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204
204
이관 (2)
에레네의 축복을 받고 마귀와의 대전(大戰)에서 선봉에 섰던 성인(聖人) 키에아스.
그는 인간임에도 천사들보다 더 강인했으며, 마귀들은 그를 보기만 해도 달아나기 일쑤였다고 전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고, 그가 가지고 다니던 물건들은 그의 상징이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훗날, 교황의 명령으로 왕권의 상징이 된 키에아스의 성유물.
그 상징성 때문에 성유물은 정식으로 후계자 지명을 받은 왕자가 아니라면, 설령 왕족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볼 수 없었다.
토마르 왕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성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방에 왕족은 물론이고 토마르 왕국의 국민도 아닌 엘런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물의 수호자가 폐하를 뵙습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라뷔에가 등장에도 성물의 수호자는 전혀 흔들림 없이 그들을 맞이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성물의 수호자는 성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제단을 지키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한 번 수호자가 되면 죽을 때까지 홀로 제단 앞을 지키게 된다.
평생 자신의 삶을 살 수가 없다는 의미였다.
세상에 대한 모든 욕심을 버리고 오로지 신앙심만으로 이곳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이다.
“래리, 그대에게 잠깐의 휴가를 줄까 한다.”
라뷔에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제가 감히 말의 뜻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키에아스의 망토를 당분간 에레네스에 둘 예정이네. 그러니 그대도 이곳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어지게 되겠지. 그동안 고생했으니 잠깐 쉰다고 생각하게나.”
“알겠습니다.”
그는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엘런이 느끼기에 그의 감정은 어떠한 물결도 없는 커다란 호수 같았다.
“그럼 문을 열어 주겠나?”
“예.”
철컥.
명색이 성유물을 보관하고 있다는 제단의 열쇠치고는 큰 특징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엘런의 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열쇠에는 미세한 홈들이 촘촘하게 나 있었다.
현 기술은 물론이거니와 엘런이 살았던 시대의 기술로도 저런 열쇠는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복제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열쇠가 들어가자 문 안쪽에서는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의 문은 이 열쇠가 아니면 도저히 열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끼이익.
마침내 문이 열렸다.
가장 최근에 열린 것조차도 오래전인 것일까.
경칩에 기름기가 없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럼 저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래리의 역할은 바로 문을 열어 주는 것까지였다.
아무리 성물의 수호자라 해도 성유물이 있는 제단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라뷔에밖에 없었다. 물론, 이번 경우에는 엘런이라는 예외가 있기는 했다.
끼이익.
쿵.
그들이 제단으로 들어가자 래리가 문을 닫아 주었다.
문이 닫히면서 빛이 차단되었다.
창문도 하나 없는 탓에 잠깐 동안 방 안은 완전한 어둠으로 휩싸였다.
파앗.
그것도 잠시 방 안에 있던 불빛들이 동시에 켜졌다.
엘런도 마법을 사용해서 이런 불빛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신성력을 이용한 불빛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마법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마법이 그저 빛을 내는 용도라고 한다면, 이것은 방 자체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 같은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이오.”
엘런이 불빛에 보며 잠깐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라뷔에가 그를 불렀다.
그는 방 한가운데 솟아 있는 제단에 서 있었다.
“이것이……?”
그의 옆에 선 엘런은 잠시 동안 넋이 나간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키에아스의 망토.
사실은 망토라 부르기에도 너무나 허름했다.
거짓말을 살짝 보태자면 거지들이 구걸을 할 때나 쓸 것 같은 거적데기라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그러나 엘런은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낡은 천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은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신비함 이상의 이끌림.
이 이끌림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성스러움 앞에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았다.
“이것이 토마르의 성유물, 키에아스의 망토요. 외부인에게 공개하는 것은 그대가 처음인 것 같군.”
라뷔에도 엘런만큼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망토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망토는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질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성유물이라는 표현이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도 아바마마께서 처음으로 이것을 보여 줬을 때, 똑같은 생각을 했었소. 그 후, 이 망토가 곧 토마르 왕국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갔다오.”
라뷔에는 자신의 품속에서 열쇠를 꺼냈다.
조금 전, 래리가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열쇠였다.
“그리고 이제는 이걸 옮겨야만 하겠군.”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그 열쇠를 열쇠 구멍 안에 집어넣었다.
철컥.
끼릭끼릭.
열쇠가 꽂히자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크기는 이 방의 문보다 작았지만, 안에 들어 있는 장치의 수는 훨씬 많은 것 같았다.
곧이어 망토 주변에 쳐져 있던 반투명한 막이 사라졌다.
망토의 후광을 직접적으로 본 엘런은 눈부심을 느꼈다.
라뷔에는 미리 들고 왔던 함을 꺼냈다.
이것은 성유물을 담기 위해 특수하게 제작된 함이었다.
그는 이곳에 망토를 넣어 에레네스로 이관할 예정이었다.
스륵.
라뷔에가 망토를 접어서 함에 넣었다.
그 손짓 하나하나에 정성이 가득했다.
그 행동에서 그가 이 망토에 대해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 있소. 키에아스의 망토를 부디 잘 지켜 주시오.”
마침내 라뷔에는 엘런에게 함을 건넸다.
그것을 건네는 라뷔에의 표정에는 정말 많은 생각들이 담겨 있었다.
