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94
194
케롤 성으로 (1)
* * *
“저곳이 스탱 성이군.”
엘런은 멀리서 보이는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옆에서 지도를 펼치고 있던 신관 하나가 그의 말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현재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공교롭게도 몬스터 군단과 함께 릭이 포탈을 타고 나타났던 자리이기도 했다.
그 증거로 몬스터들의 발자국이 이리저리 나 있었다.
“예상대로 몬스터들의 정체가 범상치가 않군.”
엘런은 발자국을 살폈다.
산길을 지나다니면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녀석들의 발자국들과는 다른 종류의 것들이 많았다.
척 보기에도 희귀한 몬스터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총지휘관님, 성안에서 여전히 생명 반응이 감지됩니다. 아직 생존한 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 오자마자 감지를 시작한 신관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스탱 성의 전투가 한센의 패배로 끝난 후, 5일이 지났다.
시간이 많이 흐른 만큼, 엘런은 생명 반응에 대해 기대감을 거의 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자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성을 빠져나와 우리에게 오지도 않았으면서 여전히 생명 반응이 잡히고 있다. 그 말은 그가 움직이기 힘든 부상을 입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가 서둘러야 한다.”
엘런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스탱 성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남아 있다는 의미였다.
“예.”
그들은 스탱 성을 향해 말을 내달렸다.
지금까지도 쉬지 않고 달려 준 말이었지만, 녀석들은 지친 기색도 없이 주인의 명령을 따라 주었다.
쿠구구구.
쿠웅.
성벽을 이루고 있던 커다란 돌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성에 가까이 갈수록 그들의 눈에는 며칠 전에 있었던 치열했던 전투가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특히, 성문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6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의 성벽은 가장 심한 공격을 받은 것 같았다.
마치 거대한 공성 병기에 공격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성벽의 형체가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을 놀라게 한 건, 성벽 앞에 쓰러져 있는 거대한 녀석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칼로 난자당해 걸레짝이 되어 버린 오우거였다.
그 주위로는 녀석의 거대한 몸집에 맞게 엄청난 양의 녹색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역시 오우거까지는 성공했다. 답은 하메론인가?’
몇몇 신관은 오우거를 보며 경악했다.
그러나 엘런은 예상한 시나리오였기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엘런과 신관들은 그 성벽의 균열을 통해 성안으로 진입했다.
성안의 광경은 큰 피해가 없어 보였다.
모든 전투가 성벽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안쪽은 오히려 멀쩡했다.
“생존자 반응이 감지되는 곳으로 안내해라.”
그러나 멀쩡한 풍경과는 달리 성안에 진동하고 있는 피 냄새는 엘런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여기 근처입니다. 이곳에서 한 명의 기운이 감지됩니다.”
계속해서 생명 반응을 감지하던 신관이 멈추어 섰다.
“이곳에서 감지된다고?”
엘런은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신관을 쳐다보았다.
다른 이들도 그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지금까지의 광경과는 다르게 그 주위에는 수백, 수천 구의 시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몬스터들의 사체도 없이 오로지 인간의 것들만 있었다.
이곳에서 병사들이 몰살당했음이 확실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그렇습니다. 아마 이쪽인 것 같습니다.”
그 사이에도 신관은 더듬더듬 반응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그가 한 자리에서 멈추었다.
“이자들은……?”
그곳에는 50여 명의 신관들이 한 곳을 향해 팔을 뻗은 채 죽어 있었다.
모든 시체가 같은 방향을 향해 누워 있는 모습은 심지어 괴기해 보이기까지 했다.
“끄으으으…….”
엘런들이 표정을 찌푸리며 그곳을 살펴보고 있을 때, 시체 더미들 사이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찾아봐.”
엘런의 명령에 그들은 그곳에 누워 있는 동료들의 시체를 옆으로 치우며 소리의 정체를 찾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숨이 넘어가는 그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으아악!”
마지막으로 데이브의 시체를 옆으로 옮긴 신관이 큰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그의 표정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았다.
