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240
240
에레네의 부탁 (2)
* * *
시종장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모두들 저 베일 뒤에서 나올 트리에스테의 모습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사락.
베일이 열리고 트리에스테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
다른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넋이 나간 탄성뿐이었다.
숨이 막히는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을 보고 일컫는 말인 듯했다.
“반갑습니다. 에레네교의 교황 트리에스테입니다.”
그녀의 인사에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은 가까스로 잡은 넋을 다시 놓치고 말았다.
옥구슬이 굴러 가는 목소리에 귀가 녹아 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아름답네요, 저분.”
그것은 세르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그녀를 질투했다는 사실이 미안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였다.
“안 그래요, 엘런 저분은 같은 여자로서도…….”
세르넬은 엘런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지끈.
엘런은 그녀를 보는 순간부터 심각한 두통을 느꼈다.
이전부터 계속 봐왔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래요 몸이 안 좋아요 ”
세르넬은 그런 엘런을 보고 허둥지둥했다.
“무슨 일인가 엘런, 자네 괜찮은 겐가 ”
로미우도 마찬가지로 허둥지둥했다.
이렇게 공시적인 자리에서 큰 소란을 일으킬 수도 없었기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괘, 괜찮습니다. 아주 일시적인 것입니다.”
엘런은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손을 들어 그들을 만류했다.
그도 이런 경사스러운 자리를 자신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알겠어요. 혹시 더 안 좋아지면 말해요.”
엘런의 말에 세르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불안함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엘런이 괜찮다고 하니 넘기기로 했다.
‘왜 이러는 거지 ’
한편, 엘런도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어째서 트리에스테를 보고 이렇게 큰 두통이 찾아왔을까.
‘그녀의 치명적인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나는 이미 익숙해질 정도로 그녀와 많은 만남을 가졌는데.’
도저히 이유가 가늠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아침부터 모든 것이 이상했다. 자신의 아내를 보며 이상한 기억을 떠올리더니, 트리에스테를 보고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느껴지기도 했다.
‘정말 요즘 잠을 못 자서 그런가 ’
엘런은 연회장 한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그곳에서 조용히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 위해서였다.
평소 같았으면 귀족들이 귀신같이 자신을 찾아다녔을 테지만, 오늘은 상아탑주인 자신도 관심 밖이었다.
그가 몸을 추스르는 동안 공식적인 행사는 모두 종료되었다.
그러고는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는 파티가 시작되었다.
모두가 트리에스테와 대화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접근하는 귀족은 없었다.
그녀의 분위기가 워낙 고고한 탓이기도 했지만, 목적이 분명한 그녀의 동선을 막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단상에서부터 엘런에게로 이어지는 가장 짧은 경로를 선택해 걸어왔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엘런 님.”
그녀는 엘런의 앞에 오자마자 공손한 자세로 인사를 올렸다.
“상아탑주님이 서부 대륙에서 성인이라고 하더니 정말인가 봅니다.”
“서부 대륙에서 엘런 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네.”
“정말 부럽구먼, 저런 아리따운 여성이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면…….”
그 모습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그중 대부분이 부러움의 시선이었다.
“으윽.”
그러나 엘런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엘런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들으니 쿡쿡 찌르는 것 같은 두통이 둔기로 두드리는 고통으로 바뀌었다.
“왜 이러고 있는 것입니까 ”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
엘런은 억지로 그 고통을 참아 내며 영문 모를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어째서 여기서 이러고 있냐는 말입니다.”
“내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
트리에스테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엘런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세르넬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기만 했다.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는 귀족들은 그저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
“그, 그게…….”
“당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십시오.”
쿠쿵.
뭔가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왕궁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엘런이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는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당신, 트리에스테가 아니지 ”
엘런의 물음에 그녀의 형상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것은 엘런에게만 인식되는 것인 듯 다른 이들은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것은 가장 가까이 있던 세르넬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야 ”
“너도 날 모르지 않잖아.”
일그러지던 그녀의 형상이 곧 완전히 변해 버렸다.
변한 그 형상은 엘런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의 것이었다.
“에레네 ”
그것은 형상이라는 것을 고정할 수 없는 존재, 에레네의 형상이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너는 하메론에게 흡수당한 것이 아니었나 ”
지금 그것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온 것이 아니던가.
‘아니지, 이건 누구의 기억이지 ’
엘런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 때문에 머리가 깨져 버릴 것 같았다.
‘하메론, 하메론은 누구지 ’
머릿속이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지금까지의 기억이 자신인지, 아니면 지금 떠오르고 있는 것이 정말 자신의 기억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
“잘 기억해라, 엘런. 네놈이 누구를 그렇게 원망했었는지.”
내가 누군가를 원망했다고
이렇게 역경 하나 없었던 삶에서 누구를 원망했다는 말인가.
엘런의 인생은 그야말로 탄탄대로 그 자체였다.
