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62
62
체술의 달인 (1)
벤틀러와 엘런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온기를 품고 있는 차가 놓여 있었다.
엘런이 먼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정원에서부터 흥분되었던 가슴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너에게서 스승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나는 계속 스승님을 수소문했다. 너의 말대로 톤턴에서 그분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지.”
엘런은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어. 워낙 비밀스러운 분이라 그런지 정보원들도 확신하지 못하더군.”
벤틀러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정보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 걱정되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제자가 된 자로서 스승님을 직접 찾아뵙는 것이 당연하겠지. 하지만 난 지금 에단 그론리드 님을 호위하는 임무가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다. 그래서 너에게 부탁을 하러 온 것이지.”
엘런은 벤틀러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해 달라는 것인가?”
“내가 지금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다.”
벤틀러가 고개를 숙였다. 그론리드가에서 자신에게 제압당했을 때도 끝까지 당당함을 유지하던 그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서 간절함이 전해졌다.
‘어차피 그를 만나야 하기도 했고 이참에 빚을 지워 놓는 것도 좋겠지?’
엘런이 빙긋 웃어 보였다. 벤틀러는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그 웃음을 보지 못했다.
“알겠어. 내가 한번 다녀오지.”
“고맙다. 평생 보답하면서 살겠다.”
벤틀러는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선 엘런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너의 스승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군.”
벤틀러는 망설이는 것 같아 보였다.
말을 하려던 입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결심을 한 것인지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
“스승님의 성함은 필립스다. 원래는 우리 가문과 교류하던 가문의 기사였지.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가문을 나와 용병으로 대륙을 누비고 다니고 있다.”
‘필립스?’
그 이름을 들은 엘런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자가 필립스였다고?’
필립스.
권왕이라고 불리던 자의 이름이었다.
그의 명성은 프로드에서 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를 호령했다. 필립스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타국의 기사들도 있었다.
그러다 가문 내 후계자 갈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그는 홀연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하지만 그가 남긴 필립스 권법은 훗날 기사 아카데미에서 필수 과목이 될 정도였다. 특히 그의 권법은 검을 쓰기에 앞서 단련하는 신체 강화에 탁월했다.
‘그런 분을 몰라뵌 것인가?’
엘런은 과거의 생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의 신체 강화 체술은 바로 필립스에게서 배운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실력이 있는 용병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때 배운 건 세상에 알려진 필립스 권법이 아니었다.’
기사 아카데미에서 기초 소양으로 배우는 권법이 어떤 내용인지는 대략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필립스에게서 배운 것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찾으러 가야 한다.’
권왕의 비기를 배울 기회였다. 엘런은 결심을 굳혔다.”
“내가 봤던 그분이 필립스 님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 톤턴에서 그분을 뵈면 너의 안부를 전해 주지.”
* * *
“조금 더 하셔야 합니다. 지금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으으으.”
소년의 앓는 소리가 방을 한가득 메웠다.
“올라오셔야 합니다.”
“으아앗!”
방 안을 메우고 있는 건 그 소리만이 아니었다.
후끈한 열기는 소년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게 했다.
“잘 하셨습니다. 오늘도 목표치를 달성하셨습니다.”
소년은 대답할 힘도 없는지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전과 비교하면 횟수가 많이 느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왕자님.”
로미우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평생을 책만 보며 살아오던 그는 최근 들어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직 눈에 띄는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몸이 조금씩 탄탄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네가 도와준 덕분이야, 레미.”
“왕자님께서 잘해 내신 겁니다.”
그는 진심으로 엘런에게 고마워했다.
두 달 전, 마탑의 대련이 있고 난 후부터 엘런의 왕궁 출입이 잦아졌다. 그때마다 엘런은 로미우를 찾아왔다.
엘런을 동경하던 로미우는 그의 방문이 즐거웠다.
-나도 베리타티 경처럼 되고 싶어요.
그때부터 엘런은 그에게 운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쨌든 엘런에게도 왕실의 최측근이 되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왕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야?”
로미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엘런을 바라보았다.
“잠시 톤턴에 다녀오려 합니다.”
“톤턴? 거기는 해리포드에서 꽤 멀지 않아?”
톤턴은 프로드 남서쪽에 있는 도시였다. 말을 타고도 꽤 오래 내달려야 했다.
“거긴 왜 다녀오려는 거야?”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몇 개월은 걸릴 것 같습니다.”
로미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제야 생긴 친구 같은 존재가 떠난다고 하니 불안했다.
“다시 돌아오는 거야?”
“물론입니다. 저는 프로드의 신하입니다.”
로미우의 걱정스러운 눈빛은 사라질 생각을 안 했다.
“진짜지?”
그는 엘런을 향해 재차 물었다. 그의 울 것 같은 표정에 엘런은 피식하고 웃을 뻔했다.
“예, 꼭 돌아오겠습니다.”
“알겠어.”
로미우의 축 처진 어깨는 그의 기분을 여실히 드러냈다. 여전히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였다.
“제가 없더라도 운동은 빼먹으시면 안 됩니다. 제가 다녀와서 왕자님의 몸 상태를 점검하겠습니다.”
