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218
218
하메론과의 만남 (2)
하메론의 뒤에서 나타난 것은 동심원 모양으로 생긴 조형물이었다.
귀족들이 무기나 방어구를 거치하는 거치대와 비슷한 형태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빼앗겼던 키에아스의 성유물들이 있었다.
-실로 강대한 기운이다.
프로뱅의 말대로였다.
지금까지 엘런은 이 정도로 강한 기운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그의 몸을 녹여 버릴 것만 같았다.
마치 태양을 직면하는 느낌이었다.
“엘런, 이제 준비가 끝났어. 그리고 넌 나를 막지 못했고.”
하메론이 몬스터 대군을 사용하면서까지 시간을 끌려고 했던 목적.
그것이 바로 그의 뒤에 있는 저 조형물 때문이었던 것이다.
“내가 널 유인하려고 그 조사대원 놈들한테 이곳을 노출한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엘런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하메론은 자신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이곳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엘런을 잡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 갑자기 네가 8서클이 되어 버린 거야. 그것도 텔레포트까지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8서클의 마법사 말이야. 이건 내가 본 장면에는 없었던 것이거든.”
엘런은 그 말에서 뒤편에 있는 성유물조차 잠깐 잊을 정도로 이질감을 느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어떻게 할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역시 ‘그’와 관련된 물건 때문이려나. 그건 나에게도 읽히지 않는 걸까?”
엘런의 오른쪽 팔목을 바라본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전부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는군.”
“그렇게 들렸어? 나는 그저 너의 행동을 예상했을 뿐이야. 곡해하지 말라고.”
그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해 댔다.
그러는 와중에도 엘런은 뒤편에 있는 성유물에 신경이 쓰였다.
그곳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끌림과 동시에 위기감이 느껴졌다.
“아, 너 저게 신경 쓰이는구나.”
그의 눈빛을 알아차린 하메론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하메론의 언행에 엘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네가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너무 일찍 이곳에 오는 바람에 아직 준비가 덜 됐던 것이거든. 네가 이곳에 온 것을 알고 그때부터 부랴부랴 마무리했는데 다행히 잘된 것 같아.“
지금 엘런의 속내는 매우 복잡했다.
저것을 바로 공격해야 할지, 아니면 계속 그를 떠봐야 할지 많은 계산이 오고 갔다.
아직은 저 물건의 정체며 그의 의도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릭 때처럼 성유물의 힘을 추출하는 기계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저것이 발동되기 전에 부숴 버려야 해.’
그러다 엘런은 판단을 내렸다.
이 판단을 내리기까지는 불과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엘런이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슥.
엘런보다 먼저 움직인 것은 하메론이었다.
그는 자신의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엘런은 그 행동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 후, 엘런은 자신이 먼저 움직이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우웅.
무엇인가 공명共鳴하는 소리.
처음에는 알아차리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그 크기는 점점 커져만 가다가 종국에는 귀가 찢어질 것 같이 큰 소리로 들렸다.
“으윽.”
엘런은 두 귀를 막으며 소리를 차단하려고 했지만, 그 음파는 귀를 막고 있는 손 따위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듯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머리가 흔들리는 고통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우웅.
하메론의 뒤쪽에서는 조형물이 매우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엘런을 무릎 꿇게 한 음파도 이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메론의 팔이 있었다.
회전하고 있는 물체를 자세히 보면 그것은 키에아스의 성유물이었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세 가지의 성유물에서는 백색의 신성력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하메론의 팔로 흘러 들어갔다.
“네가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생각보다 빨리 이곳을 찾아왔지만, 다행히 나는 네가 오기 전 준비를 마쳤다. 아쉽겠어. 조금만 빨리 왔다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몰랐을 텐데.”
그의 목소리는 두 갈래로 나뉘어서 들렸다.
그것은 릭이 보여 줬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저게 저놈이 강해지는 방법이었군.
프로뱅의 말대로 하메론의 기운이 점점 강대해져 갔다.
직전까지는 하메론의 뒤에서 느껴지던 강대한 기운이 이제 그에게서 직접 느껴졌다.
‘힘이 흡수되고 있구나.’
성유물에서 흘러나온 신성력이 곧 하메론의 마나가 되어 가고 있던 것이다.
분명 신성력과 마나는 전혀 다른 능력이었지만, 하메론은 그런 것은 무시해 버리기라도 하는 듯 신성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크헉.”
반면, 엘런은 하메론이 신성력을 흡수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성유물이 회전하면서 나는 소리가 그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네 녀석이 나를 잡는다고 떠벌리는 게 얼마나 어이없게 느껴졌는지 알겠냐? 너는 그곳에서 무릎 꿇고 나를 올려다보아라, 그것이 딱 네 위치니까.”
하메론의 목소리는 릭 때처럼 극저주파의 영역과 극고주파의 영역으로 나누어져서 들렸다.
엘런은 그 목소리에 완전히 짓눌린 것처럼 몸을 굽혔다.
“크, 크흑.”
엘런은 거기에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마치 강철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몸을 웅크린 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입 밖으로 신음을 흘려 내는 것뿐이었다.
