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83
183
연합의 도래 (1)
* * *
“크르르르.”
“킥. 키이익.”
몬스터들이 벽을 넘어왔을 때는 엘런과 에레네스 신관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목표를 잃어버린 녀석들은 낮게 으르렁거릴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 벽은 분명 마법이 맞다. 어떤 놈이 마법을 사용한 거지?”
몬스터 무리에 뒤이어 릭이 얼음벽을 넘어왔다.
툭.
바닥에는 병사들의 시체와 몬스터의 시체가 한데 엉켜 나뒹굴고 있었다.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부터 몬스터에게서 흘러나온 녹색의 피까지.
그 두 가지 피가 뒤섞여 검은색이 된 채 바닥에 고여 있었다.
신체의 일부로 추정되는 살덩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이곳에서 희생된 자의 숫자를 감히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메카 평원에 살아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 마법을 펼친 놈은 어디로 간 거야?”
릭은 몬스터들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당연히 녀석들은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이런 머저리 같은…… 잠깐만.”
한바탕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던 릭은 자신의 목덜미를 스치고 가는 느낌에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본능에 이끌리듯 한 장소로 걸어갔다.
그곳은 방금까지 엘런이 서 있었던 자리였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엘런이 찢어 버렸던 스크롤 조각뿐이었다.
스윽.
그는 종이의 한 귀퉁이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본 릭의 눈에서 핏발이 잔뜩 올라왔다.
가문 특유의 글씨체로 쓰여 있는 주문. 그리고 한쪽 귀퉁이에는 체들턴 가문 고유의 서명이 들어가 있었다.
릭도 그것이 마법 스크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이 스크롤만큼은 더욱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일전에 사용한 적이 있던 체들턴 가문의 보물, 텔레포트 스크롤이었다.
“엘런…… 정녕 네놈이 왔단 말이구나.”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스크롤을 들고 있는 릭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체들턴 가문을 말살시켜 버린 자가 벽 뒤에 있었다는 생각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저놈들을 잡으러 가라. 그 자리에서 찢어발겨도 상관없으니까 무조건 잡아.”
그는 멍하니 옆에 서 있던 몬스터들에게 외쳤다. 이번에도 그의 두 눈은 붉게 물들었다.
주룩.
“쿨럭.”
그 순간, 붉게 물든 그의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것은 비단 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었다. 눈, 코, 입, 귀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동시에 피가 흘러나왔다.
“젠장, 무리했던 건가?”
흘러내리는 피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털썩.
그가 무릎을 꿇자 지금까지 잠잠하던 공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진동이 생겨났다.
촤아악.
몬스터들을 쏟아 냈던 그 검은색 포탈이 다시 열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쏟아 냈던 몬스터를 다시 쓸어 담기 시작했다.
“취이익?”
몬스터들은 영문도 모른 채, 포탈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릭의 붉은 눈동자도 점차 원래의 색을 찾아갔다.
결국, 그의 주위에 남은 것은 원래부터 메카 평원을 점령하고 있던 몬스터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수가 희생된 탓인지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남은 게 이것밖에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없겠군.”
릭은 허탈해졌다. 가문의 원수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쳐 버린 것이다.
‘엘런, 네놈은 내가 반드시 찾아내겠다. 사지를 찢어 버린 채로 고통으로 물든 네놈의 얼굴을 감상해 주지.’
* * *
한편, 빛에 휩싸였던 엘런과 신관들은 현재 후퇴하고 있는 토마르 군과 합류해 있었다.
워낙 큰 전투를 치른 탓에 부상자가 많았지만, 엘런의 마법 덕분에 쉽게 이송할 수 있었다.
“방금은 정신이 없어서 못 물었지만, 이게 어떻게 된 것이오?”
도란은 앞서가고 있는 엘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엘런이 찢은 스크롤에서 나온 빛에 휩싸인 직후 그는 어디론가 이동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아라카 성의 반대편 성문이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영문을 물어볼 틈도 없이 퇴각 준비부터 서둘렀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도란의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텔레포트 스크롤이라는 것이오. 더 설명해도 알아듣기 힘들 테니, 그저 공간 이동 마법 정도로만 알고 있으면 될 것이오.”
엘런은 체들턴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텔레포트 스크롤을 몇 개 챙겼다.
‘아직 나로서도 사용할 수 없는 공간 마법이어서, 챙겨두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는데. 이게 이렇게 쓰이는군.’
그의 선택은 바로 위기의 순간 빛을 발했다.
그는 원래 신관들을 위해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수십의 병사라도 더 살리겠다는 생각으로 출정 전 아라카 성으로 위치를 지정해 둔 것뿐이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쓰이긴 했어도, 덕분에 위기를 넘긴 건 맞으니.’
처음의 의도야 어찌 되었든, 그 선택 덕분에 엘런과 에레네스의 신관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또 그대 덕분에 목숨을 구했군. 정말로 감사하오.”
그렇게 말하는 도란의 표정에는 어딘가 다급한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감사의 인사는 많이 들었소. 나 덕분에 깨달은 것도 많았다고 하지 않았소?”
“도란 공이 그런 말도 했단 말이오? 믿을 수가 없군.”
