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81
181
최후의 전사들 (3)
판톤이 이끄는 기병대는 후방에서 토마르군을 공격하던 몬스터들의 진영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동부 대륙의 기사들처럼 타이밍을 맞춰 검이나 창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하는 것이라고는 그저 긴 렌스를 꽉 붙잡고 판톤을 따라 말을 달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효과만큼은 어마어마했다.
체구가 작은 고블린이나 심지어 오크 정도 되는 몬스터들은 돌로 둘린 말에 밟혀 죽기 십상이었다.
슈우웅.
퍼걱.
“쿠어어어.”
쿠웅.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트롤의 머리통을 박살내 버렸다.
거대한 트롤의 몸뚱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난 트롤이라도 일격에 머리가 산산이 조각나면 다시 살아날 수 없었다.
뒤이어 날아온 몇 개의 얼음 덩어리들이 다른 트롤의 머리도 똑같이 만들었다.
그 얼음 덩어리를 날린 장본인은 바로 엘런이었다.
그는 기병대가 짓밟아 버리기 힘든 대형 몬스터들을 요격해 주고 있었다.
덕분에 판톤의 기병대는 손쉽게 몬스터 사이를 누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효과적이군.’
사실 엘런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전투 경험도 없는 그들이었기에 말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낼 수 있는 전략을 짠 것이었다.
그러나 마치 바닥에 쏟아진 우유를 천으로 닦는 것처럼 기병대는 몬스터들의 진영을 지워 나갔다.
그 덕분에 밀집된 몬스터들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던 병사들도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방패 하나를 짓누르던 4마리의 몬스터가 1마리가 되자 방패병들은 반격을 가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것이 저자가 말한 전술이라는 것인가.’
도란은 여전히 대형 몬스터를 요격하고 있는 엘런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막막하던 상황이 이자와 이자가 준비한 기병대로 인해 해결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엘런의 무위에 취한 그는 엘런이 지금 마법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먹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의 반응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엘런이 보여주는 활약은 그만큼 놀라웠기 때문이다.
‘살아 돌아갈 수 없다는 좌절에 빠졌던 병사들의 눈에도 희망이 서렸다.’
지금껏 신관들이 축복을 걸고 있었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병사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것마저도 엘런이 해결해버린 것이다.
‘그에 비해 내가 한 것은…….’
도란은 엘런의 등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제야 몬스터들의 시체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아직도 인간의 시체가 훨씬 많았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그 누구도 편히 죽은 이가 없는 것 같았다.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처참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한 이들 중에는 신관이나 크루세이더들도 많이 있었다.
후방에 에레네스의 신관들이 모여 있었기에 유독 피해가 도드라져 보였다.
“아아…….”
도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음속에 가득 찼던 죄책감이 용량을 초과해 입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촤아아악.
슈우웅.
그가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엘런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대형 몬스터의 수가 많았는지 한 번에 열 개의 얼음 덩어리를 만들어 냈다.
그러고는 제피로스의 힘을 사용해 정확히 그들의 머리통을 향해 날렸다.
엘런은 한 번에 많은 마법을 사용하느라 힘들어서인지 이마를 타고 줄줄 흐르고 있는 땀을 닦았다.
‘에레네를 위한 성전에서 죽는 것은 그 자체로도 성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도란은 이제 자신의 종교적 신념마저도 흔들리고 있었다.
에레네를 위한 성전에 패배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후퇴나 포기라는 것은 절대로 안 될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밀어붙였던 지금까지의 성전에서 그는 패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기에 자신 있게 나아갔다. 에레네가 자신을 돕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거기에 따르는 희생은 신성한 희생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의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아니, 패배가 될 뻔했다.
엘런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종교적 믿음이라고는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만들어 내는 결과는 성전의 이름으로도 승리하지 못한 전투의 전황을 뒤집는 것이었다.
‘성전에 실패했다고 이대로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에레네가 계시다고 무조건 승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을 위한 승리는 우리가 직접 획득한 승리를 그분께 바치는 것이다.’
엘런이 들었다면 아직도 에레네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냐며 답답함에 소리를 질렀을 수도 있는 다짐이었다.
