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75
175
조사 (2)
“나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소.”
바몬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했으나 한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죄 없는 자를 의심한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하겠소. 그러나 그러려면 그대가 죄가 없음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소? 예컨대…….”
우지끈.
한센이 검을 치켜 들더니 바닥을 뚫었다.
그와 동시에 바몬의 표정에 불안함이 서렸다.
“이런 곳까지도 전부 확인해야겠지.”
나무판자를 뚫고 나자 그 밑에는 철판으로 된 문이 있었다.
철판이라고 해도 그렇게 두꺼운 것은 아니었다.
“직접 안내해 주시겠소?”
“크흠.”
동등한 크루세이더라 하더라도, 한센은 크루세이더들의 수장이자 현재 교황청 조사대의 대장 신분으로 이곳에 와 있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명령에 무작정 항명을 할 수는 없었다.
끼익.
휘이이잉.
하는 수 없이 바몬은 문을 열었다.
그가 철문을 열자 여태까지 문에 막혀 있던 바람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지하 깊은 곳에서 나오는 바람 탓에 일부 조사대는 한기를 느끼기도 했다.
“조사대부터 투입한다.”
한센의 명령으로 조사대가 문틈을 비집고 재빠르게 지하실로 진입했다.
오직 그만이 유유히 바몬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이런 곳이 있었군. 여기는 무엇을 위한 곳이오?”
“내 개인 수련장이오.”
바몬은 초조함 때문인지 목소리마저 굳어 있었다.
그 변화를 본 한센은 자신의 직감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역시 그대의 실력은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군. 이런 비밀스러운 곳에서 혼자 수련에 정진하고 있었다니. 오직 에레네만이 그대의 성실을 눈치챘을 것이오.”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자 그곳에는 5개의 문이 있었다.
이미 조사대가 4개의 문을 열고 들어가 조사를 벌이는 중이었다.
“특이점이 하나라도 발견되면 빠짐없이 나에게 고하라.”
“한센 경, 발견했습니다.”
한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조사대원이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이곳에는 외부인이 생활하던 흔적들이 있습니다.”
바몬의 얼굴에 커다란 느낌표가 떠올랐다.
‘이곳까지 발견할 줄은 몰랐는데.’
그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조사대원은 계속해서 보고를 이어갔다.
“바로 이것입니다.”
조사대원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손에 들고 있었다.
한센은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이건 서부 대륙에서는 보기 드문 갈색 머리카락이 아니오? 그러고 보니 그대의 식솔들 중에서도 갈색 머리카락은 한 명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자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길이가 짧군.”
“그것은…….”
당연하게도 바몬은 그의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이곳까지 발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과오였다.
“아니 되었소.”
한센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대의 저택 주위로 결계를 쳐놓았소. 누군가 그곳을 통과한다면, 그 생명 반응이 곧바로 나에게 전달되었을 것이오. 그리고 아직 신호가 없었으니 이곳을 빠져나간 사람은 없다는 말이 되겠군.”
한센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대에게 결계에 대해 사전에 말하지 못한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오. 그러나 절차상으로는 문제가 없었으니 너무 안 좋게는 생각하지 말아 주시오.”
그는 각 방에서 조사를 벌이고 있는 대원들은 자신의 앞으로 집결시켰다.
“모두 수고했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지만, 다행이도 혼란의 씨앗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군.”
그러면서 그는 맨뒤에 보이는 방을 가리켰다.
그 방은 아직 대원들이 조사를 하지 않은 곳이었다.
“전원 저곳으로 진입한다.”
척척.
마치 안에 있는 사람을 위협하기라도 하듯, 대원들은 큰소리로 대답하고는 발을 움직였다.
조사대원의 수는 몇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바몬에게만큼은 그들의 발소리가 1개 군단의 그것 같이 느껴졌다.
달칵.
그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바몬의 손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으로 옮겨갔다.
‘여차하면 엘런과 함께 친다.’
비록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에레네교였지만, 그에게 두 번째 삶을 준 것은 바로 엘런이었다.
