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74
74
피어 산맥 (1)
“방패를 든 자들은 위치를 바꿔라!”
“다음 조를 투입해.”
“궁병 지원은 아직 멀었나?”
사방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피어 산맥과 프로드를 잇는 주요 통로, 케니프라 게이트의 모습은 세기말을 떠올리게 했다.
“부상자들은 뒤로 빼라. 이쪽은 내가 맡겠다.”
케니프라 지역의 영주 휴고 바클러가 직접 앞으로 나서 빈 공간을 메웠다.
“영주님 그러시면 위험합니다.”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 기겁하며 휴고에게 달려왔다.
“자네들이 빠지면 그곳은 어떡하려고 그러는 건가? 썩 돌아가!”
그는 오크의 팔뚝을 잘라 내며 말했다. 그의 검은 이미 몬스터들의 녹색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내가 끝까지 너희와 함께하겠다.”
“우아아아아!”
그의 외침은 병사들의 사기를 끝까지 끌어올렸다. 영주가 자신들과 함께한다는데, 이것보다 더 힘이 되는 말은 없었다.
“끄악.”
“방패, 방패조가 뚫렸다.”
하지만 사기로는 어쩔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몬스터들의 수는 그만큼 많았다.
“우리가 패하면 뒤에 있는 우리의 가족들은 몬스터의 먹이가 된다. 죽을 때까지 싸워라!”
“쿠오오오.”
휴고의 외침은 몬스터의 괴성에 묻혀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아주 바람직하십니다.”
누군가 휴고의 뒤에 나타났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누구인가?”
그 청년은 휴고의 질문에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화르륵.
“뭣이?”
하마터면 휴고는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청년의 등 뒤에는 수십 개의 불덩이가 나타났다.
스윽.
그 불덩이는 청년의 지시에 맞춰 몬스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끼에에엑.”
“취륵!”
“꾸웨엑.”
듣기만 해도 거북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뭉쳐있던 몬스터들은 옆에서 옮겨 붙은 불 때문에 바닥에 몸을 굴렸다.
“어떻게 된 거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거 설명해 줄 사람 있어?”
“누가 저런 걸?”
갑작스럽게 몬스터들의 압박에서 벗어난 병사들도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법사?”
몬스터들의 괴성이 전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그 소리만큼은 병사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마법사다! 마법사가 우리를 도우러 왔어!”
“이제 살았다.”
“집에 돌아갈 수 있어.”
“마탑의 마법사가 우리를 살려 주러 오신 거야.”
휴고의 피를 토하는 외침에도 바뀌지 않던 전장의 분위기가 한 번에 넘어왔다.
병사들의 가슴 속에는 이길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싹텄다. 전장에서 고위 마법사는 이처럼 극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존재였다.
“고위 마법사의 지원이다. 전 병력 대열을 재정비하라! 이제부터 반격이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휴고는 지금이 바로 반격의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그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진영을 구축해 몬스터들을 불구덩이로 몰아넣었다.
화르르륵.
그 순간에도 불덩이는 몬스터들을 향해 쉬지 않고 날아가고 있었다.
-엘런, 너 파이어볼에 다른 개량을 한 것이냐?
프로뱅이 불덩이를 쏘아 대고 있는 엘런에게 물었다.
‘버닝 핸즈에 들어가는 수식을 변형해서 넣었더니 마나 소모량이 훨씬 줄더군요.’
-나 원, 진정 나에게서 더는 가르칠 게 없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인 게냐?
‘저는 아직도 스승님께 배울 것이 많습니다. 매일 듣는 수업이지만, 스승님의 가르침은 날마다 새롭습니다.’
프로뱅의 말은 그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마법 개량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법사들이 적게는 수년에서 많게는 수십 년에 걸친 연구 끝에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엘런은 그것을 고작 몇 달 만에 해냈다.
원래부터 머리로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을 보고 나서부터는 확실히 달랐다.
마법 서적의 어떤 복잡한 내용이라도 한 번에 이해가 되었다. 마법 수식 역시 조금만 들여다보면 손쉽게 개량할 수 있었다.
‘분명히 그 문과 관련이 있어.’
엘런의 생각은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말로만 들었는데 직접 보고도 안 믿기는데.’