그래도 그 다짐으로 인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엘런을 만족스럽게 했다.
“베리 공이라고 했소?”
“그렇소.”
그의 질문에 엘런은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대와 기병들만으로 이곳 후방의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겠소?”
그 질문에 엘런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하는군. 그렇소. 후방만이라면 가능하오.”
“그렇다면 나와 형제들이 진영의 전방을 맡겠소.”
“무슨 이유로 생각을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선택이오. 그러도록 하시오.”
도란은 출정 때 들고 있던 영역의 봉이 아닌 은빛의 다른 봉을 꺼냈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다들 들리는가?”
그의 말은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이느라 곳곳에 흩어져 있던 모든 신관과 크루세이더의 머릿속에 직접 전달되었다.
그것은 자신을 에레네스의 정보원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려준 신성 마법 ‘계시’였다.
그는 계시 마법을 통해 에레네스의 신관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었다.
비록 그들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는 없더라도, 그들이 할 일만 지시하면 되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현 시간부로 후방은 토마르 군의 지휘관에게 맡긴다. 우리는 전방의 전황을 바꾸러 간다. 멘티스를 중심으로 모여 진영의 전방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라.”
“예!”
도란의 계시에 신관과 크루세이더들은 곧바로 반응했다.
그들은 성유물을 탈환하는 것을 포기하고 한곳에 모였다.
후웅. 후웅.
거대한 덩치의 크루세이더 멘티스가 철퇴를 휘두르며 길을 뚫었다.
신성 마법 ‘신의 철퇴’가 걸린 그의 철퇴에 길을 가로막던 몬스터들은 형태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그 뒤를 도란을 포함한 다른 신관들이 따랐다.
그들은 옆으로 벌려진 몬스터들을 견제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멘티스의 몸이 몬스터의 녹색 피로 범벅이 되었을 때쯤, 그들은 진영의 최전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최후방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나은 상황은 아니었다.
더욱이 엘런 덕분에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후방과는 달리, 이곳은 여전히 지옥도가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모든 크루세이더와 신관은 2인 1조가 되어 분산한다. 각각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병사를 지키고, 그들이 무너지지 않고 진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그들은 도란의 명령에 잠깐의 의문을 가졌다.
그들이 알기로 도란은 절대 그런 명령을 내릴 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생각도 금방 사라져 버렸다.
명령을 내린 도란이 가장 먼저 움직였기 때문이다.
크루세이더와 신관의 지원은 몬스터에 고전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은 후방의 기마병들과 마찬가지로 병사 한 사람당 상대해야 하는 몬스터의 숫자를 줄여 주었다.
엘런이 맡은 후방과 도란을 필두로 한 에레네스의 신관들이 맡은 전방. 양측에서 모두 전황을 바꾸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노력에 답하기로 하듯, 병사들도 안정을 찾고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많은 수의 병사가 죽어 나갔지만, 그들은 그것에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전투에 승리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이대로라면 승리를 가져갈 수도 있다. 모든 개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최선을 다했어.’
공중에 떠오른 엘런은 전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도란을 보며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결과를 차선 정도로는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설레발은 필패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엘런은 아주 조금의 여유를 누린 순간, 최전방에서 이상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 이상 기운은 엘런의 털이 삐죽 솟을 정도로 위협적인 것이었다.
‘무엇인가 오고 있다.’
도란도 그 기운을 느낀 것은 마찬가지였다.
쉬이익.
몬스터 무리 뒤에서 공간이 수축하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그곳에는 검은색의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이런. 협상 진행 상황을 보러 왔더니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그 구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 사내는 도란에게는 낯선 자였지만, 엘런에게는 보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릴 만큼 익숙한 인물이었다.
“릭 체들턴.”
그는 엘런이 토벌대에 참가한 목적이자 하메론에게 갈 수 있는 열쇠가 되는 릭 체들턴이었다.
“기껏 기회를 주었더니 이딴 식으로 대응한단 말이야? 이런 개돼지만도 못한 놈들.”
