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70
170
친화력의 비약 (2)
* * *
휘이잉.
시원한 한 줄기의 바람이 엘런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기분 좋은 바람에 엘런의 얼굴에는 자연스럽게 미소가 그려졌다.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떤 모습일지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생생함이었다.
‘내가 눈을 감고 있었나?’
엘런은 그제 서야 자신이 눈을 감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분명 그는 조금 전 친화력의 비약을 마셨고 그 장소는 바로 바몬의 저택에 있는 지하 수련장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지하실에 이런 상쾌한 바람이 부는 것은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엘런은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그러다 그는 다시 눈을 확 감 아버렸다.
눈꺼풀이 감겨 있는 동안 확대되었던 동공이 갑작스러운 빛의 공습에 반사적으로 회피를 한 것이었다.
엘런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인상이 찌푸려지기는 했지만, 방금처럼 눈을 뜨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는……?’
엘런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의 눈동자에는 드넓게 펼쳐진 푸른 초지가 비쳤다.
그 앞으로는 별을 담은 것 같이 반짝이는 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물은 녹음이 우거진 숲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누군가 가장 조화로운 자연의 풍경을 꼽으라고 한다면, 엘런은 바로 이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와 있는 거지?’
그의 마지막 기억은 친화력의 비약을 마시고 갑자기 찾아온 두통 때문에 쓰러지던 것이었다.
그 직후, 눈을 떠 보니 그는 전혀 다른 공간에 와 있었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 광경에 엘런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엘런?”
엘런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마나를 끌어 올렸다.
‘주변에 누가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에레네교에 쫓기는 입장이다 보니 그의 본능은 매우 예민해져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부른 존재의 정체를 본 그는 맥이 풀려 버렸다.
거기에는 전체적으로 흰빛을 띠고 있는 소년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런은 그 소년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기까지 했다.
“제피로스?”
그는 바로 엘프의 숲에서부터 줄곧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제피로스였다.
이제 그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말도 제법 매끄럽게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러 있었다.
“소환도 안 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정령인 제피로스를 현실에 소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엘런의 힘이 필요했다.
그러나 엘런은 그를 불러내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령들을 소환하고 있을 때면, 마나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전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나야말로 묻고 싶어.”
오히려 제피로스가 엘런을 보고 더 놀란 것 같았다.
“엘런이 어떻게 정령계에 와 있는 거야?”
“뭐?”
엘런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아주 우스운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엘런은 그런 걸 전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럼 이곳이 정령계란 말이야?”
“맞아, 이곳은 내가 머물고 있는 정령계야.”
그 말에 엘런은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곳곳에 있는 4대 원소의 하급 정령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물론 하급 정령들 정도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었지만, 이곳에 보이는 수는 압도적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정말 정령계……?”
“엘런은 이곳에 어떻게 온 거야?”
비록 아직 다섯 마디 이상 나누어 본 적 없는 이시르보다는 낫다고는 하나, 제피로스도 바람의 정령치고는 그렇게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쩐지 제피로스는 현실에 있을 때보다도 더 활기차 보였다.
아무래도 정령계이다 보니 정령의 힘이 극대화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잘 모르겠어. 어떤 약을 마셨고, 눈을 뜨고 나니 이곳이었어.”
“약?”
“비체린 가문에서 만든 친화력의 비약이라는 건데, 혹시 이 약에 대해 아는 게 있어?
혹시나 해서 물었던 것이지만, 결과는 역시 아니었다.
제피로스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것이다.
“나도 원래 오랫동안 잊혔던 고대 정령이었어. 엘런이 아니었다면 다시 정령계로 돌아올 수조차 있었을지 확신하기도 어렵지. 소환된 후에도 이전에 있었던 기억이 완전하지도 않아.”
“그랬구나…….”
엘런은 실망스러움에 땅에 철퍼덕 앉았다.
하메론과의 격차를 줄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마셨던 비약이 그저 차원 이동을 시키는 약이었다.
