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200
200
격돌 (4)
* * *
“아드리안 경?”
엘런은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드리안을 비롯한 다른 지휘관들이 서 있었다.
그들 중 멀쩡한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중 죽은 이도 없었다.
“그놈들을 처리한 것이오?”
판톤과 한센은 다른 지휘관들과 합류하여 릭이 뱉어낸 괴물을 잡으러 갔었다.
사실 그들의 실력으로는 그 괴물들을 이길 수 없었다.
엘런이 릭을 처리할 시간이라도 벌어 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랬던 그들이 모두 무사히 이곳으로 왔다.
“퉷.”
한센은 속 깊은 곳에서 나온 피를 바닥에 뱉었다.
그리고는 엘런을 향해 슬쩍 웃어 보였다.
“우리도 그동안 조금은 성장한 것 같더군.”
한센과 지휘관, 그리고 모든 특수부대원은 그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성장을 했다.
본디 무(武)의 정진이라는 것은 수련장에서 백날 검을 휘두르거나 마법을 사용하고, 방 안에서 이론만 연구만 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그것이 몸에 자연스럽게 배게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은 이토록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가 매우 드물었다.
절대 1강 체제인 서부 대륙의 구조상 치열한 전투가 일어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앙심으로 힘을 키우는 신관이나 크루세이더들의 특성상, 기도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탓도 있었다.
그러던 그들이 이번 사태를 통해서 부족했던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자신들보다 더 강한 몬스터를 잡아 보기도 하고, 협력해서 움직이는 전투 방식에 대해서도 배웠다.
그러면서 이론으로만 배웠던 것들이 몸에 배기 시작했다.
나아가 그 이론을 실전에서 어떻게 응용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몬스터의 대규모 공습은 서부 대륙 전체의 위기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훈련장이 된 것이다.
“일단, 우리 걱정보다는 그대의 상태가 가장 안 좋아 보이는군.”
아드리안의 손에 환한 빛이 생겨났다.
엘런이 서부 대륙에 와서 보았던 그 어떤 회복 마법보다도 포근하고 기분 좋은 빛.
그 빛이 엘런에게 전해지자 욱신거리던 복부의 통증이 완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연합군 중 회복 마법에 있어서는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아드리안이었다.
그의 신성력은 엘런이 사용한 회복 마법을 방해하던 그 알 수 없는 기운까지도 몰아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절대 회복이라는 말이 적합할 정도였다.
“고맙소. 그대의 회복 마법은 정말이지 배우고 싶소.”
피가 철철 흐르던 팔부터 독무 때문에 흐릿하던 정신까지,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삐거덕거리던 마나 하트의 서클도 이제 원활하게 마나를 순환시켰다.
엘런도 재정비 시간을 갖춘 덕에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의 시선은 엘런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대가 상대하고 있는 저것이 더 두렵구려. 어디서 저런 것이 나왔단 말이오?”
그는 반쯤 잘린 팔 하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뜯어 내는 릭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주변에 있던 지휘관들의 표정도 그와 똑같았다.
“하루살이들이 꼬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군.”
다시 새로운 팔이 돋아난 그는 귀찮다는 듯 말했다.
여전히 눈, 코, 입에서는 검붉은 마나가 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착각도 심해. 진정으로 너희가 그것들을 이긴 것 같나?”
마음속의 공포를 끌어내는 듯한 섬뜩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은 지휘관들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건 너희들이 이긴 게 아니라, 내가 그놈들의 힘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번뜩.
그의 눈에서 검은 안광이 비쳤다.
지휘관들은 몸이 돌처럼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 눈빛에 어떤 마법이 걸려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몸이 본능적으로 전투를 대비하면서 근육이 잔뜩 수축하는 바람에 그렇게 느껴진 것이다.
“생긴 것은 그놈과 비슷한데 느껴지는 기운은 훨씬 더 강하군.”
“지금껏 저런 괴물과 싸우고 있었던 게요?”
지휘관들은 저릿저릿한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어찌 되었든 저놈은 내가 상대하겠소. 독무를 마신 탓에 제대로 싸우기가 힘들었는데 고맙소.”
엘런만큼은 압박감을 전혀 느끼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몸을 툭툭 털었다.
이제 몸에서는 어떠한 이상 상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드리안 경, 혹시 회복 말고도 다른 축복들이 있소?”
“그렇소. 회복 마법만큼은 아니지만, 효과적이긴 할 것이오.”
“그렇다면 내가 전투를 벌이는 동안 그 축복들을 걸어 줄 수 있겠소?”