“알겠어. 조심히 다녀와.”
엘런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애처롭기까지 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미.”
지금까지 왕실의 애물단지로 취급받던 그에게 처음으로 생긴 친구였다.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다른 도시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엘런이 영영 떠나 버릴 것 같은 걱정이 들었다.
“정말 돌아올 거지?”
두 달간 지내며 그의 소심함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 * *
톤턴의 풍경은 해리포드와는 전혀 달랐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돌산과 흙이 전부였다.
이 척박한 땅에서는 어떠한 농작물도 자라기 힘들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이곳 주민들은 일찍이 다른 직업을 택했다.
용병의 땅.
그것이 톤턴의 별칭이었다. 톤턴 주민들의 주 수입원은 전쟁이나 몬스터 토벌에 참여하여 받은 품삯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용병 조합이 형성되었다. 현재는 톤턴의 용병조합이 프로드에서 가장 큰 조합이 되었다.
“어이,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비키라고.”
“지금 나보고 한 건가?”
“그럼 여기 너 말고 귀찮게 앞에서 얼쩡거리는 놈이 또 있나?”
“이 새끼가!”
우당탕.
순식간에 길거리는 싸움터로 변했다.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그 싸움을 말리긴커녕 누가 이길지 내기를 하고 있었다.
‘여긴 여전히 변함이 없군.’
엘런은 구경꾼들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용병들이 많다 보니 톤턴 전체의 분위기는 호전적이었다.
‘필립스 님은 왜 하필 용병으로서 이곳에 계셨던 걸까?’
자신이 과거에 만났던 필립스는 전혀 부유하지 않았다. 오히려 빈곤함에 가까웠다. 어떤 이유에서 권왕의 칭호를 등지고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이쯤인 것 같은데.’
벤틀러가 건네준 지도에 따르면 이 골목에 바로 필립스의 거처가 있었다.
‘저기다!’
골목 중간쯤에 ‘석양’이라는 낡은 간판과 허름한 나무문이 보였다.
끼이익.
엘런은 조심스럽게 그곳의 문을 열었다. 기름칠이 전혀 돼 있지 않은 것인지 나무문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실례하겠소.”
엘런은 귀족이라는 신분을 숨긴 상태였다. 일을 조용히 처리하기에 귀족은 거추장스러운 신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여관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책상과 의자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 커다란 싸움을 한 것만 같았다.
톤턴에서는 그리 드문 풍경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장사를 할 수 없습니다.”
부엌 쪽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경우 여관 주인만 울상이었다. 아무도 책임을 져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묵으려는 건 아니고 누구를 좀 찾으러 왔습니다.”
그 말에 부엌에서 누군가 나왔다.
“그들이라면 한참 전에 도망갔습니다.”
“그들이라니요?
“베나 용병단을 찾으러 온 것 아닙니까?”
“아! 아닙니다. 저는 파울로 씨를 찾으러 왔습니다. 이곳에서 머물고 있다고 들어서요.”
그 말에 여관 주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분 역시 떠났습니다. 베나 용병단을 쫓아 준 것도 그분이셨지요. 하지만 어디로 간지는 전혀 모릅니다.”
주인장은 양손을 크게 저으며 말했다.
‘너무 격한 반응인데? 왜 그러는 거지?’
주인장의 반응은 척 보기에도 부자연스러웠다.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더는 여기서 캘 수 있는 정보가 없다고 생각한 엘런은 여관 밖으로 나왔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건가?’
조금만 일찍 왔어도 만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아쉬웠다.
‘아, 그래! 이곳은 톤턴이잖아.’
엘런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그들을 찾아가야겠어.’
결심을 굳힌 엘런은 다시 시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 * *
시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용병들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엘런은 그들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걸어갔다. 하지만 그의 이동 경로에서는 어떠한 목적지도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 본다면 엘런이 길을 잃고 한곳을 맴돌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나올 때가 됐을 텐데.’
엘런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오른쪽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발을 놀렸다.
이 골목은 아까부터 몇 번이고 지나갔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점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가득하던 골목이 지금은 적막했다.
척.
엘런은 걸음을 멈췄다.
“너 같은 꼬마가 어떻게 우리를 불러낼 방법을 아는 거지?”
뒤에서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가 골목의 적막감을 깼다.
“장난친 거라면 각오해야 할 거다.”
그는 허리에 있는 검을 툭 치며 말했다.
“의뢰할 게 있어서 왔다.”
엘런은 품에서 꽤 묵직해 보이는 돈주머니를 꺼냈다.
“착각했어. 어느 집 자제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라. 우리는 돈만 보고 움직이지 않는다.”
“파울로 씨를 찾으러 왔는데?”
파밧.
챙.
그의 검이 엘런의 목을 겨눴다.
서슬 퍼런 날이 목에 닿았다. 하지만 엘런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꾸욱.
“이런, 너 뭐 하는 놈이냐?”
땅 밑에서 올라온 덩굴이 그의 팔과 다리를 두르고 있었다.
“그것까지는 알 필요 없고 얼른 본부까지 데려가 주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