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71
171
친화력의 비약 (3)
* * *
“갑자기 왜들 이러십니까?”
엘런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령왕들을 보고 매우 당황했다.
케롤에서 보았던 국왕 라뷔에의 정중함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들이 누구인가. 정령계의 주인이자 모든 정령의 어버이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정령계에서 만큼은 드래곤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그런 이들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것은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볼 수 없었고 그 어떤 용사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진풍경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고개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 어딘가 이상했다.
정확히는, 그들은 엘런이 아니라 제피로스 쪽을 향하고 있었다.
“제피로스를 아십니까?”
엘런이 알기로도 제피로스는 일반적인 정령과는 다른 존재였다.
심증은 있었던 그는 확인차 정령왕들에게 물었다.
“그는 모든 정령의 조상과도 같은 존재예요.”
대답을 해 준 것은 엘라임이었다.
그녀의 두 볼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피로스를 만났다는 것에 한껏 들뜬 것 같았다.
“정령의 조상이라니요? 잊힌 정령이라고 불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잊힌 정령. 그들은 현재 존재하는 정령의 모태와도 같은 존재예요. 당시 정령은 신에 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창조주 에레네는 그들로부터 정령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엘런은 잊힌 정령이라는 말과 에레네라는 말에 두 번 놀랐다.
단순히 종교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던 이름이 정령왕들의 입에서 직접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엘런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럼 제피로스가 신의 버금가는 능력을 갖춘 정령의 조상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래요. 아직 겉모습을 보아하니 완전한 성장이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지만 틀림없어요.”
모두의 혼란 속에서도 제피로스만이 그들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계약한 정령인가?”
“어떻게 한 거야? 고대 정령은 1만 년도 전에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게,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계약식에 따라 계약했을 뿐인데, 제피로스가 나와 버린 것입니다.”
정령왕들은 여전히 상기된 표정이었다.
수천 년을 존재해 온 정령왕들조차도 호기심 앞에서는 여느 존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다른 존재들보다 더 강한 열정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였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단 말이야. 이렇게 정령 친화력이 떨어지는 자가 어떻게 고대 정령을 소환한 거지?”
실피드는 엘런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더니 홱 돌아서며 말했다.
‘그래도 면전에다 대고 그렇게 말하다니.’
정령왕이 보았을 때는 형편없는 실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엘런은 실피드의 말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그 정령 친화력을 높일 방법이 있는 것입니까?”
엘런은 약간은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을 했다.
자신이 그 고생을 하며 비약을 만들게 된 목적은 분명했다. 정령 친화력을 대폭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약의 정확한 사용법을 저들이 알려 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게 목적이었지?”
실피드는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대답했다.
수천 년을 살아온 정령왕의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가벼워 보였다.
그녀는 여러모로 어린 소녀와 같은 느낌이 드는 존재였다.
“꼬마야, 너는 정령 친화력이 뭔지 제대로 알고 있니?”
“정령과 친한 정도, 정령계에 있는 정령을 중간계로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까?”
정령왕들은 그간 존재해 온 세월이 길기 때문인지 아니면,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많아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말을 빙빙 둘러 가며 말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엘런이 걸고넘어질 수는 없었다.
“그렇긴 하지. 그럼 그게 대부분 유전적인 요인에 귀속된다는 것도 알고 있지?”
“예, 잘 알고 있었습니다.”
“너의 친화력은 인간치고는 괜찮은 정도라고 해도, 우리가 봤을 때는 아주 형편없는 수준이야.”
엘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나마 재능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정령술이었다.
엘프의 숲에서 정령에 대해 배울 때도 엘프인 페리스가 재능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실피드의 말대로 자신은 그저 인간치고는 괜찮은 정도라는 것이다.
‘그럼 친화력을 올릴 수 없다는 말인가?’
유전적인 요인이 대부분이라는 말은 결국 후천적인 노력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의미였다.
노력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는 엘런이었다.
그러나 노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것은 엘런이 닿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비체린은 왜 이런 약을 친화력의 비약이라며 책에 남겨 둔 것이지?’
그런 엘런의 표정을 알아차린 실피드가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러나 그다음 입에서 나온 말은 아무리 엘런을 더 실망스럽게 했다.
“꼬마가 크게 실망했나 보구나.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네가 강해질 방법은 어디에도 없단다. 넌 비체린에게 속은 거야.”
엘런의 표정이 더 안 좋아지자 실피드가 숨이 넘어갈 것 같이 웃었다.
“장난 좀 그만 해요. 트로웰, 이프리트. 실피드를 좀 말려 주세요.”
이번에도 그녀의 폭주를 막아 준 것은 엘라임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가만히 있어, 실피드.”
“엘라임 화나면 무섭단 말이다.”
정령왕 세 명이 서로 투덕거리고 있는 모습을 뒤로한 채, 엘라임이 엘런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부 맞는 말은 아니랍니다.”
“그럼 방법이 있다는 말입니까?”
엘라임 덕분에 엘런의 눈빛은 다시 기대로 차오를 수 있었다.
“조금 전, 트로웰이 방법이 있다고 설명하려고 했잖아요. 그가 하려고 했던 말은 정령과의 정서적 교류를 키우는 방법이에요.”
엘런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령과의 교류라면 대화를 하거나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잘 알고 있네요.”
실피드에 비하면 엘라임은 천사와 다름없었다. 그녀는 엘런의 말에 친절하고 자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그건…….”
