입을 허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엘런이 아크렌과 전투를 벌임으로써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평시가 아니게 되었다. 특히, 그 중심부인 에레네스의 이프루는 검문검색 절차가 훨씬 강화될 것이다.
-하긴 얼굴이야 내가 개발한 마법을 사용하면 바꿀 수는 있다만, 신분만큼은 보증할 수단이 없었으니. 이놈들은 어쩐 일인지 위조 신분패를 팔지도 않아.
프로뱅도 엘런의 결정에 동감했다.
‘에레네를 진심으로 믿는 자들이 워낙 많다 보니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성력이 마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임도 확인했으니, 성벽 위로 몰래 침입하는 것에 대한 위험도도 너무 커졌습니다.’
바로 그 상황에서 라뷔에는 이 패를 놓고 간 것이다. 그의 행동 때문에 엘런은 더욱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처음 만난 사람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문제를 단번에 풀 수 있는 수단을 제시했다. 그것도 자신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행동으로.’
이 일을 빌미로 분명 자신에게 요구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엘런의 입장에서는 그 패를 받아들이지 않기도 힘들었다.
차라리 당일 만난 자리에서 제시했다면 협상술을 벌일 수도 있었겠지만, 이처럼 패를 놓고 사라진 경우는 제안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밖에 선택할 수 없었다.
‘여우 같은 사람이야. 야망도 있는 것 같고.’
소년의 야망을 품은 늙은 여우.
엘런이 생각했을 때, 가장 위험한 인물상이었다.
비록 지금은 신전의 권력에 밀린 왕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 상황이 언제 역전될지는 몰랐다.
‘거기에 날 이용하겠다는 건가?’
의도는 확실해 보였지만, 엘런은 그 계획에 동참해 줄 생각이 없었다.
“잠시 검문 절차가 있겠습니다. 패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그때, 이프루의 문지기가 엘런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엘런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그림이 들려 있었다.
이미 아크렌이 보고를 마치고 교황청에 엘런을 쫓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또한, 라뷔에의 의도가 맞아떨어졌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엘런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고민을 하게 한 신도증을 문지기에게 제시했다.
“성지 순례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올해 제가 스물네 살이 되었거든요. 사도 콜브의 길을 따라갈 생각입니다.”
엘런은 스물네 살부터 에레네교의 사람들아 성지 순례라는 것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이가 되자마자 바로 성지순례를 오시다니, 정말 신앙심이 깊은가 봅니다. 저 또한 사도 콜브의 길을 따랐는데 반갑기까지 하군요. 얼른 들어가서 에레네의 흔적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문지기도 흔쾌히 엘런의 통과를 허락해 주었다.
그는 절대 엘런이 동부 대륙에서 왔다는 외지인이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이것이 엘런이 굳이 정신적 피로도를 소진해 가며 사제들과 대화를 나눈 목적이었다.
‘구성원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문화를 공유한다.’
그것은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엘런은 아무런 의심도 사지 않고 무사히 이프루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프루 성문을 지나는 순간 엘런은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은 정말이지…….
프로뱅 역시 말을 하다 말고 끝부분을 흐렸다.
‘신성합니다.’
-신성하군.
그들의 입에서는 동시에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비단 그들만의 일은 아니었다.
엘런의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도 모두 같은 표정을 한 채, 하나같이 신성하다는 말만 되뇌고 있었다.
이프루 성문에서 생기는 고질적인 정체(停滯) 현상은 바로 사람들의 이런 행동 때문이리라.
그 정도로 이프루의 광경은 신성했다.
어째서 이곳을 신의 집이라고 부르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로드의 수도 해리 포드나 제국의 수도 이크랏트보다 규모 면에서는 확실히 작았다.
그러나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력이 들어갔는지 훤히 보이는 건물들, 곳곳에 높이 솟아있는 신전. 8할의 통일성과 2할의 이질성이 만들어 내는 도시 전체의 황금비율.
이 모든 것이 이프루를 향한 수많은 음유시인의 찬사를 공감하게 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엘런은 잠시 나가 있던 넋을 얼른 불러들였다.
자신은 고작 이곳에 여행을 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곳은 자신을 쫓고 있는 사람들의 본거지였다.
이런 곳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목적을 이루고 떠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에레네 동산부터 찾아가야겠다.
* * *
에레네 동산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프루의 표지판이 잘 정비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낮은 건물이 대부분이 이프루에서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하는 교황청과 그 옆에 있는 동산을 찾지 못하는 것이 더 우스웠을 것이다.
그 덕분에 엘런은 잠깐도 헤매지 않고 동산까지 찾아올 수가 있었다.
‘예상대로 결계가 처져 있어.’
엘런은 에레네 동산에 도착하자마자 방어체계부터 조사했다.
그 결계의 속성에 따라 엘런이 침입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꼼꼼하게 점검했다.
‘그것도 신성력으로 작동하는 것이고.’
예상은 했었던 일이었다.
마법이 주된 기술이고 마나가 원료인 동부와는 달리 신성 마법이 주된 기술인 서부였다.