그런 엘런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된 바몬이었다.
그러나 문을 연 후의 결과는 모두가 예상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아무도 없다고 하였소?”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바몬이었다.
그 다음으로 한센의 반응이 이어졌다.
덜컹.
그는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고 방으로 들어갔다.
조사대원들의 말대로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서들로 보나 바몬의 반응으로 보나 이곳에 있는 것이 확실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지?’
스윽.
그는 침착하게 주변의 단서들을 살폈다.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었으며 그밖에도 그자가 직전까지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는 다른 증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 바로 그자만이 이곳에 없었다.
저택의 모든 곳을 조사했다. 게다가 저택 주변으로는 결계를 빈틈없이 쳐 놓았다.
그 결계는 생명 반응을 감지하는 것으로 심장이 뛰는 자라면 누구라도 몰래 통과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처음에 이곳으로 올 때는 심증뿐인 추측의 물증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더 확실한 심증만을 찾았을 뿐이다.
외부인의 흔적은 있으나 정작 외부인은 없다.
자신이 직접 펼친 결계였기에 그곳을 몰래 빠져나갔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없었다.
‘엘런, 이게 어떻게 된 것이오?’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는 것은 바몬도 마찬가지였다.
한센은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바몬은 한센이 자신의 저택으로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지하 수련장은 아직 대외적으로도 공개되지 않았던 곳이었다.
엘런이 그곳에 숨어 있다면, 조사대가 들이닥쳤을 때도 발각될 위험이 없었다.
그렇게 한센의 성격을 역으로 이용해 의심을 걷어내려고 했던 바몬은 지하실의 문이 열렸을 때,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지하실 안은 자신의 생각과는 달랐다.
분명 조사대가 들이닥치기 직전까지도 이 안에는 엘런이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들 사이에 흐르던 침묵을 먼저 깨버린 것은 한센이었다.
“모두, 비밀 통로가 있는지 샅샅이 뒤져!”
그의 명령이 지하실 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 * *
‘누가 내 욕이라도 하는 건가?’
엘런은 갑자기 귀가 가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누가 자신을 욕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놈들은 내가 지금 이프루 밖으로 빠져나왔을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그들이 얼굴이 시뻘게져 자신을 찾으러 다니고 있을 거란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엘런은 자신이 깨어날 때까지 통금령이 풀리지 않았단 이야기를 듣고는, 조만간 한센이 저택을 찾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바몬과 함께 첫 번째 작전을 짠 것이었다.
그러나 엘런은 그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크루세이더의 수장인 한센이 어떤 돌발 행동을 벌일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단독으로 두 번째 작전을 짠 것이다.
‘5일 전 같았으면 내가 꼼짝없이 당했을 수도 있겠지만, 비약을 마신 나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단 말이지.’
사실 지하실의 문이 열리는 순간 조사대원들에게 불어닥친 바람 속에는 엘런이 섞여 있었다.
제피로스와의 교감이 깊어진 엘런은 이제 잠깐 동안 그와 동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자신에게서 새어 나갈 수도 있는 기운은 이시르를 통해 완벽히 막을 수 있었다.
원리는 자신이 성벽을 넘나들 때 사용했던 상대를 완전히 얼려 버리는 것과 동일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대상이 자신이었다는 것뿐이었다.
‘이시르와도 교감이 깊어졌을 거라고 했던 엘라임 님의 말이 맞았어.’
엘런의 생명 반응이 완전히 정지된 동안에도 이시르는 엘런이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움직여 주었다.
그것 역시도 깊은 교감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바몬 님께는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가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점은 바몬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그토록 애를 써 준 자인데 고작 편지 하나 남겨 놓고 온 것은 예의에 어긋났다.
그러나 엘런으로서도 길이 급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동부에 돌아가고 나서도 바몬 님께 연락을 취해야겠다.’
엘런은 주위로 흘러가는 풍경을 보며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것이오?”
그런 엘런의 태도를 보며 한 사내가 그를 보며 말했다.
