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201
201
격돌 (5)
* * *
친화력의 비약을 마시고 정령계로 갔을 때였다.
정령왕들은 엘런을 온통 백색인 세상으로 보내버렸다.
그곳에서 그는 숫자 세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많은 죽음을 겪으며 제피로스와의 친화력을 키웠다.
정령왕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엘런이 놀랐던 점은 그들의 응용력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속성에 있어서만큼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응용기술을 보여 주었다.
그중에서 특히 엘런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실피드와 엘라임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가진 정령이 바람의 제피로스와 얼음의 이시르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바람과 물 속성의 기술을 살피게 된 것이다.
엘런은 눈을 감은 채로 그녀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실피드가 사용했던 방어 기술…….’
그의 머릿속에 실피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엘런이 그녀에게 공격을 가할 때면 그녀는 항상 이상한 기술로 그의 공격을 막았다.
‘공격을 막아 낸다는 느낌보다는 흘려보낸다는 느낌이었지.’
자신이 날리는 공격은 실피드가 사용한 바람에 막힌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일으킨 바람에 휩쓸리면서 공격 방향이 미묘하게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어떤 수를 써도 영원히 공격이 닿을 수가 없었다.
엘런도 거기서 영감을 받아 마지막 엘라임과의 전투에서 그녀의 공격을 막는 방어 기술로 실피드의 기술을 사용했다.
자신의 앞에 회오리를 일으켜 엘라임이 쏜 물대포의 방향을 비트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었다.
실피드의 방어는 자연스러운 공기의 흐름 같았다.
어떤 강제성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공격이 바뀔 방향을 완벽하게 통제했었다.
반면, 엘런의 경우에는 억지로 회오리를 일으켜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바뀐 공격의 방향은 자신의 통제 밖에 있었다.
그 상황에서 엘라임의 물대포가 하나라도 자신에게 튀었다면, 결과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와 같이 몇 번을 죽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곳이라면 상관없었겠지만, 이곳은 목숨이 단 하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엘런에게는 그런 불확실한 방어책이 아니라 실피드가 사용하던 완벽한 방어책이 필요했다.
‘저 미친 공격을 파훼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엘런이 눈을 떴다.
릭이 쏟아낸 은색의 비가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양이 어찌나 많았는지, 엘런의 시야에서는 온통 은색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온몸을 부숴 버릴 그 은색의 비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주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병사들이 이미 뒤쪽까지 밀리고 있었다.
몬스터의 숫자가 연합군의 숫자를 훨씬 웃돌았다.
같은 수였어도 힘들었을 텐데 숫자까지 많으니 그들로서도 버티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몬스터들에게 고립당할 수도 있다.
‘어차피 시간을 끌 생각도 없었지만, 어째 매번 목숨을 건 시도를 하는 것 같아.’
엘런의 머릿속에 생긴 유일한 잡념이었다.
나머지 정신력은 모두 실피드의 모습을 떠올리는 데 쓰였다.
그녀의 표정, 팔의 움직임, 손가락 끝의 모습, 거기에 따른 바람의 움직임까지 생생하게 떠올리려 했다.
“내 너의 고백을 들었노라니, 이로써 내가 너의 죄악을 사하고 너의 육체에 나의 영이 가득할지어다, 충만.”
그 순간이었다.
은색 비에 휩쓸렸던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후 이어진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소리.
아드리안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마법을 내뱉으며 낸 소리였다.
촤르르.
엘런은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그보다 육체가 어떤 신성한 것으로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엘런이 경험했던 그 어떤 보조 마법보다도 효과가 탁월했다.
머릿속에 티끌만 한 잡념도 남지 않은 상태.
지금이라면 그 어떤 복잡한 계산이라도 쉽게 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숨소리를 끝으로 아드리안의 기척은 더 이상 감지되지 않았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생명의 불씨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대가 사용해 준 마지막 축복, 최소한 헛되이 쓰이지는 않을 것이오.’
엘런의 앞에 있던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실피드의 모습을 떠올리며 천천히 팔을 휘저었다.
그 손끝 하나하나에 공기에 대한 정교한 조작이 가미되고 있었다.
