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202
202
결사의 이유
* * *
“쿠에에엑.”
“갸르륵.”
“쿠워어어어어.”
마지막으로 남았던 몬스터들이 얼어붙었다.
이로써 케롤 성 앞에는 몬스터들과 인간들의 시체, 그리고 살아 있는 인간들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곳에는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생존해 있지 않았다.
토드와 샤를리가 지원을 왔을 때만 해도 몬스터 군단은 좀처럼 쉽게 제압되지 않았다.
그만큼 녀석들의 숫자가 많기도 했거니와 하나하나의 위력이 일반적인 녀석들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한 개인의 힘으로 전황 자체를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뿐이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동부 대륙에는 단 한 명만으로 상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의미의 비대칭 전력이라는 호칭도 있지 않았던가.
그 비대칭 전력 중에서도 엘런은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친화력의 비약을 통해 그때보다 더 성장한 엘런은 지휘관 두 명의 지원과는 전혀 다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릭을 처리한 엘런은 가장 먼저 한센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들은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의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계까지 힘을 쓴 탓에 몸이 강제 휴면 상태에 들어간 것뿐이었다.
그 사실에 안심을 한 엘런은 곧바로 연합군과 몬스터들이 뒤섞인 전장에 뛰어들었다.
엘런의 예상과는 달리 연합군의 진영은 그렇게 많이 밀린 상황은 아니었다.
그들은 방패 벽이 모두 깨져 버린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사력을 다한 저항 덕분에 엘런은 몬스터들을 수습하기 훨씬 수월했다.
연합군 병사들이 떨어져 나간 팔 한쪽을 찾기보다 오크 하나라도 더 배려고 한 이유를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이 밀리면, 케롤 성뿐만이 아니다. 서부 대륙 전체가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이 그들을 죽음의 순간에서도 두 발을 딛고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리고 엘런의 지원 덕분이기는 했지만 결국, 그들은 살아남았고 또 승리했다.
“끝이다.”
마지막 오우거가 얼어붙는 순간, 한 병사의 입에서 탄식인지 환희인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연합군 모두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털썩.
병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는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체력 소모가 심했던 것이다.
오로지 정신력으로만 버티고 있었던 부작용이었다.
서부 대륙의 경우, 이렇게 병사들이 지쳐서 쓰러지면 회복 마법을 통해 그들의 체력을 회복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회복 마법을 사용해 줄 신관들마저 모두 탈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곤란한 상황이군.’
엘런이라고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십, 수백 정도의 병사들이라면 자신이 직접 마법을 이용해 성안으로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1만이 넘어가는 병사는 엘런이라도 힘들었다.
게다가 그 자신도 릭과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며 마나를 밑바닥까지 끌어 쓴 직후였다.
“어서 저들을 성 안으로 안내하라. 저들 모두가 토마르를 지켜 준 영웅들이다.”
케롤 성벽 위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엘런은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는 몰랐다.
그는 바로 토마르의 국왕 라뷔에였다.
그는 케롤 성 앞에서 포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장 성벽 위로 뛰어 올라왔다.
다른 나라의 국왕 같았으면 위기의 순간에서 성안으로 더욱 꼭꼭 숨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위험에 전면으로 나섰다.
그 역시도 연합군이 패한다면 자신이 숨어 봤자 소용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전황을 살피고 그들과 최후를 함께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성벽 위에서 모든 것을 보았다. 하나의 기계처럼 움직이는 병사들, 끔찍한 괴물들과 대치하고 있는 지휘관들을, 릭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 엘런, 그리고 몬스터들에게 죽어 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성문 앞을 버티고 선 생존자들…….
라뷔에는 그들에게 신관들을 내려 보냈다.
“괜찮으십니까?”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비록 그들은 수도 케롤 신전의 견습 신관들이었으나, 모두 기초적인 회복 마법은 사용할 줄 알았다.
그렇게라도 보충한 체력 덕에 그들은 몸을 움직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옷차림으로나 회복 마법의 효과 면에서나 유독 눈에 띄는 신관이 있었다.
“제가 귀한 인물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케롤 신전의 신관 타르나드는 엘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프루의 신관이 알고 싶다며 떠났던 청년이 설마 연합군의 총지휘관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잠깐, 진정 좀 하시오.”
엘런은 병사들처럼 바닥에 앉은 채로 있었다.
그는 타르나드의 호들갑에 지친 표정을 보였다.
“아, 일단은 치료부터 해야겠습니다.”
그는 엘런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드리안보다는 아니었지만, 제법 따뜻한 기운이 엘런의 몸을 감쌌다.
“그대 덕분에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것이기도 하오. 그대에게 먼저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소.”
“아닙니다. 제가 그때 더 잘 대해 드렸어 했는데 죄송할 따름입니다.”
타르나드는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연합군의 총지휘관이 될 자와의 인연을 만들지 못한 과거의 자신에 대해 아쉬워했다.
그것은 그가 엘런이 마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그럴 필요 없소, 그때 해 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으니.”
텁.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된 엘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병사들도 심각한 부상자들을 제외하고 움직일 수 있는 힘 정도는 찾은 모습이었다.
“일단 병력들을 재정비하시지요. 국왕 폐하께서도, 케롤 성의 주민들도 연합군의 입성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타르나드는 라뷔에의 전언을 엘런에게 전했다.
