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239
239
에레네의 부탁 (1)
* * *
쿠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하메론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멀어지는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하메론의 모습이 멀어진다.
아니,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그 빈 곳은 그저 검은색만이 있을 뿐이다.
마치 우주를 떠도는 것 같은 기분.
자신의 공간만이 홀로 덩그러니 떠다니고 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
엘런은 그 고독한 유랑 속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검은 공간밖에 없었다.
생긴 것은 에레네를 만나던 그곳과 비슷하게 생기긴 했다.
다른 점은 이곳에는 감히 발을 내딛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에레네가 있던 공간도 이처럼 상하좌우를 구분할 수 없는 온통 흑색의 세상이긴 했다.
그 대신 자신이 발을 내디딘다면 그 공간 속에서 발이 디뎌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곳은 떨어진다.’
거기에 논리적인 근거는 없었지만, 엘런은 확신이 들었다, 자신이 이곳에서 발을 뻗는다면 저 끝을 알 수 없는 곳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라는 확신이.
‘세상이 붕괴되었다는 말이 이런 의미인가 ’
엘런은 붕괴된 세상을 바라보았다.
온통 흑색의 공간 속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별처럼 빛나는 것들뿐이었다.
지상에서 보던 우주라는 것 가운데 떠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어쨌든 그리 실감이 나는 광경은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
엘런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이 세계의 주신이던 에레네는 하메론에게 흡수당했다.
그리고 엘런은 그것을 막지 못했다.
그에 따라 모든 차원이 붕괴되었고 이 지경이 되었다.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는 노력 자체가 가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만큼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슈욱.
그때, 무엇인가 엘런의 옆을 지나쳤다.
바로 옆까지는 아니었고, 자신과 함께 떨어져 나온 공간의 옆을 지나치는 정도였다.
엘런은 재빨리 그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림 ’
슈슉.
슈우욱.
그가 의문을 가지는 사이 몇 가지 그림이 더 지나갔다.
엘런은 자신을 지나치는 그림을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그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어떤 장면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알맞아 보였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에레네의 공간에 생겼던 포탈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장면들은 마치 자신의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자신이었다.
‘저건 도대체 언제지 ’
엘런은 장면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자신에게서 어떤 이질감이 느껴졌다.
분명히 자신이 맞는데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과거인가 아니면 미래 ’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장면 속에서 자신은 에니스 수용소에서 마법 수련을 하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장면에서는 마법 보조사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이것만 보면 자신의 과거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장면은 오직 자신의 회귀 후 과거만 보여 주는 것이 아니었다.
회귀 전, 마탑 시험에서 또 떨어져서 축 처진 모습이라거나 레오나드에게 목숨을 잃던 모습도 보였다.
또 몇 가지 장면들은 자신의 기억에 전혀 없는 삶을 사는 자신도 보였다.
차원이 붕괴되면서 시공간이 흐트러진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살았던 과거의 모습이나 미래의 삶으로 추정되는 장면들이 이렇게 날아다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애당초 이 상황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데 무엇을 또 이해하겠다고 이러는 거냐.’
체념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는 엘런의 앞에 어떤 장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다른 장면들과는 다르게 유난히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덕분에 엘런은 그 장면을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아아…….”
그 장면을 지켜보던 엘런의 입에서는 탄식인지 환희인지 모를 어떤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곳에서 자신은 너무나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 세상에서 엘런은 마법의 정점에 있었고 예쁘고 지혜로운 아내가 있었으며 세상은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자신이 원하던 너무나도 완벽한 삶이었기 때문일까.
엘런은 자신이 그 장면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삶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후두둑.
그의 발걸음은 자신의 공간 끄트머리에서 멈췄다.
그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장면이 멀어져 가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그게 너무나 아쉬웠던 엘런은 저도 모르게 그 장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후웅.
그가 내뻗은 손과 장면이 닿자 그곳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에레네의 포탈 때처럼, 그 빛은 순식간에 엘런을 집어삼켜 버렸다.
그는 제 몸이 사라지고 있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완벽한 삶을 감상하는 것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빛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엘런도 사라진 상태이었다.
* * *
“여보, 오늘 폐하를 만나러 가야 하니 얼른 일어나셔야 해요.”
귓가를 간지럽히는 상냥한 목소리였다.
게다가 자신의 몸에 닿는 이 손길은 포근하기 그지없었다.
“아음, 나 어제 밤새워서 연구했었잖아요. 조금만 더 잘게요.”
그 좋은 기분에 엘런은 괜히 마음에도 없는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기에는 나이가 많이 지났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와 손길에 저도 모르게 어린 시절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30분 전에 그렇게 말해서 내가 지금 당신을 깨우고 있는 거잖아요. 얼른 안 일어나시면 폐하께 다 말할 거예요.”
그녀의 말에 엘런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내가 그랬어요 ”
엘런은 기지개를 쭉 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물론, 눈을 감고도 로브 따위 쉽게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눈을 뜨지 않으면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아내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도 오랜만에 돌아가는 왕궁이라 한껏 차려입었군요.”
“그럼요. 아바마마를 뵈러 가는 길인데 그저 그렇게 입을 수는 없잖아요.”
엘런의 두 눈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세르넬이 보였다.