“보……니…….”
그러나 그가 본 자는 귀신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자신의 귀에 똑똑히 들리는 자신의 이름을 들 수 있었다.
“하, 한센 경?”
제정신을 차리고 그의 얼굴을 확인한 보니는 조금 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한센 경이라고 했나?”
“한센 경은 무사한가?”
보니의 외침을 들은 신관들은 헐레벌떡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아, 살아 계셨습니까?”
그곳에는 시체와 거의 다를 바가 없는 한센이 누워 있었다.
며칠째 먹을 것을 먹지 못한 탓인지 볼이 움푹 파여 있었다.
가뭄의 땅처럼 메말라 있는 입술은 그가 어떻게 이곳에서 생존할 수 있었는지 의심마저 들게 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바로 치료부터 시행한다! 신관들 전부 모여.”
엘런이 급하게 명령했다.
한센의 모습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서둘러야 했다.
“예.”
엘런과 함께 온 신관들이 나섰다.
* * *
“몸은 좀 괜찮소?”
엘런이 담요를 둘러싸고 있는 한센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들의 집중 회복 마법 덕분에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는 했지만,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한센이 아무 말 없이 엘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은 많은 생각들로 가득 찼다.
‘아무리 이자라고 하더라도 그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처음에 든 생각은 두려움이었다.
한센의 평생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해 보고 무기력하게 패배해 본 적은 없었다.
심지어 싸워 본 적은 없지만, 만약 엘런과 싸우게 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분노에 가득 찬 릭이 보여 주었던 자신의 본 모습은 한센의 뇌리에 깊게 박히게 되었다.
‘그런 힘을 가진 자가 어째서 성유물을 노린단 말인가? 지금껏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자인데…….’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의심이었다.
정확히는 엘런에 대한 의심이었다.
얼마 전부터 평생 본 적 없던 괴물이 나타나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히 녀석들의 활동 시기와 겹쳐서 나타난 것이 바로 엘런이었다.
게다가 엘런의 말과 행동으로 보았을 때, 원래부터 그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엘런으로 인해 이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든 것이다.
‘아니, 어쨌든 그런 자가 서부 대륙을 활보하게 두는 것은 위험하다. 그자를 잡을 때까지 만이라도 이자에게 협력해야 한다.’
그것이 한센의 머릿속에 떠오른 마지막 생각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할 때, 마물들이 성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소. 그대의 말대로 이곳 스탱 성이 주된 공격지인 것 같았소.”
결국 한센은 릭을 처리하기 전까지만 이라도 엘런과 협력하고자 마음먹었다.
“우리는 스티어드의 병사들과 함께 마물들을 막아 냈소. 오우거에게 꽤 고전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처리했소. 그때까지는 신기하기도 했소. 그대의 말이 모두 맞아떨어지니 말이오.”
그의 몸이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
그다음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신체적으로 자연스러운 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예상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소.”
“그자가 누구요?”
드디어 자신이 궁금하던 대목이 나오자 엘런이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물들의 수장, 릭이라는 자였소.”
“그자는 그대와 실력이 비슷할 텐데, 어떻게 된 것이오?”
엘런의 말에 한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보았던 그자가 자신과 비슷한 실력이라니.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뭔가 다른 것이 있었군.”
“그렇소. 그러고 보니 그것이 그대의 예상이 틀린 두 번째 사례가 되겠군.”
한센은 당시 보았던 릭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살면서 그런 무기력함을 느껴 본 적이 처음이오. 그자가 마물을 닮은 포효를 내지르니 성벽 곳곳에 금이 갔소. 그것은 어떤 직접적인 공격도 아니었소. 그저 소리로 그렇게 된 것이었소. 그리고 그자가 와이번의 등 뒤에서 뛰어내렸지.”
그는 엘런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자는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소. 그것보다 더 끔찍했던 것은 그의 형상이었소. 그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전혀 인간이 아니었소. 그것을 본 나는 그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뻔했었지…….”
