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87
187
연합의 도래 (5)
* * *
타닥.
틱.
온통 잿더미가 되어 버린 도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무너진 건물들은 이제 이 도시의 융성함을 증명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생명력이 사라진 도시에서는 오직 작은 불씨들만이 마지막 생명력을 표출하고 있을 뿐이었다.
“크르르.”
도시 전체에 자욱한 탄내를 따라 짐승의 울음이 들려왔다.
많은 사람이 살았을 것 같은 도시임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산속에서나 들을 수 있는 몬스터의 그르렁거림이 더 잘 어울렸다.
저벅저벅.
생존자라고는 단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이곳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사람의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밟으며 유유히 도시 사이를 걸어갔다.
그 모습이 굶주린 몬스터들에게는 먹잇감으로 제격이었다.
그러나 도시에 가득한 몬스터들은 그 사내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피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걸리적거리니까 저리 꺼져.”
그 사내의 퉁명스러운 말에 몬스터들은 그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그 사내는 돌무더기 위에 걸터앉았다.
“이제 훨씬 낫네. 내가 아무리 그래도 저 냄새 나는 것들과는 도저히 함께 있을 수 없다니까.”
그의 손에는 장갑이 들려 있었다. 그는 그 장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낡은 장갑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본다면, 누구라도 그 장갑이 결코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흰색 빛은 세상의 그 어떤 더러움이라도 정화시킬 것 같은 신성함을 지니고 있었다.
‘드디어 하나 찾았군.’
그의 입꼬리가 위쪽으로 올라갔다.
사내의 반응은 점잖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장갑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있었더라면, 사내의 반응보다 훨씬 더 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사내가 들고 있는 것이 바로 키에아스의 5대 성유물 중 하나인 키에아스의 장갑이었기 때문이다.
키에아스의 장갑은 토마르에서 보관 중인 키에아스의 망토와 마찬가지로, 에레네교의 상징이자 왕권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헬라 왕국의 수도 헬리오에 보관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보관함이 아니라 한 사내의 손에 들려 있었다. 게다가 성유물을 지키는 크루세이더며 신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저항이 거셀 줄은 몰랐는데.’
지금까지 그가 밟고 온 잿더미 속에는 인간의 시체도 많았지만, 몬스터의 시체 역시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척 보기에도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몬스터 군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헬라 왕국도 성유물 앞에서는 사력을 다해 저항했다.
그 때문에 수도를 함락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게 되었다.
‘그래도 하메론이 말한 시일 내에 맞춰서 다행이다.’
한 남자를 떠올린 그의 눈빛이 육식 동물에게 쫓기는 사슴의 그것처럼 변했다.
생물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리고 그에게만큼은 더욱 강한 생존 본능이 그의 털을 곤두서게 했다.
“하아…….”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키에아스의 장갑을 보고 있노라니 세상의 모든 걱정이 쓸데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이 걸린 문제라도 마음속 한편으로 밀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 오로지 경외심만 들게 하는 신비로운 물건이었다.
“크으.”
“크르륵.”
릭이 그 장갑을 들고 걸어가니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이 그를 슬금슬금 피했다.
인간인 릭으로서도 견디기 힘든 신성력인데, 몬스터들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이걸 가지고 확 도망칠까?’
까마귀가 반짝이는 것에 눈을 떼지 못하듯, 릭은 귀한 보물에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이 장갑만 있다면 하메론에게서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봐 온 그라면 이런 게 있다고 해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프로드 왕국의 대귀족이었음에도 그는 눈치가 빨랐다. 자신이 한 수 접어야 하는 상대와 그렇지 않아도 되는 상대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이였다.
‘조금만 더 기회를 보자.’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눈앞에 있던 공간이 일그러졌다.
범인은 이런 현상을 보고 깜짝 놀랄 수도 있었겠지만, 릭은 이것이 어떤 현상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평소 습관처럼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슈우욱.
일그러진 공간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의 정체는 이미 알려졌지만, 그는 여전히 커다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드디어 하나를 챙겼군.”
그는 형상이 갖춰지기도 전에 릭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다. 네가 말한 시일 안에 해결했지.”
릭은 잠깐이나마 했었던 결심을 버리고 키에아스의 장갑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호오, 이것이 키에아스가 사용했던 장갑이란 말이지.”
그는 장갑을 받아들었다. 장갑이 그의 손에 넘어가자 지금까지 은은하게 뿜어 나오던 신성력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의 손에 들어간 장갑은 이제 성유물이 아니라 보통의 낡은 장갑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변해 버린 키에아스의 장갑을 로브 속에 챙겨 넣었다.
“이것으로 하나는 챙겼고 아직 4개가 남았군. 이른 시일 내에 해결을 해 줬으면 좋겠다. 내가 참을성이 그렇게 많은 사람은 아니어서 말이야.”
릭은 속으로 화가 났지만,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아서 무엇을 하려는 거지? 인제 보니 너는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릭의 호기심이 그의 몸을 지배해 버렸다.
그의 입이 차라리 안 꺼내는 게 좋았을 것 같은 말을 내뱉은 것이다.
휘리릭.
“끄으으윽.”
잘못된 호기심의 대가는 혹독했다.
하메론의 손에서 나온 푸른색의 마나 줄기가 릭의 목을 휘감았다.
마치 밧줄에 목이 조이고 있는 것처럼 그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무 주제넘은 호기심을 부리는데?”
하메론은 묶여 있는 릭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마나 줄기는 그의 목을 더 파고들었고, 그의 얼굴은 시퍼래졌다.
“켁! 케엑!”
릭은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고 있는 마나 줄기를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턱.
하메론이 마나 줄기를 거두자 릭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숨을 몰아쉴 기운조차 없어 보였다.