엘런의 말에 판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아닌 게 아니라, 도란은 에레네스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마법을 사용하며, 메카를 버리자고 주장까지 하는 엘런을 인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것은…….”
도란은 귀까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후회할 것’이라는 엘런의 말이 이제야 이해되는 것 같았다.
죽음을 앞두고 감성적이게 된 것이 이처럼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란 공이 마음을 바꿔 준 덕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병사를 살릴 수 있었소.”
“알겠소.”
그는 엘런의 말을 잽싸게 받으며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다.
그런 그의 반응이 재미있기는 했지만, 엘런도 더 이상 파고들지는 않았다. 지금은 더 큰 골칫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지금은 다른 문제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소.”
지금까지 장난기를 머금고 있었던 엘런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 대규모의 몬스터 군단을 말하는 것이오?”
도란도 금세 심각한 태도로 바뀌었다. 그만큼 그들이 본 것은 중대한 위기였다.
엘런은 검은 포탈 속에서 쏟아져 나오던 몬스터들을 떠올렸다.
몬스터 자체의 개체수를 셀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 종류가 몇 개나 되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엘런은 그것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다행히 당장에 몬스터들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지는 않소.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은 조금 번 셈이겠지. 그들이 바로 쫓아왔다면 우리 병사들은 쉬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오.”
엘런은 퇴각을 하는 와중에도 정찰대를 보내 후방의 상황을 살폈다.
“그건 참 다행이오. 그런데 나는 그자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 가늠이 되지 않소.”
그것은 엘런도 마찬가지였다. 그로서도 릭, 아니 하메론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우선은 그들을 막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소. 저 정도 숫자의 몬스터 무리가 달려든다면, 그 어떤 도시라도 쉽게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오.”
엘런의 말에 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공의 말대로 나도 교황께 가서 이 사실을 보고하도록 하겠소.”
“에레네스에서는 다른 나라로도 전달해 주었으면 좋겠소. 아무래도 신관을 통한 전달이 가장 빠른 것 같으니 말이오. 특히나, 아라카 지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스티어드 왕국에게는 최대한 빨리 부탁하오.”
“그러도록 하지.”
“그럼, 잘 부탁하겠소.”
그렇게 에레네스의 신관들은 이프루로 방향을 틀었다.
그들의 숫자는 처음 아라카에서 보았을 때보다 반 정도로 줄어 있었다.
그마저도 몸이 멀쩡한 이는 양손으로 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신관들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아픈 내색 없이 이프루로 말을 몰았다.
계속해서 토마르로 향하던 엘런은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이로써 확실해진 것은 하메론이 아직 정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메론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확정하지 못했다. 그저 무엇인가를 피하려고 한다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릭을 통해서 키에아스의 성유물을 모으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단서가 될 수 있었다.
‘이곳에 남는 선택도 잘 한 것 같군.’
그는 만약, 메카에서 보았던 정도의 몬스터가 해리포드를 침공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리포드의 마법사와 기사들이 모두 나섰다면 막아낼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피해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 하메론이 가세하기라도 하면, 해리포드 전체가 폐허가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이 땅에서 결말을 짓는 게 낫겠지.’
서부 대륙의 왕국들이 힘을 합쳐 움직인다면, 그의 움직임을 막아 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그를 방해함과 동시에 시간을 버는 동안, 엘런은 더 강해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친화력의 비약을 먹었지만, 그럼에도 부족하다.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
* * *
“도란 경, 보고해 주세요.”
교황은 자신의 긴 금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물었다. 그 앞에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도란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메카를 사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에는 죄책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짐이 잔뜩 올라 있었다.
“아니에요. 도란 경이 실패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에레네의 자비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교황은 여전히 상냥한 태도였다.
“토마르 왕국의 베리라는 자의 활약으로 저희는 메카를 탈환하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마물 무리의 수장인 릭이라는 자가 갑자기 엄청난 수의 마물들을 소환했습니다. 저는 더는 메카를 지킬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후퇴를 명령했습니다.”
그녀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제 주위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네요. 도란 경이 메카를 두고 후퇴를 하다니. 이것 역시도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일이에요.”
“죄송합니다. 아무리 성전이라고 하더라도 승패가 너무나도 명확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의 무의미한 희생을 막고자 했습니다.”
도란은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그곳에서 정말 많은 일을 겪고 오셨나 보군요. 경의 이야기를 더 들려주세요.”
“예.”
그 후로 도란은 자신이 겪었던 일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보고했다.
엘런과 기마대의 등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여태까지 차분하게 듣던 교황도 조금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이상입니다.”
달그락.
도란의 보고가 끝나자 교황은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말투와 표정 그리고 목소리였다. 그러나 한센과 같이 교황의 즉위부터 함께해온 그는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베리라는 자의 말이 맞아요. 즉시 신전의 연락망을 이용해 메카에서 있었던 내용들을 전하세요. 특히 스티어드 왕국에는 ‘계시’를 사용해도 좋아요.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돌변했다.
모든 것을 포용할 것 같은 포근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조그맣고 가는 입술이 열렸다. 거기서는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섬뜩한 말이 흘러나왔다.
“감히, 에레네교의 성지를 건드린 자에게는 심판을 내려 줘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