엘런이 걱정되는 것은 신성력의 특성을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엘런은 라뷔에가 자신을 미행한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러나 신성력의 특성 때문에 감지되지 않았다는 말 말고는 밝혀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그냥 정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침입하는 수밖에 없겠지.’
원래는 추기경이나 정원사들밖에 출입할 수 없는 곳인데, 다른 인원들이 보이는 거로 보아서 아크렌의 말대로 교황이 기도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다른 인원에 엘런이 포함되지는 않았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타르나드를 통해 틈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엘런은 못내 아쉬움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이제는 위험을 감수하고 침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몇 가지 실험을 통해, 신성력도 정령술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점에서는 마법 결계와 비슷했다.
어떤 점에서 차이가 더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엘런은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멘도사가 저곳에 있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극히 꺼리는 엘런이 이 선택을 한 것은 오직 친화력의 비약 때문이었다.
고대 최고의 정령사 비체린이 만들어 낸 비약.
분명 그 약이 자신을 지금보다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엘런을 움직이게 했다.
‘제피로스, 이시르, 부탁해.’
휘잉.
한 줄기의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시르의 얼음이 주변에 있는 네 명의 경비병을 얼려 버렸다.
그리고 엘런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마법처럼 보이지만 마법이 아닌 것.
이 땅에 거의 씨가 말랐다는 정령술이 재현되었다.
그리고 그는 길게 늘어진 에레네 동산의 벽을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그러자 이시르의 힘도 함께 사라졌다.
“꽃샘추위가 찾아오는가 봅니다.”
“그러게 으슬으슬한데? 에레네께서는 바람을 만들 때도 질투를 넣으셨나 보군.”
조금 전, 자신들의 상황이 어땠는지는 전혀 알지도 못한 채 그들은 다시금 업무로 돌아갔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군.’
한편, 동산으로 무사히 침입한 엘런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자신의 정령술이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 지 확인했다.
그러나 밖에서부터 느껴지던 신성력의 움직임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무사히 침입한 것이 확인되자 엘런은 곧바로 멘도사를 찾아 움직였다.
일전에 라포에게서 멘도사가 어디쯤에서 피는지 들었기에 무작정 산을 전부 돌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주변의 나무는 매우 울창한데, 길 만큼은 잘 정비되어 있다. 이게 라포 어르신이 했다는 일인가?’
정원사들이 관리했다는 길이 보였다.
어른의 몸통 두 개보다도 큰 나무들이 즐비한 곳임에도, 길에는 어떤 방해 요소도 없었다.
저곳을 이용하면 금방 멘도사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엘런은 일부러 잘 닦여진 길을 택하지 않고 길 주변에 있는 숲을 통해 움직였다.
저 길이 유일한 통행로인 만큼, 동산에서 움직이는 이들은 모두 이 길을 택할 것이다.
지금처럼 동산 내에 인원수가 급격히 늘었을 때는 어떤 길에 누가 있을지 몰랐다.
멈칫.
그러던 엘런이 순간적으로 발을 멈췄다.
숲에 가려져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엘런의 눈에는 그들이 똑똑히 보였다.
‘저들도 크루세이더라는 자들인가?’
그들은 아크렌이 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한 갑옷과 검을 들고 있었다.
실전용보다는 오히려 예식용에 가까워 보일 정도였다.
그들의 주위로는 옅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게 신성력인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가진 신성력이라는 말은 어떤 한 단어로 통일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자신들만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능력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일단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다행히 그들은 엘런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신성력이 엘런에게 미지의 힘인 것처럼 엘런의 능력도 그들에게는 미지의 힘이었다.
특히, 엘런은 마나만큼은 최대한 갈무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왜곡이라는 것을 고려해서 내린 선택이었다.
엘런은 그들을 피해 제단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라포의 말에 따르면 멘도사는 제단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다.
‘나오라는 멘도사는 안 나오고 애먼 녀석들만 계속 나오는군.’
제단이 가까워질수록 크루세이더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을 목격하는 빈도수가 잦아졌다.
아무래도 제단에 교황이 있다 보니 그 주위로 갈수록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저쪽…….’
제단이 있는 곳에서는 지금껏 다른 이들에게서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엘런은 그 기운을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이 신성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교황이라는 자인가?’
엘런은 자기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투지를 잠재웠다.
지금은 미지의 강자와 싸워 보는 일 따위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 대신 그는 주변으로 눈길을 돌렸다.
자신의 원래 목적을 찾기 위함이었다.
‘이쯤이라고 했는데…….’
그는 라포가 말한 위치에 도착해 있었다.
엘런의 눈이 주변을 한번 훑어보는 순간 그의 눈이 한 곳에서 멈췄다.
‘아!’
하마터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을 눌러 담았다.
그 대신 그 에너지를 발아래로 내려 보냈다.
그의 발이 반가움에 가득 찬 채로 작은 꽃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그 꽃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꽃은 책에서 묘사한 모습 그대로였다.
‘드디어 찾았다, 멘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