평소 정령계라는 곳이 궁금하기도 했고 이런 이세계에 오는 것은 좋은 경험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엘런에게 필요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설령 단순히 차원 이동만이 아니라, 이곳에 성장을 위한 방법이 숨겨져 있다고 하더라도 엘런은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까지의 고생이 헛수고가 되는 것은 맥 빠지는 일이다.’
쩌저적.
엘런이 실망감에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였다.
갑자기 그 ‘공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또 뭐야?”
엘런은 갑자기 공간에 금이 생기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잠시 후, 그 균열 속에서 색이 각기 다른 4개의 빛이 튀어나왔다.
“뭐야? 처음 보는 꼬마잖아?”
“오랜만에 그 녀석이 온 건 줄 알았는데 말이야.”
“지금 천 년째 그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걸 알고나 있는 거냐?”
“그만들 해요. 어차피 그는 앞으로 백 년은 더 똑같은 소리를 할 거니까 말이에요.”
빛은 서로 다투기라도 하는 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엘런은 이 반딧불이 같은 것들을 지켜보았다.
“나만 기다린 건 아니잖아! 너희들도 기다려 놓고.”
“조용히 해라.”
그와 중에도 빛들은 여전히 다툼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던 엘런은 점차 한심한 눈빛으로 변해 갔다.
다투는 내용이 지극히 유치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 빛들은 저마다 형상을 갖추어갔다.
엘런은 점점 형상을 갖추어 가던 네 가지의 빛 중 하나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는 앉아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트, 트로웰 님!”
구릿빛 피부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근육을 가진 전사의 모습.
일전에 엘프의 숲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호오, 나를 아는가?”
“또, 그 근엄한 척. 질리지도 않나?”
붉은색의 빛이 트로웰을 보며 말했다.
엘런은 그를 직접 본 적이 없었지만, 정령왕 트로웰에게 저토록 평어를 사용할 수 있는 불의 정령이 누구인지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이프리트 님?”
“나도 알아보는 건가? 인간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르구나.”
“이프리트, 당신도 트로웰에게 할 말은 없는 것 같네요.”
“그러니까. 이프리트도 목소리를 깔고 말하는 것 좀 봐.”
이윽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호호 웃으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엘라임과 실피드였다.
엘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령왕이라 함은 이 정령계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던가.
아무리 정령계라고 해도 그런 정령왕을, 그것도 넷이나 동시에 만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머, 꼬마가 당황했잖아.”
실피드가 잔뜩 굳어 있는 엘런을 가리키며 말했다.
“쳇, 나는 비체린이라도 다시 온 줄 알았건만.”
트로웰은 여전히 아쉽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는 엘런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때 주변에 있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엘런은 약간의 섭섭함이 느껴졌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수천 년은 존재해 온 이에게 고작 3분 남짓한 만남이 어떤 의미일지 엘런은 가늠조차 불가능했다.
“그런데 비체린도 아닌 네가 어떻게 정령계로 온 것이지?”
이프리트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지금까지 한심한 소리나 늘어놓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작은 불만을 내비치자 엘런은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의 눈빛에 압도당해 버린 것이다.
“비체린이 남긴 비약을 마셨습니다.”
엘런은 그 압박감 속에서도 겨우겨우 입을 열어 그의 물음에 답했다.
“비약?”
“그렇습니다. 친화력의 비약이라 부르는 것인데, 말씀하셨던 비체린이라는 정령사가 남긴 책에서 제조법을 발견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정령왕들이 모두 트로웰을 노려보았다.
“미안해. 그냥 그 녀석을 이곳으로 초대하고 싶어서 만든 것이었어. 이렇게 책에 남길 줄은 몰랐다고.”
트로웰의 변명에도 여전히 다른 정령왕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뭐야? 그럼 친화력의 비약은 정령왕 트로웰이 비체린에게 알려 준 거였어?”
엘런은 속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겉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막았다.
“그런데 이 아이도 조금 특별한 것 같은데요?”
