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54
54
알현 (3)
“이것이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이 인장은 왕가의 인장이다. 이것만 있으면 경은 짐에게 어떠한 부탁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짐이 듣고 불가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제외하겠지만 말이야.”
알베르토는 엘런에게 왕가의 인장을 건네주었다.
엘런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야말로 무엇이든 들어주는 종이였다.
“성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감히 제가 전하께 한 가지 호기심을 품어도 되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인가?”
“어찌 저에게 이런 과분한 것을 하사하십니까? 이미 남작의 자리로도 넘치는 대우를 받았다고 여겨집니다.”
엘런은 알베르토의 의도를 정확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그의 편에 두고 싶어 한다는 것까지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귀족 작위로도 충분히 이룰 수 있었다. 굳이 왕가의 인장까지 줄 필요가 없었다.
엘런의 말에 알베르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상황 파악은 전투 중에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었나 보군. 역시 짐의 사람을 보는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짐이 그대에게 인장을 준 것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저는 전하의 신하입니다. 무엇이든 명하소서.”
알베르토는 잠시 뜸을 들였다. 엘런은 점잖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짐에게는 아들이 있네. 짐의 아들이지만 솔직히 말해 부족함이 많아 걱정이지. 주변의 시선도 그리 좋지만은 않아. 그대가 내 아들의 지원군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
그 말에 엘런은 프로드의 왕자를 떠올렸다. 그의 머릿속에 한 무능한 왕자가 떠올랐다.
로미우 프로드.
알베르토 프로드의 피를 이어받는 유일한 정통 후계자였다.
하지만 유능하고 강직한 아버지와는 달리 능력은 없고 우유부단한 그는 다른 귀족들의 먹잇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후 왕위 계승이 시작된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한다.
로미우 프로드가 결단력이 없고 너무 무능력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 알베르토는 노쇠해져 가고 세대는 교체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자 결국 고위 귀족들에 의해 국정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알베르토의 유일한 고집이었지. 차라리 서자였던 세르넬 프로드에게 물려주든가.’
세르넬 프로드는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이었다. 아버지의 성격과 능력을 모두 물려받은 그녀는 서자라는 것 때문에 왕이 되지 못했다.
귀족들은 차라리 그녀를 왕으로 추대했지만, 알베르토는 기어코 로미우를 고집했다.
그런 로미우를 지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가의 인장은 엄청난 기회였다.
당장에 그의 전과부터 말소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었다. 물론 당장은 세력을 키워야 하니 정체를 드러내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드러내야 했다. 그때 이 인장은 큰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예. 제가 온 힘을 다해 왕자님을 잘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엘런의 말에 알베르토의 얼굴이 환해졌다.
가장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로미우가 같은 또래인 엘런을 보고 배웠으면 하는 생각이 가장 컸다.
“좋다. 앞으로도 왕자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으면 한다.”
“예. 맡겨만 주십시오.”
엘런은 충성의 맹세를 마친 후 대전을 빠져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그를 왕궁 밖으로 안내해 주었다.
왕궁의 성문으로 향하기 위해 넓은 정원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하인이 멈춰 섰다.
“왜 그러는가?”
“왕자님이십니다.”
엘런은 하인의 눈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백금발의 녹색 눈, 하얀 피부를 그대로 물려받은 왕자가 서 있었다. 알베르토가 중후하고 신비스러웠다면 로미우는 아름답다고 맑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렸다.
“레미 베리타티가 프로드의 떠오르는 태양을 뵙습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엘런은 얼른 예를 취하며 인사했다. 그는 엘런을 보고 잠시 무엇인가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아, 레미 경! 그대의 이름을 들어 봤어요. 이번 고센 제국과의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했나요?”
“왕자님께서 기억해 주신다니 그저 영광스러울 뿐입니다.”
그러자 로미우는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높은 목소리며 정갈하지 못한 행동거지며 일국의 왕자라고 하기에는 무게감이 없었다.
“아니에요. 그대 같은 명장은 제가 기억해야지요. 아바마마께 들었는데 그대와 가깝게 지내라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저 또한 전하께 명을 듣고 오는 길입니다.”
그 말에 로미우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의 양손은 꼭 모여 있었다.
“그대와 같이 훌륭한 자가 나와 가깝게 지내 준다니 너무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왕자님과 같은 분을 모실 수 있게 되어 제가 영광입니다.”
로미우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엘런은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 같은 놈은 왕자라는 것만 빼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그대와 같이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반응을 본 엘런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 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어서 몰랐다. 그런데 왜 귀족들이 로미우의 왕위 계승을 반대했는지 알 것 같군.’
하지만 이미 왕가의 인장을 받았다.
이것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 답답한 왕자와 잘 지낼 수밖에 없다.
“왕자님, 제가 성심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레미 경의 말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에요.”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미우를 보며 엘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다 드러나는 것은 왕자에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저 녀석을 보니 앞으로 고생길이 보이는 것 같구나.
‘스승님, 저도 막막합니다.’
로미우는 엘런의 생각을 알지도 못한 채, 감동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제가 그대의 시간을 너무 빼앗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요? 얼른 가 보세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왕자님. 제가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레미 경.”