“아, 미안하오. 내가 잠깐 딴생각을 했소. 무례를 용서하시오.”
엘런은 마차 반대편에 타고 있는 사내를 향해 사과했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사내는 케롤에서 이미 그와 마주친 적이 있는 이였다.
그 사내는 바로 토마르의 국왕 라뷔에의 수행기사인 판톤이었다.
엘런이 이프루 밖을 나온 직후에, 그곳에는 판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를 속이고 나왔다고 생각한 엘런이었기에 갑작스러운 판톤의 등장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알았냐는 질문에는 그저 라뷔에의 신성 마법 덕분이라고만 설명했다.
그러고는 엘런에게 올비아 산맥까지 마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시했다.
아직 그들이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는 했지만, 엘런의 입장에서도 일단은 이프루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게 우선이었다.
어차피 산맥 끝까지 마차를 얻어 타고 갈 생각도 아니었고, 판톤 하나 정도라면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엘런은 판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국왕 폐하께서 나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어쨌든 마차 안의 적막이 싫었던 엘런은 그와의 대화를 이어 갔다.
“알고 있었소?”
“일단은 산맥까지 간다고 해 놓고 마차에서 본격적으로 협상을 해 보겠다는 의도를 알고 있냐고 묻는 것이오?”
그 말에 판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예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뛰어난 분이었구려.”
그는 본론을 꺼낼 생각이었는지 표정이 더욱 진지해졌다.
“폐하께서는 교황청의 속국이 되어 있는 토마르 왕국을 독립시키고자 하고 있소. 그렇다고 에레네교를 믿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오. 실제로 폐하도 에레네교의 신자이기도 하오. 그분은 그저 왕국의 독립권을 원하고 있는 것이오.”
뒤 설명은 안 들어도 될 정도로 뻔한 이야기였다.
엘런이 지겹게도 보고 겪었던 권력 다툼의 서론과 다를 게 하나 없었다.
“그때도 말했다시피 난 이미 모시는 주군이 있소. 폐하께서 베푼 은혜에 대해 소정의 보답을 할 수 있겠으나, 독립 전쟁에 참여하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인 것 같소.”
분명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이기는 했으나, 어찌 되었든 신도증을 준 것이나 지금처럼 마차를 제공해 준 것은 엘런에게 도움을 준 일이었다.
그러니 그에 대한 보답을 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엘런은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까지도 굳이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폐하께서도 그런 것까지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오. 단지 그대에게 한 가지 전투에만 참가해 주기를 바라고 있소. 물론, 그대가 우려하는 국가 간의 전쟁은 아니오. 대상은 몬스터 무리이오.”
그 말에 엘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서부 대륙에서의 일이 훨씬 더 빨리 끝났다. 물론 마음이 급하기는 하지만, 은혜를 갚는 것 또한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의 생각은 점점 길어졌다.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윽고 그는 결정을 내렸다.
‘언제 하메론이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프로드 왕국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당장이라도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엘런이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대륙은 얼마 전부터 몬스터들의 대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소. 특히 우리 토마르 왕국은 그 피해가 매우 심각하오. 그것은 그대도 본 적이 있어서 잘 알 것이오.”
판톤이 엘런에 앞서 먼저 말을 한 것이다.
일단 엘런은 그의 말을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라카 지역에서 그 배후가 나타났소. 릭이라는 자가 몬스터 군단을 이끌고 와 협상을 벌이려고 했다고 들었소. 원래 그런 일에는 교단이 나서지만, 이번 기회에 폐하께서 직접 그것들을 토벌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 하오. 그대가 그 토벌에서 참가해 주었으면 좋겠소.”
판톤의 설명이 끝났지만 엘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이름이 판톤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방금 그자의 이름이 릭이라고 하였소?”
“그렇소. 보고를 받기로는 동부 대륙인의 생김새라고 들었는데, 혹시 알고 있는 인물이오?”
“알다마다.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소.”
엘런은 판톤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참가하리다, 그 토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