엘라임이 엘런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말에 따라 다른 정령왕들도 엘런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꼬마…….”
“주변에서 엄청난 왜곡이 느껴지는데? 이건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건가?”
이제는 엘런도 이런 반응이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물론 저들이 말하는 왜곡과 에레네교가 말하는 왜곡은 다른 의미였다.
그들은 오히려 세계수가 말했던 왜곡에 더 가까운 의미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엘런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응? 너는 나를 만난 적이 있구나?”
트로웰의 의문에 다른 정령왕들도 얼굴에 호기심을 띠었다.
“얼마 전에 몸 풀기 삼아 나갔던 엘프의 숲, 거기서 인과율이 비틀어진 것 같은 기운이 느껴졌었는데 그게 이 아이인 것 같아.”
“그때는 대지의 주인께 목숨을 신세졌습니다.”
엘런의 인사에 트로웰은 그저 허허 웃기만 하였다.
“트로웰 저놈은 자기 혼자 저렇게 싸돌아다닌단 말이지.”
“부러워해도 어쩔 수 없어요, 실피드. 비체린 덕에 트로웰이 중간계의 장벽을 쉽게 넘을 수 있게 된 것이니까요.”
엘라임의 말에 실피드의 입이 앞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나도 그 비체린이 온 줄 알고 한달음에 뛰어온 거라고. 그런데 이런 꼬마라니.”
실피드가 엘런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녀의 몸은 남성을 홀릴 정도로 충분히 육감적이었지만, 정령왕을 바로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엘런은 그런 걸 느낄 여유도 없었다.
“너는 날 소환할 수 없어? 여기는 지루하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저는 실피드 님을 소환할 수 있는 정도가 되지 못합니다.”
엘런의 말에 실피드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긴 너의 친화력을 보니까 참담하긴 하구나. 괜한 기대를 안 하는 게 좋겠어.”
엘런의 정곡을 찌른 실피드는 과장된 몸짓을 부리며 뒤로 물러갔다.
“호호, 그래서 당신은 어떤 일로 여기를 오셨나요?”
그런 실피드를 보며 가볍게 웃은 엘라임이 엘런을 향해 물었다.
고대 시대를 지나며 각 세계 간의 벽이 두꺼워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령왕들의 소환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유희의 감소로도 이어졌다.
그러던 그들도 비체린 이후 천 년이 넘도록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인간에 흥미가 생긴 것이었다.
“저는 비체린의 비약으로 정령 친화력을 키울 수 있을까 해서 그 약을 마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령계로 통하는 것인 줄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제야 엘런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이었군.”
이번에는 이프리트가 나섰다. 정령왕들의 시도 때도 없는 수다스러움에 엘런은 점점 지쳐 가는 것 같았다.
“트로웰 저 녀석이 비체린에게 그 약을 만들어 준 것도 친화력을 키워 주기 위함이 맞았다.”
“정말입니까?”
그 말에 엘런의 눈이 빛났다.
친화력의 비약이 그저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 수단 정도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지 않을 터였다.
“그래, 정확히 그 약은 정령계에서 수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약이지.”
“또 쓸데없는 설명이 시작되었군. 네가 설명을 시작하면 적어도 하루는 계속 그러고 있을 게 뻔하다. 인간에게는 하루가 네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다르다니까. 그냥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이프리트가 본격적으로 입을 열려고 할 때, 트로웰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자신이 말할 기회를 빼앗긴 이프리트는 시무룩해졌다.
“꼬마, 네가 소환한 정령이 있느냐?”
“예, 그렇습니다. 아까부터 제 옆에 있었습니다.”
엘런은 제피로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정령왕들도 엘런의 손가락을 따라 제피로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제피로스를 본 정령왕들의 눈이 찢어질 것 같이 커졌다.
무엇보다 그다음에 이어진 정령왕들의 행동에 엘런의 눈도 그들과 똑같이 되었다.
“정령들의 조상이시여.”
4명의 정령왕이 제피로스를 향해 동시에 고개를 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