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223
223
반등 (3)
“너도 천마 전쟁天魔戰爭에 들어봐서 알고 있겠지?”
나이가 지긋한 시종장의 얼굴에서 장난기 많은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릴 때면, 얼핏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엘런의 앞에서 말하고 있는 이가 이 세계의 조물주인 에레네라는 것을 안다면, 보통사람의 경우 행여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느라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못했을 것이다.
“에레네교 성서에 나오는 그 천마 전쟁 말인가?”
그리고 이처럼 에레네에게 친구 대하듯이 말하는 엘런을 보고는 더욱 까무러쳤을지도 모른다.
엘런도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하메론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는 말의 높낮이는 이미 차치해 버렸다.
“천마 전쟁은 마족이 중간계를 침공하면서 일어나게 된 거야. 그들은 내가 세상을 창조하고 난 잔여물들에서 태어난 족속들이지. 그렇기에 내 인과율 밖에 존재하는 족속들이기도 해. 그들 중 수장이 누구인 줄 알고 있지?”
“마왕魔王.”
세계 창조의 뒷이야기까지 듣고 있는 엘런은 정보 처리에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정보들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의 이야기를 억지로 밀어 넣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이 모든 정보가 하메론을 이길 단서가 될 수 있었다.
‘그 녀석에게 갚아 줘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지금까지는 두려움 탓에 피하고 있었지만, 이자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제 엘런의 인지력은 하메론과 전투 준비로 완전히 투입되고 있었다.
“잘 알고 있네. 그 마왕의 현신이 바로 하메론이야. 천마 전쟁 당시 내 인과율 실타래 중 일부를 훔쳐 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자이기도 하고.”
엘런의 눈이 반짝였다.
하메론이 마왕의 현신이다, 이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가능성이었다.
아니, 엘런은 애당초 마왕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믿지도 않았다.
“신의 말이라서 그런가 말하는 내용이 전부 놀라움의 연속이군.”
그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에 그저 감탄만 하고 있다면, 에레네와의 보이지 않는 알력 다툼에서 밀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하메론은 적어도 미래에 관해서는 모든 신의 권능을 가졌단 의미잖아?”
“그런 건 아니야. 인과율의 실타래를 가져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에 불과해. 중간계의 미래 정도를 볼 수 있을 거야. 즉, 타 차원의 존재가 개입된 미래는 쉽게 들여다보지 못하겠지.”
엘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메론이 마지막 손길을 쳐다보며 했던 말이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그는 이 팔찌 덕에 텔레포트를 포함한 8서클의 마법을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하메론이 본 미래에서는 자신이 8서클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도 잘만 이용하면 좋은 무기로 사용될 수도 있겠어.’
그가 원했던 정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하메론이 마왕이라는 것도 알겠고, 그가 중간계를 침공하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나를 이용해 그와 전투를 벌이게 하려는 것이지? 천마 전쟁 때처럼 직접 내려와 그들과 싸울 수도 있지 않나?”
엘런으로서는 충분히 의심스러울 수 있는 점이었다.
세상에 아무런 대가가 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었다.
창조주라 하더라도 그가 원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답변을 얻을 수는 없었다.
“잠깐, 더는 이야기해 주기가 어려울 것 같다.”
갑자기 에레네의 표정이 심각하게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어딘가 다급해 보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둘 다 모든 인과율을 알고 있는 신이 지을 표정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그 녀석이 빨리 움직이고 있어. 내가 숨어 있는 곳도 찾아낸 것 같군.”
“하메론이 너를 찾고 있다는 말인가?”
하메론은 신까지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과 필적한 자를 어떻게 이겨야 할까. 엘런의 머릿속도 덩달아 복잡해졌다.
“나는 천마 전쟁 당시 힘의 대부분을 잃었다. 반면, 하메론은 나의 물건들까지 이용해 훨씬 더 강해졌지. 처음에는 키에아스의 물건부터 시작하더니 이제는 거의 모든 물건을 가져갔다. 그는 이제 나를 소멸시키고 자신이 신이 되려 한다.”
치지직.
에레네의 사념체가 들어 있던 시종의 입에서 잡음이 섞여 나왔다.
그와 동시에 점점 에레네의 목소리가 멀어지게 들렸다.
그것은 사념체와의 연결이 약해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너에게 원시 마법을 가르치려 하는 것은 사실 나를 도와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치지지직.
잡음이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엘런은 에레네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신이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창조주 에레네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무리 그가 약해졌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어떤 인간이, 아니, 모든 차원에서 어떤 존재가 신으로부터 도움을 부탁받는단 말인가.
“일단은 자리를 피해야겠다. 며칠 안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도록 하지. 그때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해 줄 수 없다.”
에레네의 원래 목적을 엘런의 질문이 방해했던 것이다.
그도 하메론이 자신을 이토록 빨리 찾아올 줄 몰랐기에 거기에 상세히 답변해 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다음에 엘런을 찾아온다면, 그때는 확실히 원시 마법을 전수해 줘야만 했다.
치직, 뚝.
무엇인가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시종장의 고개가 뚝 떨어졌다.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 이곳은?”
그는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은 것 같았다.
주변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던 그는 바로 앞에 있는 엘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제, 제, 제가 어찌 이곳에…….”
덜컹.
그는 에레네일 당시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엘런을 향해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편히 쉬, 쉬, 쉬십시오.”
시종장은 헐레벌떡 엘런의 병실을 빠져나갔다.