“미안미안, 그냥 장난 한번 쳐 봤어.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 말이야.”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릭에다 대고 하메론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성유물이 있으면 방금 내가 너에게 했던 걸 훨씬 더 잘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지.”
여전히 목에 고통이 남아 있던 릭은 그의 농담을 받아 줄 힘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메론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 나는 가 볼 테니 너는 다른 성유물도 서둘러 주길 바란다. 시일이라는 건 정해져 있기 마련이니까.”
슈우욱.
그렇게 말한 하메론은 등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그러진 공간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젠장.”
릭의 입에서는 욕이 새어 나왔다. 그의 몸은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렸다.
저자 덕분에 해리 포드 왕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덕에 저자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게 되었다.
그러나 화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는 마나가 한순간도 느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내가 언젠가는 저놈에게서 벗어나고야 말겠다.’
그는 주먹으로 땅을 내려치며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 * *
한편, 에레네스의 수도 이프루에서는 연합군의 창설식이 있었다.
엘런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각 하위 부대장들은 모든 나라에서 비교적 공평하게 나눠 가지게 되었다.
총지휘관 엘런을 필두로 보병대장은 토마르의 판톤, 기병대장은 크트론의 토드, 정찰대장은 브룩의 샤를리, 전투지원대장은 스티어드의 아드리안, 마지막으로 에레네스의 한센은 특수부대장을 맡게 되었다.
왕국별로 공평하게 한 자리씩 가지는 것을 생각하기도 한 것이지만, 그 나라의 주력 신성 마법을 기준으로 삼기도 한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독립적 재량권을 인정받으면서도, 평소 엘런의 지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필요시에는 강제적으로 그들을 동원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각 나라에서 차출된 병력의 총합은 대략 5만이 넘게 모였다.
이 정도 숫자의 병력은 동부 대륙에서는 쉽게 모을 수도 있는 정도였지만, 이곳은 서부 대륙이었다.
합법적인 왕실 소유의 병력이 1만이 넘지 않는 대륙에서 이 정도의 병력이 모인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다. 각 왕실은 최소한의 치안유지를 위한 병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연합군으로 지원한 것이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공통되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헬라의 점령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
결국, 헬라의 수도 헬리오가 몬스터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것은 국왕들로 하여금 엄청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성유물이 강탈당했다는 사실은 병사들에게 적극적인 참전 의지를 일으켰다.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서부 대륙의 유례없는 규모의 연합군이 결성된 것이다.
총지휘관 엘런에 대한 소문은 이미 병사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저분이 이렇게 손짓을 한 번 하면, 하늘에서는 번개가 내리치고, 땅에서는 얼음으로 된 성벽이 솟아오른단 말이야.”
토마르의 병사가 양손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다른 병사들에게 엘런의 활약을 설명했다.
그 주위에 있던 병사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거, 과장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세상에 어떤 인간이 그런 기적을 일으킨단 말이오? 에레네의 기적을 사용하는 신관들조차도 그런 건 불가능할 것이오.”
물론 아직 그를 보지 못한 타국의 병사들 중에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성서(聖書)에서나 나오는 이야기 정도로 치부했다.
“형씨는 어디 속고만 사셨나. 토마르군 사이에서는 저분이 에레네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보낸 천사라는 말도 있을 정도요.”
그의 진지한 눈빛에 다른 병사들은 저절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들의 눈은 마치 할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는 아이들 같았다.
“사실 아무렴 상관없겠지. 저분이 천사이든 뛰어난 인간이든 혼돈의 씨앗이든. 확실한 건, 저분이 그 지옥 속에서 우리를 구해 줄 분이라는 거요. 그러니 안심하도록 하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토마르의 병사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이미 단상에 서 있는 엘런을 향해 있었다.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엘런에게 시선을 보냈다.
단상에는 총지휘관 엘런과 에레네교의 교황 트리에스테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토마르의 기사 베리. 에레네의 모든 형제자매가 그대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커요. 그러니 부디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지켜 주세요.”
그녀가 몇 발자국 걸어 나오더니 은색 지팡이 하나를 엘런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에레네스에서 파견을 나가는 부대의 지휘관에게 하사하는 것이었다.
“와아아아아!”
엘런이 그 지팡이를 받는 순간, 5만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그 함성의 크기는 엘런에 대한 기대감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헬라 왕국이 몬스터에게 점령당하고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키에아스의 장갑이 몬스터들의 손에 넘어갔소.”
엘런이 봉을 높게 들며 외쳤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는 천둥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가 목소리 증폭 마법을 최대치로 사용한 것이다.
그가 마법을 사용한 것을 눈치챈 신관들이 그를 탐탁지 않은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엘런은 그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엘런은 자신으로 인해 끌어올려 진 병사들의 사기를 더 이용하고자 했다.
“나는 에레네의 아들로서 이들의 행동을 결단코 이들을 용서할 수 없소. 그것은 그대들도 같았을 것이오.”
에레네가 만든 질서를 왜곡시킨다는 엘런이 에레네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역설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병사들에게 그런 사실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엘런은 그저 자신들을 무사히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 줄 구원자였다.
그리고 엘런은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그들의 포악함에 두려움이 마음속에서 싹트기도 했을 것이오. 나 역시 그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자로서 그대들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오.”
이번에는 엘런은 병사들을 향해 봉을 쭉 뻗었다.
“나는 그대들에게 약속하겠소. 그대들은 이 성스러운 전쟁의 승자로서, 생존자로서 이곳에 다시 서 있을 것이오.”
그 어떤 약속보다 달콤한 약속. 그들에게 승리가 아닌 생존을 약속하는 지휘관. 병사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던 엘런의 연설에 격한 반응이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서부 대륙 최초의 연합군은 5만여 명의 함성과 함께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