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82
182
최후의 전사들 (4)
* * *
도란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몬스터 무리에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서서 그것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에레네이시여, 정녕 메카를 버리신다는 말씀입니까?”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변에 있던 신관들도 도란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로서도 도저히 밀려드는 저 몬스터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몬스터보다도 더 지독한 절망감이라는 것이 그들을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에레네스의 신관 전원!”
그럼에도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도란이었다.
그의 외침은 신관들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워낙 커서 머리를 부여잡는 신관까지도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외침 덕분에 신관들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에레네의 신도들을 최우선으로 보호한다. 그들을 아라카 성으로 후퇴시킨다. 우리가 최후까지 남아 그들의 뒤를 지킨다.”
신관들은 지금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계시가 정녕 도란이 보낸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는 지금 에레네교의 성지(聖地)를 버리고 후퇴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무패의 용사 도란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무엇보다 시작의 땅 에레네 동산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성지인 끝의 땅 메카 평원.
그가 이곳을 버릴 것이라고 말할 줄은 몰랐다.
“모든 병사는 후퇴하라!”
그러나 뒤이어 도란의 육성이 들리자 그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 전투를 겪으며 도란은 변화했다.
뿌우우.
병사들의 퇴각을 알리는 뿔피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병사들은 드디어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맞춰 아라카 성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몬스터는 그들의 뒤를 쫓으려 했다.
“로페즈, ‘통곡의 벽’을 사용한다.”
그 사이를 도란을 포함한 신관과 크루세이더들이 막았다.
“예.”
쿠웅.
신관과 크루세이더들이 일렬로 서더니 각자 자신의 무기를 발 앞에 꽂았다.
그리고 도란의 은빛 봉까지 바닥에 꽂히자, 로페즈는 주문을 외웠다.
그가 주문을 마치자 무기들에서 백색의 빛이 뻗어져 나왔다.
그 빛들은 서로 연결되더니 이윽고 커다란 빛의 장막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적인 장막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몬스터 무리는 빛의 장막을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통과하려 했다.
치이익.
그것들이 벽을 통과하는 순간, 빛의 장막의 효과가 드러났다. 그곳을 통과하는 몬스터들의 몸이 타들어 간 것이다.
‘이 통곡의 벽이라면,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통곡의 벽은 신관과 크루세이더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큰 효과를 발휘하는 마법이었다.
이 정도의 수라면 적어도 병사들이 퇴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치이이익.
“쿠어어어.”
“키에엑.”
그러나 잠시 후, 도란은 그 생각이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몬스터들은 자신의 몸이 타들어 가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벽을 뚫으려 하고 있었다.
겨우 벽을 통과한 몬스터들은 온몸이 타들어 간 채로 목숨이 끊겼다.
그러나 개중에는 살아 있는 녀석들도 몇몇 있었다.
문제는 통과를 시도하는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살아남은 일부만 해도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저들을 지킬 자가 아무도 없다.’
통곡의 벽의 가장 큰 단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벽을 펼치고 있는 자들은 그곳에서 한 발도 벗어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살아남은 몬스터들이 병사들의 뒤를 쫓는 것을 막아 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피유우우웅.
도란이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또다시 그의 구원자가 등장했다.
하늘에서 수백 갈래로 퍼져 나가는 빛의 줄기는 바로 엘런이 사용하던 기술이었다.
‘와 주었구나.’
도란은 엘런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속으로나마 품고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희박한 가능성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그 희망이 현실이 되었다.
처억.
공중에 있던 엘런이 도란의 앞에 착지했다.
조금 전, 영역의 봉을 지키고 있던 도란에게 나타날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모습은 똑같았을지언정 그들이 교류하는 감정은 전혀 달랐다.
“고맙소, 베리 공. 덕분에 저들을 지킬 수 있었소.”
도란은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대가 퇴각 명령을 내린 것이오?”
엘런은 이곳으로 날아오면서도 이 점이 의문이었다.
그는 도란의 성격상 절대로 메카를 버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서둘러 움직였다.
강제로라도 병사들을 퇴각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병사들은 후퇴 명령을 받고 아라카 성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소. 그대 덕분에 이번에 내가 배운 게 많소.”
치이익.
그러나 그들에게는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몬스터들이 계속해서 벽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장막 뒤는 아직도 몬스터들이 새까맣게 뒤덮여 있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소?”
“저들이 퇴각을 마칠 때까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소. 언제 통곡의 벽이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장막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마법을 유지하고 있는 신관들의 안색도 나빠져만 갔다.
이대로 얼마나 더 장막을 유지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 보겠소.”
“그대 혼자서 어떻게 한단 말이오?”
의문점을 던지는 도란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엘런의 표정에서 신뢰를 느꼈다.
엘런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그의 마음속에서 싹텄다.
‘아이스 월.’
대규모 스톤 바디를 사용하느라 마나가 넉넉하지 않은 엘런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마나를 아낄 여유는 없었다.
그는 최소한의 마나만을 남겨 놓고 모든 마나를 사용했다.
콰카카카카.
엘런의 손에서 시작된 마나의 흐름이 땅으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평원을 가로지를 정도로 긴 얼음 장벽이 솟아올랐다.
‘이시르.’
그의 부름에 이시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따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시르는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스르륵.
이시르의 본신이 아이스 월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아이스 월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냉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것은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당장 얼어붙을 것만 같은 냉기였다.
마법에 정령의 본신을 녹이는 것, 그것은 엘런이 정령계를 갔다 오면서 배운 능력이었다.
이전에도 마법을 사용할 때, 정령들의 도움을 받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아예 마법 자체에 녹여낸 적은 없었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3서클에 불과한 아이스월은 7서클의 마법사도 해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었다.
