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76
176
토벌대 (1)
* * *
판톤의 입에서 나온 릭이라는 이름에 엘런의 태도는 확연히 변해 있었다.
그의 최종 목표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릭과 하메론을 잡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이 머나먼 서부 대륙까지 원정을 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 목표 중 하나가 제 발로 그를 찾아왔다.
‘일단 동부 대륙으로 가는 것은 잠시 보류한다.’
엘런은 곧바로 케롤로 방향을 틀었다.
친화력의 비약 덕택에 하메론과의 실력 차이를 한 발짝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에게 머리를 들이민 자는 하메론이 아니라 그의 부하 격인 릭이었다.
‘릭 정도는 혼자서 상대할 수 있겠지.’
이미 두 번이나 싸워 본 적이 있었고, 거기서 모두 승리를 가지고 왔다.
하메론이라면 몰라도 릭의 실력이야 엘런이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는 정도였다.
만약, 그가 하메론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면 그저 동태만 살피고 오면 될 일이었다.
반대로 혹시라도 그가 단독 행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자리에서 사로잡아 버릴 생각이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는 몰라도…….’
하메론은 이전부터 직접 드러나는 일 없이 누군가를 이용하기만 했다.
그러나 결코 가만히 있는 적은 없었다.
엘런이 성장을 위해 애쓰고 있는 지금 순간에도 하메론은 릭을 이용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도 하메론이 나를 피하고 있는 것이라면, 릭을 잡는 것은 그의 팔다리를 자르는 것과도 같다.’
그가 마음 놓고 세력을 키울 시간을 주는 것은 좋지 않았다.
여러 모로 릭을 잡아 두는 것이 속이 편했다.
“도착했소, 엘런 경.”
엘런은 마차를 타고 오는 내도록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앞으로 일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생각했다.
판톤도 그의 상태를 눈치챈 것인지, 오는 내내 별말을 하지 않고 엘런의 생각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케롤, 정확히는 왕성에 도착한 것이다.
“벌써 도착한 것이오?”
“말을 빨리 놀린 것도 있지만, 그대가 주변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더 컸다고 말해 주고 싶소.”
“본의 아니게 판톤 경을 지루하게 했군요.”
엘런이 판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고 있을 때, 누군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잘 갈무리하고 있긴 했지만, 그의 존재감은 발걸음만으로도 왕성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왕성에서 누구보다 높은 존재감을 내뿜을 수 있는 존재. 그는 바로 토마르 왕국의 국왕 라뷔에였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갑소. 판톤 경도 수고 많았소.”
그는 엘런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신 판톤 오그너, 폐하의 명을 수행하고 복귀했습니다.”
판톤은 깍듯한 자세로 라뷔에를 맞이했다.
“폐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작게나마 보답하고자 온 것입니다.”
엘런 역시 일국의 왕에게 예의를 갖추어 화답했다.
“고맙소, 정말. 일단 자리부터 옮기겠소? 자세한 건 거기서 말을 해 주도록 하겠소.”
그들은 곧바로 라뷔에의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늦은 밤이었지만, 아직 하인들이 꽤 돌아다니고 있었다.
라뷔에의 집무실에는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왕족치고는 그리 화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실속 있는 가구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이렇게 나와 토마르 왕국을 돕기로 결정해 줘서 진심으로 감사하오.”
“말씀드렸다시피, 은혜를 갚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엘런도 그저 보답만 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토마르 왕국에게 요구할 것이 있었다.
“아시다시피 현재 저는 에레네스로부터 쫓기고 있습니다. 그러다 첫 만남에서 폐하께서 하셨던 말씀이 번뜩 떠올랐습니다.”
라뷔에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입으로 직접 그들에게 쫓기게 되면 나를 찾아오라고 했었지 않았소. 다행히도 내가 그대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수 있을 것 같군.”
갑작스러운 릭의 등장으로 서부 대륙에 남게 되었으나, 엘런은 이왕이면 방해 요소 없이 그에 관한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중 에레네스의 추격은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토마르 왕실에서 직접 그대에 관한 모든 신분을 보장해 주겠소. 그대는 대외적으로 왕실 소속 근위기사가 되어 있을 것이오. 그리고 에레네스에는 그대가 동부로 건너갔다고 보고하겠소.”
크루세이더가 대부분인 이곳에서도 기사라는 직책은 있었다.
그러나 오러가 없는 서부에서 기사는 그저 명예직으로서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래도 에레네스로부터 가장 독립적인 직책이니 괜찮은 편이군.’
‘천리안’의 유효 거리로부터도 벗어났고, 얼굴까지 변형시킨 상황이니 이것으로 에레네스의 추적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몬스터 토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오.”
라뷔에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서부 대륙은 몬스터들로 골머리를 앓았소. 원래 잦은 습격이 있던 마을은 물론이고, 몬스터 걱정이라고는 하지 않고 살았던 마을도 약탈의 대상이 되었소. 조사에 들어간 우리는 누군가 몬스터들을 지휘하고 있다고 추측했소.”
서부 대륙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날이 갈수록 양이 많아지는 것도 있었지만, 조직화되고 있기도 했다.
그들은 누군가의 지휘를 받는 것처럼 체계적이면서도 전략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처음에는 오크나 고블린 수준의 기초적인 전략을 사용하더니, 인제는 인간의 군과 비슷할 정도로 고도화된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교황청은 우리의 보고를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추측은 맞았던 것이었소. 며칠 전, 아라카 지방에 그 배후가 모습을 드러냈소.”
“그자가 릭이라는 인물이군요.”