이로써 자신의 두 가지 임무 중 드디어 두 번째 것까지 완료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니?”
“폐하께서는 전투 개전부터 성곽에서 전황을 모두 살피고 계셨습니다. 저희를 이렇게 신속히 보낼 수 있었던 것도 폐하께서 직접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엘런은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케롤 성의 경비병들만 있을 뿐, 라뷔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성곽 위에서 외치던 그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으니, 아마도 이미 밑으로 내려가 그들을 반길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전우의 시신부터 수습한다. 그리고 병장기를 챙겨 도열하라. 이제 곧 케롤 성으로 입성한다.”
엘런의 명령에 병사들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에서는 평소와 같은 절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흐느적흐느적 움직이는 것이 깊은 슬픔에 빠진 자들 같았다.
평소의 엘런 같았으면 병사들의 태도를 지적했을 것이다.
사기야말로 전쟁에서 그들을 살리는 가장 큰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예외였다.
주변에 널려 있는 동료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다는 표현이 전혀 과장이 아니게 보일 만큼 많았다.
5만으로 시작해 고작 1만 남짓 남은 병사들이었다.
그마저도 생존자들 중 몸이 멀쩡한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살아남은 자신들의 감정보다 죽은 동료를 수습하는 일이 더욱 급했기 때문이었다.
엘런 역시도 조금은 가라앉은 분위기로 전장을 수습했다.
* * *
“성문을 열어라.”
근위대장의 명령에 케롤 성의 문지기들은 열심히 사슬을 잡아당겼다.
굵은 쇠사슬이 당겨지자 커다란 도르래가 돌아갔고 케롤 성의 성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쿵.
기이이이익.
영원히 굳게 닫혀 있을 것만 같았던 성벽이 모두 열렸다.
그리고 성 밖에는 1만의 병사들이 서 있었다.
갑옷 여기저기에 말라붙은 핏자국과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 초췌한 몰골, 성한 곳이 없는 몸뚱어리까지, 그들의 몰골은 영락없는 패잔병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토마르 왕국, 나아가 서부 대륙의 무사를 건 최후의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온 용사들이었다.
터덜터덜.
1만의 군사가 움직이는 발소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그들은 도저히 발을 완전히 들었다 놓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엘런의 기억에서 가장 의욕 없는 승전 입성이었을 것이다.
“케롤 성을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성문 옆으로는 수많은 케롤 성의 주민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연합군의 승전을 축하하고 케롤 성을 지켜준 것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그들의 진심 어린 감사에 병사들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제야 ‘보람’이라는 것이 조금은 찾아온 덕분이다.
“정말 수고 많았소.”
그때, 연합군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라뷔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폐하, 당치도 않습니다.”
엘런을 비롯해 연합군들은 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는 이곳 토마르 왕국의 국왕이었다.
아무리 병사들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는 해도 그의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이러지들 마시오.”
그러나 라뷔에 쪽에서 그런 그들을 보며 손사래를 쳤다.
“당장 일어나시오. 그대들은 나에게 무릎을 꿇을 게 아니오.”
그의 말에도 연합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누가 국왕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몸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신권(神權)이 왕권(王權)을 한참이나 초월한 이곳 서부 대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꾸벅.
그리고 그다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라뷔에가 연합군을 향해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엘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주위에 있던 케롤 성 주민들 역시도 엘런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신의 대리인인 교황이 아니라면, 국왕이 고개를 숙이는 일은 역사적으로도 절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유례없던 일을 바로 라뷔에가 해 버린 것이다.
“폐, 폐하, 이것이 무슨…….”
라뷔에의 옆에 있던 신하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저들은 잔뜩 굶주린 몬스터들로부터 목숨을 걸고 토마르 왕국을 수호해 준 은인들이다. 나 라뷔에는 토마르 왕국의 모든 국민들을 대표하여 은인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니, 경들은 그리 알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라뷔에의 말에 옆에 있던 신하들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고개도 라뷔에가 아닌 연합군을 향해 있었다.
“은인들이여, 무릎을 꿇을 자는 그대들이 아니라 바로 나요. 사력을 다해 토마르 왕국을 지켜 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오.”
그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그 모습에 병사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를 인정해 주는 건가? 그것도 국왕 폐하께서?’
‘폐하께서 나에게 감사하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머릿속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사실 전투가 끝난 후, 자신들이 싸우는 이유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다.
전투 중에는 이곳이 밀리면 서부 대륙이 위험해지고 나아가 자신의 주변이 위험해진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생각으로 사력을 다해 버티고 나니 남은 것은 전우들의 시체밖에 없었다.
그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런 자신들 덕에 살아남았다는 주민들이 감사를 전해 왔다.
아름다운 케롤의 전경도 보였다.
그리고 국왕은 자신들이 은인이라며 고개까지 숙였다.
그러자 그들의 상실감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주륵.
개중에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병사도 있었다.
자신들은 역사 속 커다란 전쟁의 병력 수나 사상자 수 정도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은 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은인으로서 남게 된 것이다.
“그대들 모두가 토마르 왕국, 아니, 서부 대륙의 영웅들이오. 나는 영웅들의 승전과 입성을 환영하오. 극진히 대우하도록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