엘런은 한센이 이렇게 말이 많았는지 처음 알았다.
지금껏 그와 나눈 대화를 생각해 보면, 대화를 이끌어 간 것은 엘런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경우 엘런의 말에 단답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달랐다.
엘런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한센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대화의 한 호흡, 한 호흡도 매우 길어졌다.
에레네스의 최강자, 에레네의 검이라 불리는 한센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라도 어떻게 보면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당장 동부 대륙으로만 눈을 돌려도 그보다 강한 자를 몇 명 정도 고를 수 있었다.
한센은 에레네스라는 좁은 우물에 갇혀 지금까지 더 높은 곳을 알지 못했고, 무기력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이번 경험이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자의 뒤에 달려 있는 꼬리가 한 번 움직이면 동료들이 수십 명이 죽어 나갔소. 나도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소. 내가 인식할 틈도 없이 나도 그만 이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오.”
“그랬던 것이군. 이거, 생각보다 빨리 움직여야겠소. 내가 상정한 것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군.”
알고 싶었던 걸 모두 알았던 엘런은 인제 그만 몸을 일으키려 했다.
덥석.
한센이 일어나고 있던 엘런을 잡아 세웠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그의 눈에서는 절박함이 보였다.
“그대는 그자를 막을 수 있소?”
“물론이오.”
엘런이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
그런 그를 본 한센은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의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감정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럼 난 가 보겠소. 조금 무리한 행군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 경도 몸을 추스르시오.”
한센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 그게 아니지 않은가!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게야?”
“죄, 죄송합니다, 폐하.”
스티어드 왕가의 인장이 걸려 있는 왕실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모든 귀족이 모인 회의는 아니었지만, 척 보기에도 고위급 귀족들이 모여 있는 중요한 회의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우리의 성유물이 스탱 성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연합군이 어떻게 알았냐는 말이야.”
평소 한없이 인자해 보이던 스티어드의 왕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연합군 내에 파견된 아드리안 경에게 듣기로도 이전까지 부대에는 아무 낌새도 없었다고 합니다.”
귀족 하나가 거의 절을 하다시피 하며 국왕에게 고했다.
“아무래도 연합군 총지휘관 베리의 단독 결정인 것 같습니다.”
“그자가 어떤 길을 통해서 알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그자를 조사해야 합니다.”
귀족들은 이때다 싶어 모두 엘런의 이름을 말했다.
그들로서도 어떻게든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너희들은 진짜 고작 그게 걱정이 되냐?”
국왕은 이제 신하들에 대한 최소한의 경어까지도 모두 저버렸다.
“그것보다 에레네스에게 숨겨 온 키에아스의 성유물을 이관한 것이 들통이 났다. 그게 다가 아니고, 지금껏 몰래 빼돌려 왔던 성유물까지도 모두 걸렸다는 게 문제라고.”
잔뜩 흥분한 채로 소리를 지르는 국왕의 모습에 신하들은 모두 입을 닫고 있었다.
결국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한 국왕이 신고 있던 신발을 내던졌고, 그것은 엎드리고 있던 귀족의 코에 맞았다.
주르륵.
그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놈들이 그걸 알았다면 우리를 가만두지 않겠지. 왜 성유물을 옮겼는지, 그리고 왜 키에아스의 성유물만이 아니라 다른 성유물이 그곳에 모여 있는지 설명을 해야 할 거라고.”
국왕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모습은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가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옷이나 머리 위의 왕관이 아니었다면, 그가 국왕인지 전혀 알 수 없었을 정도였다.
“폐하,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국왕이라도 뒤에 붙어 어떻게든 콩고물을 얻어먹으려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지금 나선 자가 딱 그런 자였다.
“그래, 주앙, 생각한 걸 말해 봐.”
“그들의 주의를 계속해서 분산시키는 것입니다.”
그의 입에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계획을 말할수록 국왕의 입도 그와 같이 변했다.
“너, 제법이잖아?”
그의 말이 끝날 때쯤 국왕은 그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그럼 그러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