누군가의 시기를 샀을지언정 누군가를 원망했던 적은 없었다.
-마나여, 그대는 빛. 그대가 없는 곳은 곧 캄캄한 어둠일지니, 나의 마나는 그대가 가진 속성과는 정반대이다. 따라서 나 그대를 몰아내고 세상을 심연으로 이끌겠노라.
그 생각과 동시에 처음 들어 보는 주문이 갑자기 들려왔다.
‘아니, 처음 들어 보는 것이 아니다.’
엘런의 기억 속에 분명히 있는 주문이었다.
주문의 내용으로 보아 흑마법과 관련된 것 같았다.
연구 삼아도 열람할 수 없는 흑마법의 주문이 어째서 자신의 기억 속에 있다는 말인가.
-어비스.
그 주문의 시동어까지 분명하게 떠올랐다.
이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이 맞았다.
-이곳에서 도망쳐야 합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동굴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치는 모습.
-어차피 그를 이길 수 없다.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 원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망치던 자신의 모습.
-너 이 새끼,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자신의 귓가로 섬뜩한 목소리로 경고하는 시종장의 모습까지 기억났다.
그 모든 기억이 머릿속으로 폭발하듯 밀려 들어왔다.
‘이제 확실히 기억난다.’
갑자기 머리를 쪼개 버릴 것 같던 두통이 사라졌다.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엘런 베리타티다. 에레네의 선택을 받아 30년을 뛰어넘어 과거로 돌아온 무영창의 마법사.’
자신의 정체성이 완전히 떠올랐다.
이것은 엘런 베리타티가 살던 삶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은 결코 이렇게 순탄하기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담고 있다고 과언이 아니었다.
‘하메론에게 스승을 잃고도 그를 두려워하여 비겁하게 도망쳤던 패배자.’
마치 화산이 터진 것 같았다.
지금까지 기억 저편에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메론에 대한 분노와 원망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로부터 세상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
이번에는 엘런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창조주 에레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후웅.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엘런의 주변은 완전히 시간이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한 것은 그 현상이 풀릴 때였다.
웅성웅성.
지금껏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던 연회장이 다시 음악과 대화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당신 괜찮아요 ”
세르넬만이 엘런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
그녀는 트리에스테를 째려보며 말했다.
그녀와 대화를 하고 엘런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분명 악영향을 끼친 것이다.
엘런에게 해로운 영향을 줬다는 생각에 그녀는 교황의 신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저는 그저 인사를 드렸을 뿐입니다. 그럼 이만.”
그리고 트리에스테는 엘런에게서 멀어졌다.
세르넬은 그녀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눈총을 거두지 않았다.
“저자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것보다…….”
“네, 역시 조금 쉬어야겠죠 제가 시종에게 말해 둘 테니 당신은 왕궁에서 조금 쉬도록 해요.”
“그런 게 아니에요.”
덥석.
엘런은 세르넬의 양손을 붙잡았다.
“어머.”
세르넬은 얼굴을 푹 숙였다.
혼례를 올린 지 몇 년이 지났어도 아직까지 수줍음이 많은 그녀였다.
“잠시 후에 내가 여기서 쓰러지더라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
그녀가 부끄러움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며 물었다.
“나를 잘 부탁해요.”
“그, 그게…….”
그것이 엘런이 이 세계의 세르넬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였다.
‘돌아간다.’
쿠쿠쿠쿵.
지이잉.
연회장에 때 아닌 폭풍이 일어났다.
그러더니 주변의 물건들이 이리저리 휘날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예전에 엘런이 텔레포트로 서부 대륙에서 동부 대륙으로 넘어왔을 때 있었던 현상과 비슷했다.
콰아아.
이윽고 엘런의 머리를 향해 빛줄기가 쏟아졌다.
그 누구도 결코 다가올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빛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엘런의 몸을 잡고 있던 세르넬만이 겪은 현상이었다.
연회장의 다른 이들은 아무런 변화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엘런의 의지를 들은 마나가 그에 따라 움직였다.
원시 마법을 배운 엘런에게 있어서 차원을 넘나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능력이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이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이곳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툭.
의식이 빠져나간 엘런의 육체가 그대로 쓰러졌다.
세르넬은 그런 엘런의 육체가 넘어지지 않도록 받쳤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에 따라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내 마지막 사념체가 다행히 할 일을 마쳤군.’
그것을 보고 있던 트리에스테의 몸 역시도 점점 흐려졌다.
그런 그녀에게서는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것도 이 몸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
신의 뜻을 담을 수 있는 최고의 그릇.
그것이 교황의 몸이었다.
그 덕에 에레네의 사념체는 차원을 뛰어넘어 트리에스테의 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못난 주신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엘런, 내 마지막 힘을 다하여 부탁한다. 나의 피조물을 구원해다오.’
그것이 트리에스테의 몸에 들어가 있던 에레네의 마지막 염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