엘런은 시종장이 한 일련의 행동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에레네와 하메론, 그리고 원시 마법에 쏠려 있었다.
스윽.
엘런은 비미산에서 돌아온 후, 처음으로 자신의 로브를 꺼내 입었다.
검푸른색 침묵의 로브에는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엘런은 침묵의 로브에 걸려 있는 자동 세척 기능을 사용했다.
그러자 로브에 쌓여 있던 먼지가 한 톨도 남김없이 전부 사라졌다.
‘이제야 내 로브 같네. 미러.’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나타났다.
로브를 입은 모습이 어쩐지 어색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한 건 따로 있었다.
‘몰골이 정말 말이 아니었군.’
면도를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며칠 간격으로 하느라 수염이 잡초처럼 듬성듬성 나 있었다.
얼굴이 꾀죄죄한 것이 로브만 없었다면, 거지로 몰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클린.’
하지만 엘런은 마법사였다.
이 몰골을 정리하는 데는 말 한마디면 가능했다.
‘이 정도면 알현할 준비 정도는 됐겠지?’
몸단장을 마친 엘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똑똑똑.
그때, 엘런의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레네가 들어간 시종장과는 달리 아주 공손한 태도의 노크 소리였다.
“엘런 님, 들어가겠습니다.”
이미 하녀들 사이에서는 엘런의 병실은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으니 그냥 들어가면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말을 굳게 믿고 문을 열었던 하녀는 하마터면 자신이 가지고 온 물통을 놓칠 뻔했다.
“고생이 많네. 물통은 거기다 둬도 괜찮네. 내가 직접 옮기지.”
“예, 예…….”
갑자기 멀끔해진 엘런을 보고 하녀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엘런은 초대 상아탑주이자 최연소 8서클 마법사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혹시 폐하께 내가 알현을 청한다고 전해 줄 수 있겠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녀는 얼른 뒤로 돌아서 복도로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엘런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는 슬픈 빛도 감돌았다.
‘스승님, 당신에 대한 복수는 제가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 * *
엘런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단 소식은 그가 원정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소란을 가지고 왔다.
“드디어, 상아탑주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군.”
“지금까지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이오?”
“듣기로는 이번 원정에서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하던데. 나도 자세한 것까지는 모르겠소.”
“주변국에서도 슬슬 움직이려고 할 때였는데 잘된 일이 아니겠소?”
왕궁 안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자신들에게 닥친 위험을 알 리가 없는 그들은 하마터면 8서클의 마법사를 잃을 뻔했다며 안도하기 바빴다.
엘런은 굳이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 중 일부라도 흘러 나갔다가는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의 평화가 더 나았다.
‘하지만 적어도 한 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엘런은 대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원정을 다녀온 후,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알베르토를 보게 된 것이다.
“드디어 기운을 차렸군. 프로드 국민 전체가 탑주의 건강을 걱정하였소.”
알베르토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국이 제대로 움직이기 전에 엘런이 스스로 기운을 차려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다시 기운 차려서 정말 다행이오.”
옆에 앉아 있던 로미우는 진심으로 그의 안위를 걱정했었다.
그래도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폐하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보시다시피 소신은 완전히 회복하였습니다.”
“그래, 정말 고생하였소. 원정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듀크 경에게 전달받았소. 다만, 동굴 안에서 있었던 일은 탑주만 알고 있다고 하더군.”
그의 질문에 엘런은 잠시 숨을 골랐다. 대전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혹시, 그 안에서의 일은 제가 폐하에게 개인적으로 보고 드려도 되겠나이까?”
알베르토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답변이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을 보니 사안이 꽤 심각해 보였다.
“다들 물러나도록 하라. 오늘 정기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다.”
그의 명이 떨어지자 신하들은 신속히 대전을 빠져나갔다.
개중에는 엘런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도 있었지만, 왕의 말을 거역하고 그곳에 앉아 있을 위인은 없었다.
이제 대전에는 알베르토와 로미우 그리고 엘런만 남아 있게 되었다.
“이제 말해 보아라. 그대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온 것인가?”
사석이 된 만큼 알베르토의 말투도 평상시처럼 돌아왔다.
“저는 동굴 안에서 하메론을 만났습니다. 폐하께서도 예상하셨다시피 무참히 패배하고 왔습니다.”
“아…….”
로미우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엘런이 패배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야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마지막으로 싸웠을 때보다 더 강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가 위험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지금 그대가 일어난 것을 기뻐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군.”
예상대로 알베르토는 그 말에 펄쩍 뛰었다.
국가와 국민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그에게 이보다 더한 위협은 없었다.
“프로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모인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을 몰살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들로서는 엘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자를 어떻게 인간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계획은 있는가? 그대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 않는가? 그리고 그보다 더 강해졌을 거라니…….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데 솟아날 구멍도 없구나.”
“저도 그것이 두려워 지금껏 침대에 누워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엘런은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무책임한 태도를 사죄하는 의미였다.
“아니다. 내가 그대의 부담감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엘런, 우리는 네가 그를 이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너를 원망하지 않을 거야.”
“후후.”
그들의 반응에 엘런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느낌도 들었다.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다시는 그가 두려워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그것은 알베르토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선언이기도 했다.
“그래,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나는 그대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겠다.”
알베르토도 그의 의지를 온전히 전달받았다.
그가 아니면 그런 괴물을 누가 잡을 수 있겠는가.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