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233
233
정령왕과의 계약 (2)
“정령왕이라고 ”
“그렇습니다.”
세계수의 말에 엘런은 흔들리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이 정령계와 정령들의 책임자가 아닙니까 ”
“정령들이 내 아이이기는 하지. 그런데 그들과 계약하고 싶다면 나를 왜 찾아왔지 보아하니 너는 정령계도 들락날락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
세계수의 말대로였다.
엘런은 친화력의 비약을 통해 정령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예전에는 재료를 구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지금의 엘런에게는 아무런 제약 조건도 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이곳에 오기 전에 정령계를 한 번 들르기도 했다.
그러나 정령계에 들어가는 것과 정령왕들과 계약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의미였다.
“한 개체당 하나의 정령만 계약할 수 있다는 조건, 그건 당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엘프든 인간이든 아니면 또 다른 종족이든 간에 한 개체 당 계약이 가능한 정령의 수는 하나였다.
그 정령이 성장하면 힘이 강해지는 것이지, 절대 그 외에 다른 정령과는 계약을 맺을 수 없었다.
이시르의 경우에는 정령계에 속한 정령이 아니기 때문에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정령계에 속해 있는 정령.
엘런은 다른 정령왕들과 계약을 할 수 없었다.
“흐음, 그걸 풀어 달란 말이군.”
세계수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의 정말 심각한 사태입니다. 하메론을 상대하는 동안만이라도 안 되겠습니까 아니면 당신도 어찌할 수 없는 제약이 있는 것입니까 ”
엘런은 힘이 간절했다.
원시 마법을 배운 그였지만, 하메론은 창조주 에레네조차 어찌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원시 마법만으로 엘런이 상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훨씬 더 강력한 힘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본체의 힘은 하나하나가 9서클 마법사 이상인 정령왕들이 가장 알맞은 선택지였다.
“꼭 그런 건 아니다. 나도 단순히 한 녀석이 여러 명의 정령과 계약을 맺는 것이 싫어서 만들어 놓은 규칙이니까.”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엘런을 가리켰다.
“내가 걱정하는 건 바로 너다. 너 지금 정령왕의 본체를 그대로 소환해 내려고 하고 있지 ”
세계수의 통찰은 테오스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었다.
그는 엘런의 생각을 그대로 읽어 냈다.
세계수도 인과율의 실타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렇습니다. 정령왕의 본체가 아니라면 그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일 테니까요.”
“그거, 네 몸이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나 내가 한 개체 당 한 정령으로 제약을 둔 것은 정령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정령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정령왕의 본체를 그대로 중간계에 소환해 낸 정령사는 없었다.
정령과는 떼놓을 수 없는 엘프.
그 엘프의 로드조차도 정령왕 본신의 절반만 소환해 내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것만으로도 그토록 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인데, 본체가 소환되면 얼마나 큰 전력이 되어 줄 수 있겠는가.
“소환에 따른 영적 부담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개체들보다는 훨씬 큰 그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런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열망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것이 아니라면 절대 방법이 없다는 듯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설령 몸이 부서진다고 하더라도 그놈은 잡아야겠습니다.”
강력한 의지가 담긴 말.
엘런이 원시 마법을 배워서일까.
그의 말에 주변의 마나들이 반응했다.
주인의 의지를 그대로 실현시키기라도 하겠다며 움직이고 있었다.
‘이 녀석…….’
이곳은 세계수의 공간이었다.
여기에 있는 마나 역시도 세계수의 안에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마나 하트의 내부와도 같다.
그런데 저 인간의 말 한마디로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마나가 이토록 격동하고 있었다.
‘이놈도 괴물이었군. 에레네, 처음에는 당신의 안목을 조금 얕잡아봤었는데, 인제 보니 정말로 엄청난 녀석을 찾아냈어.’
세계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폭주하고 있는 하메론을 막을 만한 자가 누가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아니, 내가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하겠군.”
쿵.
세계수가 발을 한 번 굴렀다.
그러자 세상이 한순간에 변했다.
“이곳은 ”
지금까지는 상하좌우를 구분할 수 없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의 발이 똑똑히 땅을 딛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갈색의 바닥과 끝없이 올라가는 계단, 그리고 벽면에 빼곡히 적혀 있는 고대어.
엘런이 처음 세계수 안으로 들어왔을 때 보았던 그곳이었다.
“이곳은 정령계와 가장 가까운 나의 본체 안이다. 여기서 정령을 소환하는 게 가장 좋겠지. 소환진은 내가 그려 주마.”
휘릭.
페리스 때처럼 일일이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손을 한번 휘젓자 정령을 소환할 때 쓰는 복잡한 소환진이 한 번에 그려졌다.
엘런은 제피로스를 소환했을 때처럼 소환진 가운데 자리를 잡고 의식을 진행했다.
그때는 누구라도 나오길 바라며 정령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자신이 소환할 정령은 분명했고 그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웅.
소환진의 반응이 시작되었다.
세계수도 흥미로운 눈길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라면 고대 정령과 정령왕 모두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소환할 것인가. 역시 전투력면에서는 이프리트인가 아니면, 제피로스와의 연동을 생각해서 실피드 이시르를 생각해 보면 엘라임일 수도 있겠군.’
우우웅.
소환진의 반응이 더욱 거세졌다.
덩달아 세계수의 기대감도 커졌다.
어떤 정령왕이 나오더라도 엘런에게는 큰 전력이 될 것이었다.
세계수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소환진의 반응은 계속되었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웅.
그제야 세계수는 무엇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자신이 그려 놓은 소환진이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반응하고 있던 것이다.