릭에게는 독무며 마나 줄기며 위협적인 것들이 많았다.
하나하나가 전투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요소들.
아드리안의 도움을 받는다면, 전투를 어느 정도 쉽게 끌어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거라면 가능하오. 단 이런 전장이라면 나를 지켜 주는 이들이 필요할 것 같소.”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몬스터와 인간이 최후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복판이었다.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마법이며, 몽둥이들이 언제 그들을 공격할지 몰랐다.
“한센 경, 판톤 경, 아드리안 경을 부탁하겠소. 토드 경과 샤를리 경은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병사들을 지원해 주시오.”
“그러도록 하겠소.”
“부디, 저놈을 잡아 주시오.”
엘런이 역할을 분담해 주자 그들은 각자의 위치로 움직였다.
그들이 병사들의 대열에 무사히 합류하는 것을 본 엘런은 릭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저 미친놈을 잡을 때가 된 것 같소.”
그 말을 남김과 동시에, 엘런의 형체가 사라졌다.
* * *
퍼억!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릭의 목이 뒤로 젖혔다.
이번으로 서른여덟 번째 주먹이 그의 몸에 적중했다.
몸에 힘을 뺀 채로 가볍게 휘두르는 주먹.
필립스 권법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였다.
위력은 강하지 않을지언정, 속도만큼은 매우 빨라서 상대방의 타이밍을 뺐을 때 자주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 공격을 엘런이 사용하게 되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주먹이 릭의 얼굴에 닿기 직전, 엘런은 자신의 주먹에다 이시르의 얼음을 둘렀다.
강철도 부숴 버릴 수 있는 얼음 탓에 주먹의 강도가 수십 배는 늘어난 것이다.
릭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엘런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독무를 뿌리고 마나 줄기를 휘둘러 대기는 했다.
그러나 엘런은 그 공격을 모두 피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회피 동작이 자신의 공격에 방해가 된다면 과감히 생략했다.
잠깐의 고통을 감수하면 아드리안의 회복 마법이 곧바로 그를 치료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나 줄기에게 왼쪽 옆구리를 내준 엘런은 39번째 주먹을 릭의 복부에 박아 넣었다.
“크흑.”
워낙 엘런의 속도가 빨랐던 터라 릭은 제대로 반응할 수도 없었다.
나머지 8개의 마나 줄기를 휘두르긴 했지만, 애꿎은 허공만 갈라 놓았을 뿐이었다.
‘생김새며 공격에 내구도까지,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는 게 하나도 없군.’
엘런은 자신의 손을 툴툴 털며 생각했다.
분명 그가 날렸던 주먹은 웬만한 인간이었으면 그대로 두개골이 함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릭의 얼굴에서는 피 따위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엘런에게 맞았다는 사실 자체에 화가 날 뿐인 것 같았다.
“쥐새끼 같은 놈!”
릭은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 입에서 튀어나온 목소리는 두 개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몸 깊은 곳을 울리는 저주파였고 또 다른 하나는 귀를 찢어 버릴 것 같은 고주파였다.
피윳.
분노에 가득 찬 채로 한껏 벌린 입으로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컥.”
그것은 릭의 발밑에서 튀어나온 빛줄기였다.
엘런이 릭의 주위를 도는 사이, 그의 발밑에 마법진까지 그려 놓은 것이다.
그리고 시기에 맞게 그곳에서 개량형 매직 미사일이 튀어나온 것이다.
매직 미사일은 릭의 입을 통과해 뒤통수로 튀어나왔다.
완벽하게 머리를 꿰뚫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고 있을 뿐 죽지는 않았다.
“신이시여.”
“정말이지 더러워서 못 봐주겠군.”
머리를 관통당해도 여전히 살아 있는 릭을 보며 한센과 판톤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성서(聖書)에서도 저런 괴물은 본 적이 없었다.
‘사이클론 크러쉬. 3중첩.’
엘런은 공격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바닥을 구르고 있는 릭을 향해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거대한 회오리는 아니었지만, 그것의 존재만으로 주변의 공기가 요동치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사이클론 크러쉬는 이 안에 들어오는 그 어떤 것이라도 모두 찢어 버릴 수 있는 마법이었다.
그것도 그 위력적인 마법이 3개나 겹쳐진 형태였다.
릭조차도 본능적으로 그 위험성을 인지했다.
휘이이이이잉.
회오리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릭을 향해 날아갔다.
릭은 9개의 마나 줄기를 겹쳐 자신의 앞에 벽을 만들었다.
촤아악.
그러나 회오리바람이 마나 줄기를 산산조각 내 버림으로써 릭의 행동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릭을 집어 삼켜 버렸다.