제피로스와 끊임없이 공명하며, 바람의 길을 한 가닥 한 가닥씩 잡아 자신이 원하는 길로 보냈다.
여기서 조금의 실수라도 생긴다면 바람은 다시 여기저기로 흩어져 버릴 것이다.
아드리안이 사용한 축복 덕에 그는 어느 때보다 높은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휘우웅.
엘런에 의해 움직이던 바람이 곧 귀를 간지럽히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것은 릭을 덮쳤던 회오리와는 조금 다른 형태였다.
한 방향으로 ‘회전’하는 바람의 형태가 아니었다.
이리저리 흐르는 바람들이 몇 겹이고 뒤엉키며 알 수 없는 난기류를 만들어 냈다.
이 난기류는 아지랑이처럼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니 겁이라도 먹은 것이냐?”
릭이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터뷸런스(turbulence)!”
지금껏 무영창에 익숙하던 엘런이 기술 이름을 외쳤다.
물론, 그것은 주문을 영창한 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기합 같은 것이었다.
쏴아아아아아아.
그리고 곧 엘런을 향해 릭의 은색 비가 쏟아졌다.
동시에 엘런의 뼈를 으스러뜨리려던 비가 난기류에 닿는 순간이었다.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던 은색 비가 애꿎은 바닥을 때려 버린 것이다.
쩡, 쩌엉.
엘런을 향하던 모든 은색 비가 똑같은 현상을 겪고 있었다.
그것들은 여기저기 제멋대로 튀어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난기류에 얽힐 때는 제각기 다른 방향이었지만, 결국 그곳에서 나올 때는 모두 한 곳으로 튀어나왔다.
그것은 첫 번째 빗줄기가 떨어졌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생각한 대로 잘되고 있다.’
일직선의 공격을 결대로 흘려보내는 최고의 방어 기술.
직전까지 이름조차 붙이지 않았던 그 기술.
그것이 많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비로소 엘런의 손으로 구현되고 있었다.
“이, 이게…….”
릭은 이번에도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내는 엘런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메론에게도 먹힐 것이라고 확신했던 기술이기에 그 충격은 더했다.
“그래, 어디까지 막을 수 있나 보자.”
릭의 몸이 더욱 흘러내렸다.
이제는 인간의 형상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저 꾸덕꾸덕한 액체를 억지로 쌓아 올린 느낌.
그는 그렇게 흉측하게 변해 있었다.
쏴아아아아.
그럼에도 그는 그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아까보다 더 많은 비를 엘런에게 쏟아부었다.
빈틈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빽빽한 비였다.
그러나 엘런 앞에 도착한 비는 모두 이전의 것들과 같은 운명이었다.
“터뷸런스가 성공한 이상 그런 건 백날 해도 소용없을 거다.”
“닥쳐라!”
엘런의 말에도 릭은 계속해서 비를 쏟아낼 뿐이었다.
패배를 믿고 싶지 않은 그의 마지막 발악같이 보이기도 했다.
‘이시르.’
작게 한숨을 내쉰 엘런은 이시르를 소환했다.
엘런의 마음을 읽은 그는 커다란 얼음판의 형태로 변했다.
엘런은 그 얼음판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번에 그가 떠올린 것은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었다.
초고압의 소나기를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게 분사하는 형태의 공격.
공기 중에 떠다니던 그 물들은 엘런이 가까이 온 순간, 갑자기 돌변해 그를 공격했다.
물방울이라 부르기에도 이상한 그것들은 타격을 하기에 질량이 너무나 작았다.
그러나 그것들의 무서움은 타격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엘런의 코와 입에 들러붙어 숨 쉬는 것을 막아 버렸다.
아무리 떼어 내고 또 떼어 내도 그의 호흡기를 막을 물방울이 수도 없이 많았다.
공기가 없으면 생물이 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고, 그는 그 자리에서 꼴사납게 질식사를 해 버렸다.
엘런은 그 공격을 이시르의 얼음에 응용하고자 한 것이다.
“너도 그게 마지막 상태지? 나도 이게 내 마지막 공격이거든. 이제 진짜 끝낼 때가 된 것 같다, 너와의 인연도, 체들턴 가문과의 인연도.”
