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74
174
조사 (1)
정령계에서 중간계로 돌아올 때, 엘런은 순간적으로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더니 속이 울렁거렸다.
공간 이동을 겪을 때와 비슷했지만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했다.
더 이상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다고 느낄 때쯤 그 감각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비록 엘런은 눈을 감고 있는 상태였지만 확신했다.
‘돌아왔구나.’
그는 바몬의 지하 수련장이 아니라 잘 정돈된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굳이 누군가 말을 안 해 주더라도 그는 자신이 왜 여기에 누워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엘런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이렇게 눈떠 보니 침대인 것도 이제는 익숙해질 지경이군.’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방을 정리하고 있는 하녀의 뒷모습이었다.
그녀는 엘런이 깨어난 것도 모른 채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 침대를 정리…… 어머!”
혼잣말을 하며 몸을 돌린 하녀는 엘런이 일어난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자신의 행동이 무례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장 엘런에게 사과부터 하였다.
“나는 괜찮네. 혹시 괜찮다면 물을 마실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녀는 물을 가지러 가기 위해 얼른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자 엘런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쾅쾅쾅쾅.
잠시 후, 엘런의 귀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하녀의 가벼운 발걸음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엘런, 괜찮은 것이오?”
물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바로 바몬이었다.
그의 눈에 한가득 담겨 있는 걱정은 툭 치기만 해도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엘런은 그런 그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걱정했었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오? 밥을 세 끼째 거르기에 수련장의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그대가 쓰러져 있는 게 아니겠소.”
“걱정 끼쳐서 미안합니다.”
엘런은 일단 바몬을 진정시켰다.
그가 엘런이 죽기 직전까지라도 간 양 안절부절 못했기 때문이었다.
“바몬 님 덕분에 약을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완성되자마자 참지 못하고 그만 들이켜 버렸지요. 제가 너무 성급한 탓에 걱정을 끼쳐 드린 것 같습니다.”
엘런의 말에 바몬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그대가 무사하기만 하면 되었소. 몸은 좀 어떻소? 이제 괜찮은 것이오?”
“잘 간호해 주신 덕분입니다. 이제 거뜬합니다.”
“다행이오.”
엘런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바몬은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제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겁니까?”
“대략 5일은 쓰러져 있었을 것이오.”
‘생각보다는 길게 있지 않았군.’
아무래도 정령계의 시간이 훨씬 빠르게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트로웰이 만든 시뮬레이션이라는 세계의 시간은 다른 곳보다 빠르게 흘렀다.
애초에 시간 개념이 없는 세계이기는 했지만, 거기 있는 동안 엘런이 체감한 시간만 해도 한 달은 지났다고 생각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소.”
바몬의 말에 엘런은 하고 있던 생각을 중단했다.
“아직도 이프루의 통금령이 풀리지 않았소.”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통금령이 이 정도로 길게 이어질 것이라고는 그로서도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프루는 에레네교의 성지임과 동시에 한 나라의 수도였다. 즉, 가장 많은 인구와 돈이 몰려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는 늘 상인들이 들끓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프루는 모든 상인의 출입을 막으면서까지 통금령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인들에게 보상해 줘야 할 돈이며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그렇게까지 하면서 그대를 잡으려 하는 이유는 역시 교황께서 받은 신탁 때문일 것이오. 그들은 그대가 아직 이프루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음에 틀림없소.”
그러나 위급 상황을 전하는 바몬과는 달리 그것을 듣고 있는 엘런의 표정은 고요하기만 했다.
“괜찮습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것이오?”
바몬은 엘런의 표정을 보고 당황했다.
쓰러지기 전만 하더라도 그에게서는 조급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의식을 찾은 그에게서는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근원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뚝뚝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5일 전이었으면 전전긍긍했겠으나 지금은 방법이 있습니다.”
엘런은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 * *
이프루 신전.
그것은 그저 화려하다는 수식어로는 부족한 건물이었다.
이프루에 홀로 우뚝 솟은 신전은 만인을 내려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으며, 창조주 에레네의 집이라고 불리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그리고 이곳은 이프루 신전은 신을 모시는 신전이자 교황이 머무는 교황청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아직도 혼란의 씨앗을 잡지 못한 것인가요?”
다른 사제들보다 훨씬 더 화려한 장식이 들어가 있는 사제복을 입고 있는 여성이었다.
허리 밑에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렸다.
그녀는 기도를 마치고 온 직후인지 기도에 쓰는 성물함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움직임에서조차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분명 이프루 내부에 있는 것은 확실하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녀에게 고개를 숙인 사내는 바로 엘런을 쫓아다니던 한센이었다.
“천리안을 쓰고도 못 잡을 정도라니, 솔직히 저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놀랐어요.”
성물함을 모두 정리한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흰 피부 때문인지 어두운 방 안에서도 그녀 주위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누군가 그를 돕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여태까지 신의 눈길을 피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한센 경은 짐작이라도 가는 분이 있나요?”
“짐작이 가는 자가 있기는 합니다.”
그녀의 질문에 한센은 잠깐 생각을 하고는 대답했다.
“경이 생각하는 조력자가 누구인가요?”
“크루세이더 바몬입니다.”
“크루세이더 바몬이 보여 준 충성심은 한센 경도 잘 알 텐데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나요?”
그의 추측에도 그녀는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한센도 그녀의 반응에 딱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혼란의 씨앗은 서부가 아닌 동부 대륙에서 건너온 자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행하는 기적에 대해서도 알 리가 만무합니다. 실제로 그는 에레네 동산에서 천리안에 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천리안의 속임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그를 자신이 직접 쫓지 않았던가.