“부끄럽게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
그녀는 두 볼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아, 너무 아름다워서 넋을 놓았네요.”
엘런도 순간적으로 잃었던 정신을 얼른 되찾았다.
이전에도 세르넬은 수없이 만났지만, 이 정도로 아름다웠던 적이 있었던가.
그는 그녀를 그저 독기에 가득 찬 불쌍한 공주님으로 생각했었다.
‘아니, 처음부터 좋다고 따라다녀 놓고 이 정도로 아름다웠던 적이라니…….’
지끈.
엘런의 머릿속에서 서로 다른 기억들이 상충하였다.
“왜 그래요 어디 몸이 안 좋은가요 ”
세르넬은 엘런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아, 아니에요. 너무 깊게 잠들었다 일어났나 봐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리하지는 말아요. 아바마마나 오라버니도 당신이 몸이 안 좋다는 소식에 호통을 치지 않으실 거예요. 오히려 나라가 발칵 뒤집히지 않으려나 몰라. 워낙에 대단한 사람이라서 말이에요.”
세르넬은 엘런의 코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엘런은 그런 그녀를 보며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계속해서 그녀에 대한 연민이 떠올랐다.
‘이 기억은 도대체 뭐지 ’
자신의 기억에 분명 세르넬에게 연민을 느낄 부분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기억 저편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아, 엘런, 왔는가!”
엘런과 세르넬이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로미우가 그들을 반겨 주었다.
그도 동부 대륙의 패자로 군림하는 프로드 제국의 차기 황제로서 가져야 할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로미우.
이대로 알베르토에게서 로미우로 자연스럽게 황좌가 넘어갈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였다.
“일정보다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그보다 자네의 몸이 안 좋다고 하던데, 그건 괜찮은 건가 몸이 많이 안 좋으면 조금 쉬어도 괜찮네. 프로드 제국에서 그대의 건강은 국보보다도 소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하하하.”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오라버니의 눈에는 상아탑주의 건강은 보이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모습은 조금도 관심이 없나 보군요.”
그때, 세르넬의 입이 삐죽 나오며 로미우에게 땍땍거렸다.
“아니란다. 당연히 우리에게는 엘런보다 네가 더 소중하지 않겠니 ”
“됐어요. 나 같아도 엘런이 더 소중할 것 같네요.”
“그렇게 본심을 꺼내도 되는 거니 ”
“아, 그건…….”
로미우의 말에 세르넬은 다시 한 번 고개를 푹 숙였다.
엘런과 로미우는 그런 세르넬을 보며 쿡쿡 웃었다.
모든 것이 평화롭다는 느낌은 딱 이런 것이었다.
“아참, 얼른 들어오게나, 오늘 서부 대륙의 에레네스와 교류 3주년 기념식이 있을 예정이니. 일등 공신인 그대가 빠져서야 쓰겠나.”
“아, 그렇지.”
엘런의 머릿속에 퍼뜩 오늘 일정이 떠올랐다.
오늘은 프로드와 에레네스의 역사적인 수교가 시작된 지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행사 차 에레네스의 수장인 교황, 트리에스테가 동부 대륙의 땅을 밟는 날이기도 했다.
최초 수교는 당시 황제였던 알베르토가 서부 대륙으로 넘어갔었고 그 후 2년간은 서로의 사신만 오갔다.
이번 3주년을 맞아 그 트리에스테가 동부 대륙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한 것이다.
“엘프에 버금가는 미모라고 하던데.”
“그렇다고 하니 정말 궁금하구먼.”
“분위기 자체로 성스러워서 절로 무릎을 꿇게 만든다고 하더군.”
“그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
“사신으로 다녀온 히카르도 경이 말해 주었네.”
연회장은 온통 트리에스테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타국의 귀족들까지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녀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긴, 그녀가 원체 아름답긴 하지.’
동부 대륙의 누구보다 그녀를 가까이서 많이 보았던 엘런으로서도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콱.
“윽, 세르넬, 왜 그래요 ”
“당신 표정에서 전부 보여요.”
여자의 촉감은 그런 엘런의 감정을 정확히 잡아 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녀가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
엘런은 그런 세르넬의 태도를 보며 귀엽다는 듯 쿡쿡거렸다.
오히려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엘프에 버금간다는 말은 완전 거짓까지는 아니죠.”
“당신 정말!”
“장난이에요. 장난.”
“세르넬이 자네를 깊게 좋아하나 보구먼.”
로미우와 엘런이 그녀를 놀리고 있을 때,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 납시오.”
슥.
그 말에 연회장에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한순간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귀족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엘런이 모든 귀족을 대신해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황제 알베르토의 표정이 반가움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내비칠 수는 없었다.
“다들 행사에 참가해 주어 고맙소. 우리가 에레네스와 영원한 우방을 맺게 된 것도 모두 그대들 덕분이오. 이 자리를 빌려 그대들의 공을 치하하는 바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알베르토가 말한 것은 모두 엘런에 대한 인사였다.
귀족들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수교의 모든 것이 엘런의 업적이라는 데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사이의 인사가 끝나고 드디어 모두가 이 행사에서 가장 기다리고 있는 차례가 다가왔다.
“다음으로 에레네스의 교황, 트리에스테 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