아무리 정령왕을 소환해 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강한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이 녀석, 설마 ’
그는 한 가지, 아니, 유일할 수밖에 없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당장 그만 둬. 안 그랬다가는…….”
콰아아아앙!
세계수가 엘런을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매우 격렬한 반응을 보이던 소환진이 폭발하더니 연기가 피어올랐다.
“엘런, 역시 나를 소환할 줄 알았다.”
가장 먼저 들려온 목소리는 건장한 청년의 것이었다.
피어오르는 연기마저도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게 하는 열기를 가진 인물이 엘런을 향해 걸어왔다.
“반갑습니다, 이프리트 님.”
“벌써, 정령왕을 소환할 정도로 성장한 건가 그러고 보니 못 본 사이에 훨씬 강해졌군. 나도 드디어 중간계 구경을 하는구나. 이거이거, 실피드가 볼멘소리를 하겠는 걸 ”
엘런의 인사에 이프리트도 덩달아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좀 조용할 수 없니, 이프리트 ”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이프리트의 옆에서 얇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실피드,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
이프리트는 자신을 흘겨보고 있는 실피드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그건 저 녀석이 알겠지.”
실피드는 엘런을 가리켰다.
엘런은 멋쩍은 듯 그들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우리 모두를 소환할 줄이야. 역시,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이 포근한 웃음은 엘라임의 것이었다.
“테오스에게 듣긴 들었지만, 정말 이렇게 소환할 줄은 몰랐군.”
우락부락한 트로웰은 영문을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이렇게 다 소환된 거야 나만이 아니고 ”
4명의 정령왕이 모두 모인 것을 보자 이프리트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크흠.”
그때 옆에서 관심을 갈구하는 것 같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헛!”
“세, 세계수이시여.”
그제야 옆에 있던 세계수를 인식한 그들이 서둘러 그를 향해 예를 올렸다.
“그래, 다들 오랜만에 반갑구나.”
“저희도 그렇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던데 말이야.”
속이 좁은 세계수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정령왕들은 그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나저나 너도 정말 무식하군.”
세계수는 엘런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정령왕 4명을 모두 소환시킬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정령왕 하나로는 부족하다는 건 당신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엘런의 대답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4명을 동시에 부르면 어떡하나, 그것도 본체를 말이야. 그러다 몸이 못 견디면 어쩌려고 그래 ”
정령왕 4명을 동시에 중간계로 부르는 일은 자신조차도 조금은 무리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걸 한낱 인간이 한다니.
아무리 자신의 본체 내에서 자신이 그려 준 소환진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자살 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쨌든 살아남았지 않습니까 ”
“이런 놈에게 내 정원사들의 안전을 맡기다니.”
속 편한 소리를 하는 엘런을 보고 세계수는 답답했는지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엘런도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신의 이마에 흥건히 고인 식은땀을 닦아 냈다.
지금이야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것이었다.
어차피 이게 안 되면 하메론에게 이길 수 없었다.
아니, 이걸로도 하메론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도박을 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으니.’
어찌 됐든 하늘은 자신을 돕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지, 그 하늘이라는 게 그놈에게 지고 있으니. 나는 누구한테 기도해야 하나 ’
엘런은 잠시 실없는 생각을 하며 정신 상태를 조금이나마 진정시켰다.
“그래서 이 녀석이 우리 모두와 계약을 하려고 한단 말입니까 ”
지금까지 그들의 대화를 들은 이프리트가 세계수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하는군. 나는 한 개체당 하나의 정령이라는 규제를 풀어 주려 한다. 하지만 계약을 하는 것은 너희들의 마음이니, 나는 강요하지 않겠다.”
“하지만 우리 모두와의 계약이라니. 엘런이 버틸 수 있을까요 ”
엘라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들도 정령왕과의 계약이 정령사의 몸에 얼마나 큰 부담을 주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 역시도 저 녀석의 마음이니 따로 강요하지 않을 생각이다. 양쪽 다 원한다면 계약해도 좋다. 정령계와 중간계의 균형은 내가 맞춰 주도록 하지. 내 정원사들을 부탁하는 대가이기도 하고.”
그의 말에 엘런과 정령왕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계약을 진행하겠다.”
지금 사정에 대해 테오스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던 트로웰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일시적으로 테오스와의 계약을 끊은 상태였다.
지잉.
엘런과 정령왕들의 몸에서 동시에 빛이 나왔다.
양쪽에서 나온 그 빛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크헉.”
엘런이 울컥 피를 토했다.
아무래도 정령왕들의 계약이다 보니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참고 있던 고통이 한 번에 몰아닥쳤다.
“지금이라도 말해라. 원한다면 계약을 중지해 줄 테니.”
세계수는 그런 엘런을 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계속하겠습니다.”
엘런은 소매로 피를 닦으면서도 계약에 필요한 주문을 외웠다.
주르륵.
주문이 길어질수록 엘런의 몸은 더욱 많은 피를 쏟아 냈다.
안에 거대한 것이 자리 잡아 그 부피를 감당하지 못한 몸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거 위험한데…….”
세계수도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기이이이잉.
하지만 엘런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메론의 힘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발이라도 더 나아가는 것이다.’
그 생각만이 엘런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가 의지를 불태울수록 정령왕들과 이어진 빛 역시도 강해졌다.
콰아앙!
한 번의 폭발음.
누군가는 이것을 위험한 현상의 징조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수는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됐다.”
그것은 계약이 성사되었다는 방증이었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세계수의 본체 안은 엘런의 숨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그 빽빽한 숨소리 사이로 세계수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역사상 처음으로 정령왕들과 계약한 것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