릭의 눈은 하찮은 미물을 바라볼 때의 눈빛이었다.
그것은 과거, 그가 엘런을 볼 때면 자주 하던 눈빛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 향하고 있는 곳은 엘런이 아니라 도란 쪽이었다.
그는 아직 엘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놈이 키에아스의 성유물을 달라는 불경한 소리를 한 릭이라는 자군.”
도란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기필코 신성 모독을 저지른 이자를 심판하겠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 입으로 함부로 네놈의 입술에 담지 마라.”
릭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내가 이래 봬도 귀족 출신이라 네놈들에게 평화롭게 대화로 해결할 기회를 줬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군.”
그렇게 말한 릭의 몸에서 강력한 마나가 흘러나왔다.
마법을 사용하기 전 흔히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마법사의 푸른 마나가 아니었다. 그가 뿜어내고 있는 마나는 혈마법사의 그것과 같은 붉은색이었다.
“모든 차원에 존재하는 마나여,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거대한 다리가 되어 지금 이곳에 존재하라. 포털.”
그의 입에서 긴 주문이 영창되었고 그와 함께 붉은색의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땅에 그려진 마법진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이내 릭이 등장했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구멍이 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가 등장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구멍이었다는 것이다.
휘이잉.
그 구멍을 통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서는 토마르군이 메카로 진군할 때 맡았던 몬스터의 비린내가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크아아아아아.”
“취이이익.”
“끼익. 키이이.”
뒤이어서 쇠를 긁는 것 같은 괴성이 들려오더니 이내 구멍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결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몬스터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다.
‘저건 9서클의 마법 포털?’
다른 이들에게는 마법 자체가 생소하다 보니 모를 수도 있었으나, 엘런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법 자체는 포털과 조금은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9서클 마법 포털을 개량한 형태의 마법이었다.
그렇다고 현 인류 유일의 9서클 마법사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릭에게서는 9개의 서클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하메론에게서 이상한 기술을 배워 왔나 보군. 게다가 혈마법까지 곁들어졌으니…… 잠깐.’
엘런은 더 이상의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쏟아져 나오는 거야?’
폭포처럼 쏟아지던 몬스터가 끝이 나지 않고 있었다.
이미 메카를 차지하고 있던 몬스터의 3배에 달하는 몬스터가 포털을 타고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들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건 나도 상대하기 어렵겠는데…….’
아무리 엘런이 강한 힘을 지녔다고 해도 저 정도의 몬스터를 단신으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신관들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확신이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엘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하지만 지금의 엘런은 몬스터를 처리할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어떻게 여기서 도망쳐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엘런 자신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저것들이 전방에만 있지만, 저 정도 숫자의 몬스터가 한 번에 달려들면 자신들은 순식간에 포위당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엘런이라도 위험해지게 된다.
“판톤 경!”
결국, 엘런은 기마병대를 이끌고 있던 판톤에게 내려갔다.
“무슨 일이오? 저기 나타난 몬스터들은 또 무엇이란 말이오.”
판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것까지 설명할 시간은 없소. 지금 당장 아라카 성으로 달려가 주민들을 대피시키시오. 조금이라도 늦으면 끝장이오. 그리고 이걸 받아 가시오.”
왜 그런지 이유를 물으려고 했던 판톤은 엘런의 표정을 보고는 말을 집어삼켰다.
“알겠소.”
그 대신, 그의 말과 그가 준 물건을 받아 들었다.
지휘의 고하나 그가 이방인이냐는 것보다는 그가 보여준 무위와 전략 그리고 그의 진심만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쪽에서 보이는 몬스터들의 행렬은 엘런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추측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경은 어쩌시려고 하오? 말이라도 있어야 도망칠 수 있지 않겠소?”
판톤은 엘런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그라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판톤은 그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안위에 무슨 일이 생기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말이오? 나는…….”
엘런은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다.
“나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병사를 대피시키겠소. 공은 얼른 가서 주민들을 구하시오. 피난이 시작되면 내가 준 것을 사용하시오.”
그렇게 말한 엘런은 몬스터가 쏟아지고 있는 전방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