로미우는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 * *
고센 제국과의 전쟁은 프로드 왕국의 승리로 끝났다.
전국에서 모집한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병사로 남기도 했다. 군 편제에도 전면적인 개편이 들어갔다.
확장된 국경의 치안유지와 제국에 대한 견제를 위해 제5군에 대한 지원이 확대되었다. 오히려 상급부대인 4군보다 전력이 더 강해지기까지 했다.
그 개편으로 엘런은 원수 자리를 내려놓고 왕실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의 직책은 전략관이었다.
‘왕의 한마디에 이토록 많은 자가 움직이는구나.’
그 덕분에 수도 해리포드에서 생활하게 된 엘런이었다. 여러 이유가 붙긴 했지만, 가장 주요한 이유는 엘런을 왕자의 곁에 두겠다는 왕의 의지였다.
어찌 되었든 엘런의 입장에서는 해리포드에 있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었다.
‘일단 해리포드에서 생활할 준비부터 해야겠다.’
엘런은 가장 먼저 저택을 구했다.
알베르토로부터 받은 많은 돈이 있었기에 웬만한 크기의 저택 정도는 구매할 수 있었다.
그렇게 큰 크기는 아니었지만 혼자 살기에는 넓은 저택이었다.
엘런은 대부분의 방을 마법 수련을 위한 방과 이론 공부를 위한 서재 등으로 만들었다.
‘이제 스승님께 마음 편히 마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가 너 아니랄까 봐,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집을 만드는군.
‘저는 예전부터 큰 서재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엘런이 대충 정리를 다 끝냈을 때였다. 대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엘런은 자신의 저택을 아카드에게조차 말한 적이 없었다. 그를 찾아올 사람은 해리포드에 없었던 것이다. 일단 그는 대문 쪽으로 나갔다.
웅성웅성.
대문 밖에는 대여섯 명의 사람과 같은 수의 마차가 있었다.
“누구시죠?”
엘런이 나오자 그들의 눈빛이 빛났다. 웅성거리던 소란은 바로 멈췄다.
“레미 베리타티 님, 저는 마튼 상단에서 나왔습니다. 베리타티님의 승전과 작위식을 축하드리고자 나왔습니다.”
대머리의 중년이 인사를 하며 말했다.
“이것은 저희 상단에서 준비한 작은 선물입니다. 부디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받으십시오.”
그가 마차를 가리키며 말하자 마부가 마차에 씌워져 있던 천막을 걷었다.
그곳에는 척 보기에도 귀한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엘런이 그 물건들을 훑고 있을 때, 다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반갑습니다, 베리타티 남작님. 저는 오데브 상단의 오데브입니다. 저희 상단에서도 베리타티 님을 축하하기 위해 왔습니다. 베리타티 님의 용맹은 수도까지도 이미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러면서 그도 마차의 천막을 벗겨 냈다. 마튼 상단에 비해서는 작았지만, 충분히 귀한 것들이 쌓여 있었다.
돈과 관련된 정보라면 상인 길드가 정보 길드보다 빠른 정도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정보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 거야? 작위를 받은 지 3일도 안 지났는데.’
그동안 그가 한 것이라고는 여관에 살면서 집을 구하러 다닌 게 끝이었다. 그 사이에 이미 소문이 퍼졌다는 것이다.
엘런이 그들의 정보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 마지막 남자가 다가왔다.
“베리타티 남작님, 반갑습니다. 킨버 상단의 킨버입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에 엘런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킨버?”
“예, 맞습니다. 혹시 저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킨버는 엘런의 반응에 당황스러워했다.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듯했지만, 그는 레미 베리타티라는 인물과 전혀 접촉한 적이 없었다.
“아, 내가 착각했나 보군요.”
엘런은 에니스를 탈출하며 얼굴을 바꾼 상태였다.
프로뱅의 연구실에 있던 마법 서적에서 본 마법이었다.
그 마법은 얼굴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대상자의 분위기를 바꾸는 마법이었다.
탈옥 직전에 브레디에게 마법을 시험했었다.
분위기를 바꾼 상태로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엘런이 직접 자신임을 밝혔을 때 비로소 그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었다.
탈옥 후 지금까지는 원래 그를 알던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 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 킨버의 반응을 보고 다시 상기할 수 있었다.
“저희 킨버 상단에서 가지고 온 선물들입니다. 베리타티 남작님의 작위를 축하드립니다.”
“다들 고마워요. 여러분의 마음은 제가 잘 받겠습니다.”
킨버를 포함한 3명의 상인의 표정이 환해졌다.
엘런에 대한 정보를 듣자마자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선물이 효과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떠오르는 샛별인 베리타티 남작에게 가장 먼저 다가갔다.’
‘성공적이다. 저자는 분명 더 큰 인물이 될 것이다. 이 정도 물건들로 길을 틀 수 있다면 이득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인데 날 아는 것 같았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세 명의 생각은 각자 달랐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왕국의 신성과 연을 만들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자신의 서재로 돌아온 엘런도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안 그래도 세력을 만들 필요가 있었는데 잘됐어.’
그는 다음 날, 킨버 상단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