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78
178
토벌대 (3)
엘런과 판톤은 긴 복도를 지나 자신들의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엘런은 조금 전 있었던 신관과 크루세이더들의 태도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라카 성 앞에는 메카라는 작은 평원이 있소. 성서(聖書)에서 말하길, 그곳은 에레네께서 천상으로 돌아가신 곳이오. 사도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천상으로 떠난 그분의 뜻을 존중해 그곳은 이프루처럼 상징화시키지 않았소.”
엘런은 성서의 마지막 장인 계시의 장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거기에는 에레네가 다시 강림할 것을 암시하며 천상으로 올라가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릭이라는 자가 의도하고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 몬스터들이 점령하고 있는 곳이 바로 그 메카요. 에레네스 입장에서는 절대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을 것이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메카를 되찾으려 할 것이오.”
엘런은 도란을 비롯한 그들이 자신에게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단지 이유만 알았다는 것뿐이지, 그들의 생각까지도 이해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성유물을 내놓으라는 릭의 협상에도 응할 생각이 없는 것 아니오? 그렇다면 협상 기한이 다 되면 알아서 성으로 쳐들어올 것인데, 굳이 수성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버리고 달려들려고 하다니.”
판톤도 엘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은 그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에레네스에서 그 당연한 사실을 이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장에 토마르군의 총지휘관인 자신도 메카 탈환과 수성전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수성전을 하지 않을 것이오.”
“융통성 없는 것들, 고작 종교의 자존심 때문에 죽어 가는 병사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이오?”
결국 엘런은 참았던 화를 터뜨렸다.
“교리를 위해 몬스터들에게 개죽음을 당하는 병사들은 무슨 죄란 말이오? 그들이 무슨 권리가 있어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이오? 그것도 자신의 나라 병사도 아닌 타국의 병사를…….”
엘런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토벌에 참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 된 도리로서 병사의 희생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신의 사도라는 저들은 오로지 신과 교리에 대한 생각만 가득했다.
정작 인간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큼 무감각했다.
그들에게 인간은 교리를 위한 수단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베리 경의 마음은 잘 이해하오. 나도 토마르군의 총지휘관으로서 저들의 결정을 받아들이기 어렵소. 그러나 나 자신도 아직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결정하기가 어렵소. 우리는 그저 메카의 전투에 참여하여 그곳에서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는 수밖에.”
엘런은 판톤의 답답한 태도에도 화가 났다.
국왕의 편에 서서 에레네스와 대립하고 있는 그조차도 종교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젠장, 알아서들 하시오.”
엘런은 전생부터 포함하여 말단 병사로서 많은 개죽음의 현장에서 나뒹굴었다.
지휘관들은 그 마음을 모를 수 있어도, 엘런은 누구보다 그곳에 몰아넣어진 자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판톤을 지나쳐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가 버렸다.
“후우.”
홀로 복도에 남은 판톤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도란이 메카를 치자고 했을 때, 속으로 그것은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외쳤다.
그러나 그 말이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엘런이 나서 주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그대로 도란에게 전해 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타 대륙에서 온 엘런이 자신보다 더 토마르의 총지휘관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종교와 국가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답답함을 내뱉는 한숨밖에 없었다.
* * *
토마르군이 아라카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흘렀다.
제딴에는 서둘러 온 토마르군은 그동안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동에는 오랜 시간이 들었지만, 병력을 소집하는 시간이 많이 들지 않았기에 릭이 제시한 협상 기한까지도 넉넉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3일 안에 메카를 공격하겠다고 장담했던 도란은 전투 준비에 차질이 생겼는지 아직 출정을 명하지 않고 있었다.
엘런은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케롤에서부터 무리해서 최대한 서둘러 온 병사들이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도 나름대로 전투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놈이 말한 준비라는 게 끝났나 보군.’
그리고 몇 시간 전, 도란은 아라카에 있는 전 병력에게 소집 명령을 내렸다.
그들이 말하는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걸렸어도 수성전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릭이 말한 기일까지 4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의 준비가 조금만 늦어졌더라도, 성벽으로 달려드는 몬스터를 상대로 훨씬 유리하게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에레네스 신관들의 준비가 그전에 끝나 버렸다.