한센은 그가 신성 마법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그는 천리안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의 조력을 받고 있음에 틀림이 없지요. 동부에서 건너와 서부 대륙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를 도울 내부인은 크루세이더 바몬밖에 없습니다.”
사실, 한센은 엘런이 사라진 순간부터 곧바로 바몬을 의심했다.
그 의심은 지금까지도 여전했지만, 물증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소집령에 늦게 도착했다거나, 씨앗이 사라지고 난 직후 이프루 밖을 나가려 했다는 점들을 봐도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크루세이더의 저택을 조사하는 것에 무리가 따랐기에 수사를 벌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센은 그녀가 교황에 즉위할 때부터 줄곧 자신을 보필하던 이였다.
그랬기에 그녀는 지금 한센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좋아요. 같은 에레네의 형제를 의심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일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특수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 말에 한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잠깐의 그 미소는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졌다.
“크루세이더 바몬의 저택을 수사할 것을 허가합니다.”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말이 떨어지자 한센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상단들에게 많은 돈을 배상하면서까지 이프루의 문을 굳게 잠가 두었다.
그는 이프루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도시 곳곳에 인원들을 배치해 바몬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 역시도 정상적인 동선 외에는 다른 행태를 보이지 않았다.
바몬이 그를 몰래 빼돌리거나 할 여유는 없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가장 필수적인 요소였던 교황의 허락까지 받았다. 이로써 모든 준비가 완성되었다.
‘이제 심증을 물증으로만 만들면 되겠군.’
에레네의 신탁에서 말한 혼란의 씨앗.
이 평화로운 시대에 그런 혼란은 악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아주 적은 가능성이라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수호자인 자신이 할 일이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해 온 일이었고 앞으로도 수도 없이 해 갈 일이다.
한센은 별다를 것 없는 마음으로 교황청의 문을 나섰다.
* * *
“크루세이더 바몬은 어서 나와 교황님의 조사를 받으라.”
이프루에서 비교적 한적한 곳에 있는 바몬의 저택 앞에서 이른 아침부터 소란이 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때 아닌 조사 명령에 저택의 하인들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일단 진정하시고 안으로 드셔서 차라도 한잔하시지요.”
어찌 되었든 하인의 역할은 저택의 안정이었다.
하인은 그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조사대를 구슬리려 했다.
“방금 말한 그대로이다. 크루세이더 바몬이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강제로 들어가 조사를 벌이도록 하겠다.”
그러나 그런 하인의 노력에도 조사대의 태도는 완강하기만 했다.
“어서 문을 열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교황의 허가에 따라 모두 부수고 강제로 집행하겠다.”
“히익!”
조사대의 위압감에도 곧잘 버티고 있던 하인이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그 기운은 그저 몸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목덜미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위압감이라기보다 차라리 살기에 가까운 기운이었다.
“어쩔 수 없군.”
한센의 손이 검 자루로 움직였다.
저 손이 검 자루에 닿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오, 한센 경?”
눈을 질끈 감은 하인의 숨통을 트이게 해 준 것은 뒤에서 들려온 바몬의 목소리였다.
“드디어 나왔군, 크루세이더 바몬. 경은 지금 에레네 동산을 무단으로 침입한 죄인을 숨겨 주고 있다는 죄목을 받고 있소. 이에 교황청의 조사대가 경의 저택을 수사하려 하오. 경은 조사대에 순순히 협조하도록 하시오.”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살기가 돌연 사라지더니 다시 차분함이 찾아왔다.
“나도 그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그런데 숨겨 주고 있다니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잔말은 필요 없소.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려고 온 것이오.”
“알겠소. 교황청의 조사대에게 문을 열어 드리도록 하라.”
저택의 문이 열리고 바몬이 조사대를 안내했다.
“후우.”
그들이 저택에 들어갈 때쯤에야 하인은 참고 있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교황께서도 역시 제가 외지인이라 온전히 믿지는 못하시나 보오.”
“그건 아니오. 그저 형식적인 조사일 뿐이니 경도 너무 심려치는 마시오.”
“나도 이해는 하는 바이오. 교황님의 말씀인 만큼 적극적으로 협조하도록 하겠소.”
“이해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오.”
이후, 바몬은 조사대의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들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자신이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그것은 강한 저항을 생각했던 조사대의 입장에서도 의외인 점이었다.
“이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 밖인 것은 바몬의 태도뿐만이 아니었다.
의기양양하게 엘런을 찾으러 온 그들이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애초에 외부인이 머문 흔적조차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예고도 없이 덮친 것인데, 아무런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내가 죄 없는 자를 의심했단 말인가?’
한센도 확신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에 조금은 당황하고 있었다.
“크루세이더 바몬, 괜히 그대를 의심해서 미안하오.”
자신의 잘못이라면 응당 사과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랬기에 한센은 곧바로 바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니오. 나 같아도 나를 의심했을 것이오.”
“이에 대한 보상은 교황청에 직접 말해 놓도록 하겠소.”
“합리적인 의심이었기에 보상받을 마음도 없소. 이제 다른 이들도 조사를 해야 하지 않겠소? 내가 안내해 드리리다.”
바몬이 움직이자 한센은 조사대를 모두 모아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다면 그자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한센은 바몬의 뒤를 따라가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엘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조력자가 있다는 뜻인데…….’
휘잉.
그때,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그것은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라 밑에서 위로 부는 바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한센의 눈이 곧바로 바닥을 향했다.
“잠깐.”
“왜 그러시오?”
뒤를 돌아본 바몬은 조금 긴장된 모습이었다.
“크루세이더 바몬, 혹시 우리에게 아직 보여 주지 않은 장소가 있는 것 같소만.”
그의 눈이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의 것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