엘런의 말에 라뷔에가 맞장구를 쳤다.
“이미 판톤 경에게 설명을 들었나 보오. 맞소, 그는 수천의 몬스터 군단을 이끌고 와서는 나에게 자신과 협상을 하자고 요구해 왔소.”
‘들으면 들을수록 케니프라 때와 비슷한데. 릭이 흑사회가 사용하던 마법을 배우기라도 했다는 건가?’
몬스터들을 군대처럼 조직하고 지휘하는 것은 분명 흑사회가 사용하던 마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흑사회의 배후에도 하메론이 있기는 했었다.
그라면 릭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몬스터 지휘권을 맡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런이 궁금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요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메론이 릭을 시켜 구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의문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키에아스의 5대 성유물 중 하나인 키에아스의 망토였소.”
키에아스는 에레네교의 성서(聖書)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성인(聖人)이었다.
그는 최초의 계시를 받은 자로 에레네의 축복을 받은 그의 다섯 가지 물건은 훗날 성유물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2대 교황이 토마르 왕국을 포함한 주변 왕국의 초대왕들에게 성유물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그럼으로써 그 성유물은 왕의 징표이자, 에레네교를 받들고 있는 왕국이라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거기에 대체 어떤 능력이 있기에 저들이 그걸 원하는 것입니까?”
“성유물이기에 우리도 그저 성스럽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지, 그 안에 어떤 기적이 숨어 있는지 알 수는 없소.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키에아스의 망토는 우리 왕국의 정신이기에 절대로 그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것이오.”
라뷔에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기라도 하듯 그의 주먹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교황청에서도 그들이 성유물을 노린다는 것을 알고 급히 지원을 보내겠다고 전해 왔소. 그러나 그자가 제시한 시간 내에 지원이 올지는 미지수이오. 그러니 무작정 그들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소. 우리에게는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군이 있소.”
“그래서 이번 기회를 노리시겠다는 것이군요.”
엘런의 말에 라뷔에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나는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땅과 상징을 지킴으로써 백성들이 토마르 왕국의 국민임을 자각하게 하고자 하오. 여기에 바로 그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오.”
엘런은 그가 자신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토벌대 가장 선봉에 서서 압도적인 무력 쇼를 보여 달라는 거군.’
그가 사용하는 마법만큼 동료들의 사기를 극적으로 북돋울 수 있었다.
게다가 이미 라뷔에는 엘런이 에블린 마을에서 활약한 것을 들었으니 그 효과를 확실히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폐하의 뜻에 따라 이번 토벌에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소.”
힘들 것으로 예상했던 협상이 생각 외로 잘 흘러가자 라뷔에의 표정은 만족스러워졌다.
엘런으로서도 릭을 포획할 기회를 잡은 것이기에 나쁘지 않은 거래라 생각했다.
“이런, 긴 여행을 마치고 온 그대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아직 군이 모이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았으니 그동안이라도 푹 쉬도록 하시오. 내 그대가 머물 만한 방을 준비하도록 하겠소.”
“그럼, 출정식 날 뵙도록 하겠습니다.”
엘런도 생각을 정리할 것이 많았기에 라뷔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뚜벅뚜벅.
라뷔에의 집무실을 나온 엘런은 하인의 안내를 받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늦었는지 왕실의 복도는 고요하기만 했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 내가 움직이고 있는 동안 하메론 쪽도 꿍꿍이를 가지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많은 생각 중 엘런은 딱 한 가지만 붙잡았다.
‘키에아스의 성유물을 모아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네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그 순간, 병실에 누워있던 브레디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다시는 너희들이 함부로 설치지 못하게 해 주지.’
* * *
“모든 군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판톤 님께서 연병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왕성 곳곳에서 하인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녔고, 일부는 엘런을 직접 찾아다녔다.
“준비는 모두 마쳤네. 내가 직접 판톤 경에게 가도록 하지.”
엘런이 예상했던 것보다 군 조직은 훨씬 빨리 이루어졌다.
근 20년간 전쟁 한 번 해 보지 않은 국가치고는 매우 빠른 속도였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출정식만 남겨 놓은 상황이었다.
“아, 오셨소?”
판톤은 화려한 갑옷을 입은 채로 엘런을 반겼다.
“곧 폐하께서 나오실 것이오.”
판톤의 시선이 우뚝 솟아 있는 단상으로 향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거기서 라뷔에가 걸어 올라왔다. 그러고는 음성 증폭구도 없이 연설을 시작했다.
“따로 그대들에게 해 줄 말은 없다. 우리는 당연한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이 우리의 땅과 우리의 상징을 노리고 있다. 그것을 누가 막아야 하겠는가?”
증폭을 시키지 않은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맨 뒤에 있는 병사에게는 잘 들릴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병사들 사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교황청의 지원이 아니라 바로 토마르의 국민인 우리의 칼과 피로 막아야 할 것이다.”
뒤이어서 나온 것은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였다.
엘런은 지금까지 많은 연설을 봤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절정 부분에서 이토록 차분한 자는 없었다.
이 부분이 바로 군대의 사기를 극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곳이 아니던가.
그러나 라뷔에는 평어를 말하듯 차분했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는 확실히 전달되었다.
라뷔에의 말은 가랑비처럼 고요하게 다가와 모두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병사들은 그 가랑비에 흠뻑 젖은 채, 자신들의 각오를 다짐했다.
“그럼 출정!”
총지휘관은 판톤이었다.
라뷔에로부터 검을 넘겨받은 그는 군사들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다.
왕의 지휘만큼이나 고요한 출정이었다.
그러나 그 발걸음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