‘블리자드, 압축, 사출.’
엘런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바로 이 순간이 릭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여러 비기들을 모두 꺼내 들었다.
피윳.
투콱.
엘런은 회오리 내부를 향해 극한을 품고 있는 얼음 조각을 날렸다.
주변에 일고 있는 흙먼지 때문에 확실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얼음 조각이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마지막이다.’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회오리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러자 회오리의 형상을 한 제피로스가 보였다.
제피로스의 형상은 회오리부터 엘런의 손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소닉 버스터.’
엘런이 주먹을 꽉 쥐었다.
부웁.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모든 소리가 삼켜졌다.
사납게 불어 대던 회오리의 소리, 릭을 보며 질겁한 지휘관들의 소리, 그리고 주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병사들의 소리까지…….
그 모든 소리가 한 점으로 수렴했다.
꽈앙.
그 절정의 지점에서 다시 공기가 급격히 팽창했다.
한 점에 모였던 회오리바람이 폭발해 버린 것이다.
엄청난 돌풍이 주변으로 불어 닥쳤다.
사람 정도는 거뜬히 날려 버릴 수 있는 풍속이었다.
지휘관들은 아드리안을 지키기 위해 그를 둘러쌌다.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던 몬스터들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린 후였다.
“하아, 하아.”
엘런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드리안의 회복 마법이 없었다면 진즉에 쓰러졌을 정도로 많은 마나 소모가 있었다.
이제는 그의 신성력이 바닥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것이 엘런이 무리해서 마법을 쏟아부은 이유였다.
쉬이이이이익.
현 인류 최고 수준의 마법들이 쏟아진 여파는 적지 않았다.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충격으로 인한 흙먼지가 가라앉지 않을 정도였다.
엘런은 유심히 그 안을 살폈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았다.
‘끝이군.’
엘런은 결론을 내렸다.
이것으로 그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전투 불능 상태를 만들었다고 확신했다.
애초에 그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상태였다.
그가 릭이 서 있던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엘런이 쏟아부었던 마법이 일으킨 정도와 비슷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젠장.’
무엇인가 엘런을 향해 날아왔다.
그는 활주까지 사용하며 가까스로 그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그것은 뒤쪽으로 쭉 날아갔다.
“한센 경, 판톤 경!”
엘런이 다급하게 그들을 불렀다.
정체불명의 그것이 날아간 방향은 아드리안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온다.”
한센과 판톤은 급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그들이 보기에도 현재의 상황은 엘런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파바바바바밧.
무엇인가 비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모두 상상하기도 힘든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서부 대륙의 실력자인 그들이라고 해도 검으로 쳐 낼 수 있는 숫자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미지의 물질은 그 한계를 훨씬 더 뛰어넘었다.
“크아악.”
“크억.”
“윽!”
그 세 명은 결국 쏟아지는 비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 탓에 엘런은 상황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결국 이것까지 사용하게 만드는구나.”
그곳에는 회오리에 휩쓸려 버린 릭이 서 있었다.
아니, 릭이었던 것이 존재했다.
그는 온몸이 반액체처럼 변해 있었다.
반쯤 흘러내린 육체는 겨우겨우 형체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메론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마련한 방법인데 네놈에게 쓰게 되었으니, 네놈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모습처럼 뭉개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엘런을 향해 액체들을 쏟아냈다.
방금 전 아드리안이 있던 곳을 덮친 그 공격이었다.
엘런은 아까보다 더 먼 거리를 움직여 그 공격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엘런은 그 공격을 완전히 피할 수가 없었다.
릭이 뿌려 댄 은색의 비는 엘런이 한 번의 움직임으로 갈 수 있는 범위보다 더 넓었기 때문이다.
엘런은 급하게 방어막을 세웠다.
‘이거 이러다가 여기서 정말 죽는 거 아니야?’
엘런의 어깨에서부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아드리안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면 전혀 신경도 안 쓸 상처였지만, 이제는 달랐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대로 세 번째 성유물을 가지고 그에게서 도망쳐야겠다. 하나의 성유물을 통째로 흡수하면 도망 정도야 칠 수 있겠지.”
그러던 릭의 몸이 더욱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은색의 비가 다시 한 번 쏟아졌다.
엘런으로서도 전혀 피할 수가 없을 만큼 방대한 범위의 공격이자 하나하나가 방금처럼 뼈를 으스러뜨릴 수 있는 위력의 공격.
그것이 엘런을 덮친 것이다.
‘후우.’
그리고 그 위기의 순간 앞에서 엘런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