이 말이 릭에게 전해졌는지 전해지지 않았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한(恨)을 뱉어낸 것이다.
쨍그랑.
이시르의 얼음이 잘게 부서졌다.
아주 작은 크기로 쪼개진 얼음 조각들은 눈으로 식별하기도 쉽지 않았다.
내리쬐는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것이 아니었으면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정도였다.
그 조각들은 엘런이 일으킨 바람을 타고 릭에게로 날아갔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천천히 공기의 흐름에 따라 릭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내가 네놈 따위에게 죽을 것 같으냐?”
릭은 입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흘러내린 상태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와중에도 얼음 알갱이들은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그를 향해 나아갔다.
얼음 알갱이가 너무 가벼운 탓에 자칫 너무 강하게 밀었다가는 전부 흩어져 버릴 것이다.
지금의 응집력을 유지하기에는 이 속도가 가장 알맞았다.
그리고 마침내 알갱이들이 그에게 달라붙었다.
쩌저저적.
그에게는 틀어막을 눈, 코, 입이 없었다.
그 대신 얼음 알갱이들은 그의 몸에 곳곳에 들러붙었다.
그러자 그의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블리자드를 압축해서 쏘아 보내는 공격은 적중한 부위에 동상을 일으키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이 달랐다.
이 기술은 잘게 쪼개진 얼음 알갱이들이 온몸에 달라붙어 상대를 산 채로 얼려 버리는 것이었다.
알갱이 하나하나에는 블리자드보다 적은 한기가 담겨 있었지만, 그것이 수만 수억 개가 쌓이면 한 물체를 얼리는 데 충분했다.
지금까지는 이 크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케롤 성으로 오는 막사에서까지 밤을 새워 가며 연습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드리안의 축복과 목숨을 건 상황이 더해지니 엘라임이 했던 그 크기처럼 잘게 쪼갤 수 있었다.
“크, 크아학!”
릭은 얼음 알갱이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팔로 추정되는 것을 붕붕 휘둘렀다.
그러나 그것들은 엘런의 바람에 의해 릭의 주위에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지 않았다.
쩌저적.
그러는 와중에도 조각들은 착실히 그의 몸을 얼려 가고 있었다.
점점 그의 팔 동작도 느려져 갔다.
이미 몸의 반은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렇게 반항해도 소용없다.”
엘런은 그런 릭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 역시도 정신력을 많이 소모했기에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안 돼! 이대로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그는 마지막 발악처럼 외쳐 댔다.
엎드려 있던 그의 눈에는 엘런의 발이 보였다.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라. 원래 한참 전에 죽을 목숨 하메론 덕분에 산 것이니까. 너를 구출한 대가가 내 동료들이었던 것은 문제였지만 말이야.”
엘런은 얼음 알갱이를 직접 조작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진즉에 완전히 얼어붙었어야 할 시간.
릭의 검붉은 마나는 이 상황에서도 극도의 한기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공격성이 짙은 검붉은 색 마나에도 불구하고, 릭의 몸은 이제 3분의 2가량 얼어붙었다.
이쯤 되니 그도 체념한 것인지 반항을 그만두었다.
“너는 정말로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그의 목소리는 이제 두 갈래로 나뉘어서 들리지 않았다.
원래 릭의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적어도 네놈은 이긴 것 같군. 하메론 그놈은 너 다음으로 처리해주지.”
“천만에, 그는 너 같은 조무래기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다. 그가 노리고 있는 것은 따로 있지.”
그 말에 엘런이 눈을 부릅떴다.
어쩌면 릭이 하메론의 진짜 목적에 대해서 알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다. 네놈에게 굳이 정보를 흘릴 필요도 없겠지.”
그렇게 말한 릭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의 몸은 완전히 얼어붙기 직전이었다.
스르르륵.
엘런이 얼음 알갱이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것들을 통제하고 있던 바람이 없어지니 그것들은 제각기 방향으로 흩어져 버렸다.
척.
엘런은 함께 얼어붙어 있던 릭의 마나 줄기를 잡았다.
“안 되겠다. 너는 제 발로 편히 죽을 기회를 내친 것이다.”
질질질.
엘런은 그 마나 줄기를 잡아끌고는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일단은 저것부터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