에레네스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던 희망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왕권의 상징인 키에아스의 망토를 에레네스에게 넘기게 되면, 토마르 왕국은 에레네스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이 국왕 취임 때부터 계획해 온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것은 물론이며, 그때보다 오히려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키에아스의 망토는 건국 때부터 국왕에게 내려져 온 선대 왕들의 유품이다.
이것을 자신의 대에서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잠시 에레네스로 옮겨놓는 것이 더 실리적인 선택이다.
무엇보다 백성들에게 평화를 선사해 줄 의무, 그것이 라뷔에가 이관을 선택하게 한 가장 주요한 이유였다.
모든 성유물이 그자에게 넘어간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엘런에게 들었다.
그랬기에 그는 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훗날, 백성들은 폐하의 결단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알고 있었던 엘런도 그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지잉.
그리고 엘런이 함을 받아드는 순간, 알 수 없는 울림이 그의 팔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한 차례의 짧은 울림이었지만, 엘런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함이라기보다는…… 안에 있는 망토인가?’
울림은 함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망토에서 전해졌었다.
“어찌 그러시오?”
라뷔에가 함을 받아 든 상태로 가만히 있는 엘런을 이상해했다.
아무래도 그는 망토의 변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아, 아닙니다. 귀한 것이라고 하니 잠깐 넋이 나갔던 것 같습니다.”
엘런은 본인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렸다.
원래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기에 그 한 번의 울림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럼, 잘 부탁하네.”
“맡겨만 주십시오, 폐하.”
* * *
에레네스로 떠나는 화물 운송대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다.
엘런을 필두로 한센과 판톤, 그리고 에레네스 신관, 크루세이더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운송대의 숫자가 작기는 해도 이들의 실력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연합군에서 실력으로 위에서부터 사람을 뽑으라면 나올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토드나 샤를리, 아드리안과 같이 지휘관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나머지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기 바빴다.
연합군의 일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첫 번째 목표이던 릭을 잡았고 몬스터와의 대규모 전투도 끝이 났다.
게다가 브룩이나 크트론 왕국의 경우에는 성유물이 도난당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아드리안은 스티어드 왕국에 성과를 보고하러 가기 위해, 토드와 샤를리는 성유물의 도난을 조사하기 위해 자신들의 왕국으로 복귀한 것이다.
마법사인 엘런과 마법을 인정하지 않는 신관과 크루세이더들의 동행.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게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만큼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간 엘런이 보여 주었던 무위나 지략은 그들의 의심을 존경으로 바꾸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동을 하는 줄곧 엘런에게 이것저것에 대해 질문했다.
특히 동부 대륙에 대한 것이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러나 한센만큼은 조금 달랐다.
그는 운송을 시작한 이래 업무적인 대화를 제외하고는 엘런과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스탱 성에서 함께 올 때만 하더라도 간간이 대화를 나누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 확연히 달라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말한 일시적인 협력이 이제 끝이 났군.’
에레네스가 연합군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마법사 엘런에 대한 일시적인 협력.
원칙적으로는 릭이 사로잡히거나 죽는 순간까지였으므로, 지금은 그것이 끝난 시점이기는 했다.
이후의 협력에 대해서는 이번에 에레네스에서 교황과 새로 협상해야 한다.
‘그래서 원래 나를 보던 시선으로 돌아간 것이었나?’
지금 한센은 처음 그가 엘런을 쫓았을 때, 그때의 눈빛이었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확 바뀌어 버리니 마음 한구석에서 섭섭함이 일어나기는 했다.
‘그래도 저자가 이프루로 돌아가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긴장은 해야겠어.’
그와 싸워 이길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토마르의 성유물을 이관하는 중이었다.
최대한 서로 불편한 상황을 연출하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저기 이프루 성이 보이는군.”
한센이 정면에 보이는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그곳에는 에레네스의 수도 이프루 성이 보였다.
“드디어…….”
신관과 크루세이더들도 이프루가 보이자 감격에 젖었다.
지금껏 그들의 인생에서 이토록 길고 험난했던 원정은 없었다.
이프루 성을 보자 그 모든 감정이 한 번에 북받쳐 오르는 것 같았다.
“에레네의 가호가 함께하길. 수고 많으셨습니다.”
운송대를 발견한 경비병들이 얼른 달려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경비병들도 그들이 얼마나 큰 전투를 치르고 왔는지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특히, 한센에게서 멈춘 시선은 좀처럼 다른 곳으로 옮겨지려 하지 않았다.
한센이 오우거를 잡았다는 소문이 벌써 이곳까지 와 버린 탓이었다.
에레네의 검이자 오우거 슬레이어인 한센을 보니 병사의 시선이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가 없었다.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교황님께서 기다리고 계시겠다는 말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교황청 측에서 미리 연락을 받은 상태였기에 뒤에 있는 수레를 확인한다거나 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극비리에 실행되고 있는 이관인 만큼 보안은 중요했다.
그들은 경비병들을 안내에 따라 이프루 성으로 진입했다.
“드디어 이프루 성에 돌아왔어.”
한 신관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엘런이나 판톤을 제외한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기에 그에게 핀잔을 주는 일은 없었다.
“성전의 용사들, 수고 많았네.”
“나는 그대들이 정말로 자랑스럽소.”
이프루 성안에도 그들을 맞이하는 인물이 있었다.
“도란 경, 바몬 경, 오랜만이오.”
엘런은 그들을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