“에잇!”
퍼억.
그런 엘런의 모습을 바라보던 하메론은 갑자기 그에게 발길질을 가했다.
복부를 가격당한 엘런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그 하찮은 실력으로 내 계획을 휘젓고 다닌다니. 정말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겠어. 네 녀석의 정신부터 산산조각 내주지.”
이제 성유물의 힘은 모두 하메론에게 흡수당했다.
그랬기에 성유물의 회전에서 나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성유물 대신 그의 외침이 있었다.
귀를 타고 들어와 뇌까지 울리는 그의 목소리.
그것은 엘런의 정신을 더욱 무너뜨렸다.
점점 엘런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어져 갔다.
그는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해 보고 하메론의 공격에 당하고 있었다.
“제정신을 유지할 생각은 말아라. 공포 속에서 발버둥이나 치게 될 것이다.”
탁.
그 말과 함께 엘런의 정신은 완전히 끊겨 버렸다.
의식이 멀어지는 과정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엘런의 몸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 * *
어둠. 바로 옆이 보이지도 않았고, 이곳이 위인지 아래인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도 구분되지 않는 그런 어둠이었다.
엘런은 그 속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이건 뭐지?’
그는 자신이 눈을 떴다는 것도 인식할 수 없었다.
눈을 감아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인지 눈을 떴음에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은 시각만이 차단된 것이 아니라 청각, 촉각 등 모든 감각이 차단되어 있었다.
모든 소리가 차단된 방에 인간이 있게 되면, 그 사람은 금방 미쳐 버린다는 말이 있다.
덜덜덜.
엘런은 지금 그 낭설이 사실이었음을 체험하고 있었다.
완전히 소리가 차단된 공간, 거기서 극도의 불안 증세가 찾아온 것이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모든 근육이 덜덜 떨려 왔다.
“바닥을 기고 있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구나.”
그때 하메론의 목소리가 어둠 속의 공간에서 들려왔다.
엘런은 심지어 그 ‘소리’가 반갑기까지 했다.
“이제부터 더한 고통을 선사해 주지. 거기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기는 힘들 거야.”
하지만 그 반가움도 아주 잠깐이었다.
샤샥.
그런 엘런의 눈앞에 네모난 창들이 나타났다.
그 창 안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창 속의 사람들은 저마다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나는 산적들에게 마을이 약탈당하는 모습이었다.
마을 곳곳은 불타고 있었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산적들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또 다른 창에서는 역병이 퍼져 사람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 병은 엘런을 모함하기 위해 체들턴 가문이 만들어 낸 역병이었다.
마지막으로는 부모를 잃고 슬퍼하고 있는 형제의 모습이 보였다.
그 묘비명 앞에 쓰여 있는 이름은 오리에.
그것은 연합군의 케롤 방어전에서 전사한 지휘관의 이름이었다.
그 비참한 삶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직간접적으로 엘런 때문에 일어난 일들에 고통받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마음이 안 좋지만 어쩔 수 없다며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같이 정신이 약해진 상황에서는 그 모습 하나하나가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것이 자신의 불안 증세 때문인지 아니면 하메론의 술수인지는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의 내지르는 비명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엘런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모든 장면이 소리까지 포함해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신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너만 가만히 있었더라면.’
‘원래 분수에 맞게 마법 보조사로 살아갔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이기적인 새끼, 너 하나 잘되겠다고 과거로 돌아와 이 지경을 만들어 놓았구나.’
그들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렇게라도 합리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눈을 감아 버리려 했다.
아예 그 창을 보지 않는 것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을 감는 것조차도 엘런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분명히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보이는 창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비극적인 모습을 계속해서 재생했다.
‘으으으.’
무릎을 꿇고 있던 엘런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그의 표정은 이미 실성한 사람의 것과 비슷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나 때문이 아니야.’
엘런은 그렇게 말했다. 아니,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만 벙긋거릴 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사실이 엘런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이대로 30분만 있으면, 곧 폐인이 될 것만 같았다.
-……차려라.
-엘런, ……차리라고!
엘런은 정신이 완전히 나가 버리기 직전이었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붙들었다.
하메론의 말 이후로 이 공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엘런은 정신적인 충격을 많이 받아서였을까.
목소리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때, 엘런의 두 눈이 번뜩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리라고, 이 새끼야!
거친 욕설이 담겨 있는 외침이었다.
“스, 스승님?“
엘런은 그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한 것처럼 눈을 번쩍 떴다.
그곳은 그가 있던 그 어둠의 공간이 아니었다.
지금껏 초점이 없어진 채 감겨 있던 엘런의 눈이 떠진 것이다.
그리고 입에서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목소리의 주인이 흘러나왔다.
눈앞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바닥이었다.
엘런은 자신이 바닥에 쓰러져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하메론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거기서 빠져나왔다고?”
하메론은 이제 두 갈래의 목소리가 아닌 원래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정말 기분 나쁜 짓을 했군.”
엘런도 몸을 일으켰다.
아직 중심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러고는 소매를 훔쳐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 냈다.
“너는 진짜 내가 가만 안 둔다.”
그 말과 함께 엘런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