‘지금까지 벼르고 벼렸으니 연기할 일은 절대 없겠지.’
준비가 시작된 지 3일째가 되고서부터 부쩍 도란의 성질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매일 아침 성벽에 올라가 멀리서 보이는 메카 평원을 보며 이를 갈았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혼자서라도 메카로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제 전투 준비가 끝났다.
토마르 병사들은 꼼짝없이 몬스터 무리로 돌격하는 수밖에 없게 돼 버렸다.
엘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성벽 위에 있던 도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레네의 형제들이여, 나는 날마다 이곳에 서서 메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슬프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에레네가 재림을 약속하시며 천상으로 올라가셨던 그 신성한 평원이 지금 마물들로 인해 더럽혀지고 있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지금 그가 얼마나 흥분한 상태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대들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는가? 에레네께서 이 모습을 보면 하늘에서 얼마나 슬퍼하시겠는가. 중간계에서의 마지막을 보낸 장소가 그토록 더럽혀지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한없이 실망하실 것이다.”
병사들 사이에서도 웅성거리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에레네에게 사죄의 기도를 올리는 자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위한 성전을 치를 것이다. 당장 저 마물들을 몰아내고 메카를 되찾도록 하라.”
무릎을 꿇고 사죄의 기도를 올리는 자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아졌다.
엘런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종교적 신념을 떠나 자살행위 직전의 모습을 보고 있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은 성전이다. 성전에서의 죽음은 그대들의 앞길에 축복이 될 것이다. 에레네께서 그대들의 죽음 하나하나를 살필 것이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종교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개죽음과 다를 바가 없는 전투에서조차 사기를 최대치로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병사들에게 죽음마저 초월한 사기를 주는 것은 모든 전쟁 연설가의 목표와도 같은 것이다.
그들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것을 종교는 에레네라는 이름 하나로 해결할 수 있었다.
“성문을 열어라!”
쿠구구구구구.
그가 황금빛 봉을 높게 치켜들자 거대한 성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굳건한 아라카의 성문이 스스로 열리는 순간이었다.
휘이잉.
열린 성문의 틈으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는 몬스터들의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메카의 땅이 그들로 인해 짓밟히고 있는 냄새였다.
으득.
누군가 이를 갈았다.
그들 사이에서는 투지가 불타올랐다.
그들이 산속에서 이런 냄새를 맡았더라면 당장 왔던 길을 되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만큼은 그 냄새가 두려움이 아닌 분노를 일으켰다.
“돌격하라.”
하늘을 찌를 것 같던 도란의 봉이 이제 메카를 향했다.
척척척척척.
병사들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에레네스 신관의 명에 따라 토마르군이 움직이고 있었다.
“크르르.”
“취릭, 취이익.”
메카로 향할수록 몬스터들의 냄새와 더불어 그것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그것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들의 구성은 정말 다양했다. 아마도 서부 대륙에서 볼 수 있는 몬스터들을 모두 모아 놓은 것같았 다.
‘종류도 종류지만…….’
종류도 종류였지만, 그것들의 압도적인 숫자가 더 위협적이었다.
아무리 메카가 작은 평원이라고는 하지만, 몬스터의 숫자는 그곳의 반은 채울 정도로 많았다.
몬스터와 토마르군의 대략적인 숫자에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이런 데서 전투를 벌이라니. 차라리 자살을 하라고 하지.’
그러나 엘런의 불만과 상관없이 대열은 전진했고, 인간들의 진군을 예상하지 못한 몬스터들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궁수 1조, 조준.”
“발사.”
피유우웅.
쏴아아아.
토마르군 진영에서 쏜 화살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파바바바밧.
“끄르륵.”
“키에에에엑!”
하나의 거대한 포물선을 그린 화살의 물결은 이윽고 몬스터들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화살 한두 개로는 꼼짝도 안 할 몬스터들의 두꺼운 가죽도 수십 발의 화살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여기저기서 몬스터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궁수 2조, 조준.”