‘겨우 혼자서 수십의 신관들이 함께 사용한 통곡의 벽보다도 더 강한 벽을 소환해 내다니. 저것이 마법사란 말인가.’
도란은 그가 행한 기적 같은 일에 입이 떡 벌어져서는 닫힐 줄을 몰랐다.
그가 아는 한 저런 권능은 신이 아니고서야 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제피로스.’
엘런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제피로스를 이용해 얼음벽 너머에 여러 개의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 덕에 몬스터들의 대열이 흩어졌다.
“후우.”
엘런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그러고는 리버가 챙겨 준 몇 가지 약 중에서 하늘색의 약을 꺼내서 마셨다.
꼴깍꼴깍.
순식간에 많은 마나를 사용하다 보니 자칫 마나 탈진 상태에 걸릴 뻔했다.
리버가 준 마나 보충제가 없었더라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라카까지 퇴각해 수성전을 한다고 해도 이 정도 숫자의 몬스터들을 막아 낼 수 없을 것이오. 최소한 성문을 걸어 잠그고 반대쪽 문으로 나가야 그때부터 안심할 수 있소. 성에 있는 주민들도 지금쯤 대피를 시작했을 것이오.”
도란도 엘런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성에 있는 주민들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다는 말인가.’
수많은 실전을 통해 예리해질 대로 예리해진 엘런의 판단력이었다. 도란은 그런 그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버텨야 하겠소?”
이제는 도란이 완전히 엘런에게 의견을 구하는 자세가 되었다.
“최소 2시간, 넉넉 잡아 3시간은 해야겠소. 그대들이 함께 도와주겠소?”
“물론이오. 벽에 생기는 균열들은 우리가 메우도록 하겠소.”
“고맙소.”
그때부터 엘런과 에레네스 신관들의 버티기가 시작되었다.
* * *
“저건 마법인가?”
몬스터 무리 속에 서 있던 릭은 갑작스럽게 생긴 얼음벽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오로지 몬스터들의 괴성뿐이었다.
“서부 대륙에서 마법이라니……. 설마?”
그의 머릿속에 퍼뜩 엘런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는 그의 얼굴이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놈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확인을 해 봐야겠다.”
그러나 그는 마법을 사용해 직접 확인을 할 수 없었다.
포탈을 열고 몬스터를 쏟아낸 직후라 자신이 마법을 사용할 만한 마나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남은 방법은 몬스터들이 저 벽을 허물어주면, 그곳을 지나가 직접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몬스터들은 얼음 장벽과 회오리바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릭의 말투에는 현재 그의 심리 상태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 돌대가리들을 데리고 일 처리를 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그는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릇처럼 혼잣말을 해댔다.
“이것들아 움직여라. 하메론이 시킨 일은 기한 내에 마치지 못하면, 내 목숨이 위험하단 말이다.”
간절하게도 보일 수 있는 외침과 함께 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전혀 마나가 느껴지지 않던 그에게서 아주 강력한 마나 반응이 나타났다.
그것이 신호였다.
“우워어어!”
몬스터들이 일제히 포효했다. 그와 함께 더 미친 듯이 얼음벽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벽에 부딪혀 자신의 몸이 으스러질 때까지도 그들은 얼음벽에 돌진했다.
벽 뒤편에는 신관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몸은 비록 가만히 한 자리에 서 있기만 했지만, 정신만큼은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벽에 균열이 생기면 그곳은 통곡의 벽으로 메워 나갔다.
그러나 벽에 균열이 가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보니 슬금슬금 벽을 넘어오는 몬스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쿨럭.”
“커헉.”
더는 견디기 힘들었던 신관 두 명이 결국 피를 토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혈색은 이제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 것이오?”
그것을 보다 못한 도란이 엘런에게 물었다. 그의 몸 상태도 역시 정상적이지 않았다.
“대피가 끝나면 신호를 보내기로 했소. 조금만 더 버티시오.”
물론 가장 많은 마나를 쓰고 있는 것은 엘런이었지만, 그나마도 그의 상태가 가장 멀쩡했다.
슈웅.
콰아아앙.
그때 무엇인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벽과 충돌했다. 지금까지 몬스터들이 주는 충격과는 수준이 다른 세기였다.
신관들 대부분이 그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고 뒤쪽으로 넘어졌다. 그리고 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 버렸다.
“젠장.”
엘런은 서둘러 그곳을 메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몬스터 무리는 그 틈을 절대 놓치지 않고 몰려들었다.
피이이잉.
그 순간, 아라카 성이 있는 방향에서 녹색의 빛이 하늘로 쏘아졌다.
일전에 엘런이 판톤에게 신호를 보낼 때 사용하라고 준 아티팩트에서 나온 빛이었다.
“저것이오?”
도란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만 일찍 신호가 왔어도 그들은 벽을 남겨 둔 채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은 아쉬워졌다.
“이것도 에레네의 뜻이라면 따라야겠지. 그대에게는 정말로 고맙소.”
도란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죽기 직전에 정말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소. 이렇게 죽어도 여한은 없을 것 같소.”
그에게서는 모든 미련을 버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엘런의 표정은 그와는 전혀 달랐다.
“혼자서 어디까지 상상한 거요?”
엘런의 말에 도란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것은 주변에 있는 신관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해 생각했소. 에레네께 한 점 부끄럼 없었으니 나는 구원을 받을 것이오. 이 목숨이 다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하지. 그대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소.”
그 말에 엘런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 말 후회할 것이오.”
“그게 무슨 뜻이오?”
엘런은 도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부욱.
엘런은 아무 말 없이 스크롤을 하나 찢었다.
찢어진 스크롤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은 엘런과 신관들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