“알아요. 그건 너무 느리다는 거죠?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마음속에 조급함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자신의 속마음을 읽힌 것 같은 느낌에 엘런은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히 그건 비체린이 만든 비약이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어떤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있지요. 그건 당신과 제피로스가 한계점까지 가 보는 거예요.”
“한계점까지라니요?”
엘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엘라임은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과 제피로스의 교감을 끌어올릴 만한 한계점을 말하는 거예요. 물론 현실에서는 그 한계점까지 가 볼 기회가 거의 없겠지만, 이곳 정령계는 정신체의 세계이기 때문에 당신은 한계점을 몇 번이고 체험하는 게 가능하답니다.”
엘런은 더 질문하려고 했지만, 엘라임은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자세한 건 진행해 보면 알 거예요. 우리가 그 역할을 해 줄게요. 당신은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된답니다.”
엘라임이 다른 정령왕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투덕거리고 있던 그들이 엘런의 앞으로 다가왔다.
“고대 정령의 수련인 만큼 정령왕인 우리들이 나서 주는 것도 당연하겠지.”
이프리트가 위엄을 차리며 말했다.
“시작하자.”
그들은 서로의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손이 움직였다.
그러자 갑자기 엘런을 둘러싸고 있던 세상이 바뀌었다.
“이게 지금 무슨…….”
엘런이 이 현상에 의문을 가질 틈도 없었다.
그는 말 그대로 순식간에 아무것도 없는 흰색 공간에 떨어지게 되었다.
“제피로스?”
“응.”
그 공간에는 제피로스와 엘런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의 소리가 어디까지 뻗어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현실성이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진리’가 있던 공간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거기서 당신들의 한계에 도달하는 거예요. 아 참, 어차피 그곳은 정신의 세계이니 목숨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어디선가 엘라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런은 두리번거리며 목소리의 위치를 찾으려 했지만,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쉬이잉.
그때, 엘런과 제피로스의 눈앞에 새로운 형상이 하나 나타났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형상이 갖추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실피드 님?”
하얀 피부에 나풀거리는 천을 휘감고 있는 여성은 직전까지 엘런을 놀리던 실피드였다.
“아닌가?”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엘런은 의문을 가졌다.
분명 생긴 것은 실피드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저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절대 실피드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서는 실피드 같이 한 줄기의 자유로운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원래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의 상태처럼 보였다.
그때, 그녀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엘런은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피잉.
무슨 소리였을까.
귀에 거슬리는 소리, 예리하게 뻗어 나오는 바람 소리,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똑똑히 들려온 바로 그 소리.
“크헉.”
쿠웅.
그 소리와 함께 엘런의 몸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엘런의 몸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뭐지? 내가 왜…….’
엘런의 시야가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그러나 자신을 공격한 그녀는 나타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크헉.”
한 움큼의 피를 토함과 동시에 그녀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가더니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엘런은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다.
“으윽!”
엘런은 감고 있던 눈을 부릅떴다.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뜨는 모습이 마치 악몽에서 깨어나는 어린아이 같았다.
‘어라? 방금 분명히…….’
그는 더듬더듬 자신의 몸을 만졌다. 그러나 아무런 상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생생한데.’
가슴팍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고통은 여전히 직전의 상태를 뇌로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어떤 상흔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러나 엘런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조금 전처럼 또 하나의 형상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프리트 님?’
건장한 체격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옷처럼 두르고 있는 그는 이프리트였다.
그러나 그에게서도 역시 불꽃의 열기보다는 공허함만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움직였다.
화륵.
엘런의 명치에서부터 시작된 불꽃이 문자 그대로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엘런이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불꽃은 그의 몸을 태워 버렸다.
그것은 두 번째 죽음이었다.
“크아악!”
갑자기 눈을 뜨는 것까지도 똑같았다.
화끈.
불꽃이 일었던 피부에서 여전히 열기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 역시 단지 감각일 뿐, 몸에는 어떠한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엘라임 님의 말씀이 이런 뜻이었군.’
엘런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임이 말한 한계점에 도달한다는 것, 정령왕들이 도와준다는 것, 정신세계이니 신경 쓰지 말라는 것까지도 모두 이해가 되었다.
‘죽음을 초월한 채로 자신의 한계에 도달하는 것.’
죽지 않고 한계까지 치달을 수 있는 수련은 아마 모든 무인의 꿈같은 수련법일 것이다.
인간은 원래 한계를 뛰어넘을 때 비로소 성장한다.
그것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더욱 그랬다.
그러나 한계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한계이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계로부터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최고의 수련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뜻은 알겠는데 그래도…….’
엘런은 정신체의 세계에서 죽음을 초월했을지언정 죽음의 감각을 초월한 것은 아니었다.
죽는 순간의 고통은 그대로 살아 있었고, 그것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어졌다.
‘이래서야, 원.’
엘런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다시 예의 그 빛이 나타나더니 형상을 갖추었다.
‘이번에는 당신이군요.’
양손에 엘런의 몸보다 더 큰 도끼를 들고 있는 남자. 그는 트로웰이었다.
“이제 뜻도 알았겠다, 제대로 임하겠습니다.”
그러나 엘런의 눈빛도 직전 두 번의 죽음 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저들이 그저 수련을 위한 인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제피로스.”
지금까지 엘런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던 제피로스도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엘런의 감정이 전이되었을 수도, 아니면 아무리 정령이라도 계속되는 죽음은 유쾌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양자 모두 그의 전투력을 끌어올리기에는 유용했다.
“이번에는 선공이다.”
“알겠어.”
엘런의 모습이 사라졌다.
콰앙.
그와 동시에 트로웰의 커다란 도끼가 바닥을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