1조가 활을 쏘는 사이에 화살을 먹인 2조가 곧바로 몬스터 무리를 조준했다.
아라카로 오는 길에 한 전투도 경험이라고 그들은 이전보다 훨씬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물론 지난 일주일 동안 이 전술만 연습한 덕도 있었다.
“발사.”
피유우우웅.
활시위가 경쾌하게 튕겼고 활을 떠난 화살은 또 한 번 거대한 포물선을 만들어 냈다.
아직 첫 번째 화살비가 다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두 번째 화살비가 쏟아졌다.
“끼에엑! 인간, 가만두지 않는다.”
“찢어, 취익. 죽인다, 취이익!”
그러나 몬스터들도 이제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눈이 시뻘게진 상태로 몽둥이를 집어 들고는 토마르군에게 달려들었다.
“궁수들 쉬지 말고 화살을 쏴!”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궁수들이 화살을 쏘아 댔다.
그러나 단 두 번 만에 그들이 가진 경험의 밑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궁수들에게서 처음의 그 유기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황한 나머지 조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활을 쏘았다.
워낙 달려드는 몬스터의 숫자가 많은 탓에 눈먼 화살에 맞아 죽는 녀석들도 많았다.
쿠웅.
“우어어어어!”
“끼아악.”
그러나 그것들은 쓰러지는 동료들의 시체를 짓밟아 가며 토마르군에게 달려들었다.
덕분에 두 진영은 급속도로 가까워져 갔다.
“꾸어억.”
마침내 토마르군 최전선에 도착한 오크가 도끼를 휘둘렀다.
그에 맞춰 방패병들이 일렬로 방패를 세웠다.
방패열의 모양은 그럴 듯했지만, 아직 방패술이 제대로 연습 되지 않았던 그들이었기에 방어가 완벽하지는 않았다.
“으아악.”
“팔이 부러졌어.”
“다리, 내 다리!”
특별할 것 없는 오크의 도끼질 한 번에 병사 세 명이 중상을 입은 것이다.
이윽고 도착한 몬스터들의 공격에도 비슷한 결과가 일어났다.
평소 몬스터 같았으면 틈이라고는 고려하지도 않고, 그저 눈앞에 있는 인간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딘가 달랐다.
여기저기 생기기 시작한 방패열의 균열로 몬스터들이 몰려들었고, 그 균열은 순식간에 거대하게 변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엘런은 이전부터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케니프라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몬스터를 본 적이 있었다.
거기에 비해 경험이 풍부하지도 않은 병사들이 방패벽을 잘 유지할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의욕이나 사기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만으로 전투에 승리할 수는 없었다.
엘런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몬스터들은 자신들을 화나게 한 인간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하고 있었다.
“어, 어떡해…….”
“무서워.”
“사, 사, 살려 줘.”
끔찍한 현실 앞에서 병사들의 이성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종교의 힘으로 애써 덮고 있던 두려움이 다시금 스멀스멀 몸을 일으켰다.
“컥.”
“크헉.”
그러나 몬스터들이 그들의 두려움을 고려해 주는 일 따위는 없었다.
아이의 몸통만 한 팔뚝을 가진 오크들이 휘두른 도끼에 인간들의 몸은 그대로 두 동강 났다.
이제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는 병사까지 발생했다.
이대로 간다면 끔찍한 학살밖에 남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미친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잖아.”
엘런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병사를 더 살리기 위해 싸웠다.
그는 지금까지 괜한 오해를 피하려고 정령으로만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주력인 마법을 봉인하고 싸우니 영 속도가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엘런은 하는 수 없이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오해는 병사들을 살린 후에 해결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성전에서의 죽음은 영광으로서 그대들에게 찾아올 것이다.”
그때, 아비규환의 현장을 가로지르는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
콰앙!
곧이어 무엇인가 거대한 물건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땅에 박히는 소리였다.
“그대들에게 에레네의 성전에 피를 흘릴 수 있는 축복을 주도록 하겠다.”
그것은 도란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토마르군 진영의 최후방에서 하얀 빛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