병사들의 진격에 불덩이가 떨어진 곳으로 몰리기만 하던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변했다.
체구가 큰 몬스터들이 앞장서며 버텨 주었다. 그 뒤에 있던 작은 몬스터들이 방패가 벌어진 틈 사이로 달려들었다.
“방패 대열을 좁혀라. 창병들이 나서 달려드는 몬스터를 막아.”
마치 인간과 인간의 전쟁을 보는 것 같았다. 휴고의 명령은 시시각각 변했고 몬스터들의 움직임도 그에 대응하게 변했다.
‘조금 더 수를 줄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대로는 내 마나가 못 버티겠어.’
엘런도 슬슬 무리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아무리 효율적으로 개량한 마법이라고 하더라도 한계는 있는 법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의 몸이 먼저 마나 탈진 현상을 겪을 것이다.
‘어쩔 수 없나?’
“흡.”
엘런은 몸에 힘을 잔뜩 주었다. 온몸에 있는 마나를 한곳으로 모았다.
‘어스브레이크’
쿠르르르릉.
4서클의 마법 어스브레이크를 사용했다.
커다란 진동이 울리더니 몬스터와 병사들 사이의 땅이 갈라졌다. 몇 마리의 몬스터가 그 틈으로 떨어졌지만, 모든 몬스터를 떨어뜨리기에는 크기가 턱없이 작았다.
‘어스브레이크, 어스브레이크’
엘런은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어스브레이크를 연속해서 사용했다.
쿠르르릉.
한 곳에 몇십 번이고 중첩되어 일어난 어스브레이크는 흡사 대지진을 연상시켰다.
땅에 생긴 틈은 점점 넓게 벌어졌고 몬스터와 병사의 거리도 벌어졌다.
뛰어넘어오기에는 너무나 멀어져 버리자 몬스터들은 허둥거렸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와.”
“마법사라는 건 신을 말하는 건가?”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병사들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땅을 갈라 버리는 엘런의 모습은 마치 신처럼 보일 정도였다.
“후우.”
마나를 한계치까지 다 써 버린 엘런은 가쁜 숨을 내뱉었다.
“리틀 게이트 때문에라도 다시 메워야겠지만, 급한 대로 시간은 좀 벌 수 있을 것입니다.”
엘런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휴고에게 말했다.
“알겠네, 고맙군.”
“아버지.”
엘런의 뒤에 있던 레네가 휴고에게 달려갔다.
케니프라 게이트에 도착하자마자 전투에 임했던 탓에 그의 몸은 피와 먼지 투성이였다.
“리틀 게이트를 보수했다는 소식은 전령을 통해 들었다. 한데 저자는……?”
휴고가 엘런을 가리켰다. 레네도 엘런을 슥 보고는 밝은 표정이 되었다.
“드디어 왕실에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었나 봅니다. 왕실 지원으로 나온 레미 베리타티 남작입니다.”
레네는 마치 자신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엘런을 소개했다.
“휴고 바클러 자작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베리타티입니다.”
“날 알고 있다니, 고맙군. 내가 소식이 늦다 보니 자네를 알아보지 못했어. 베리타티라고 했나?”
케니프라 자체가 수도에서도 멀었고 워낙 폐쇄적인 곳이다 보니 엘런의 소문도 듣지 못했다.
“일단 이것으로 마무리는 지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성으로 돌아가지.”
* * *
“보다시피 이곳 상황은 그리 좋지 않네.”
휴고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혹시 다른 지원군은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나?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은데.”
“추가 지원군은 없습니다. 왕실 파견 병력은 저 혼자입니다.”
실망감이라는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휴고의 표정을 보여 주면 될 것 같았다.
“제길, 에드가 백작은 기어코 이곳이 모두 뚫리고 나면 보고를 올릴 생각인가.”
에드가 백작은 프로드 북서부 지역을 총괄하는 인물이었다. 이곳 케니프라 지역도 역시 그의 관할 구역이었다. 엘런은 어째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왕실에 보고가 올라오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에드가 그놈이 과를 숨기려고 보고를 올리지 않고 있구나.’
그는 공명심에 눈이 먼 자였다.
휴고는 몬스터들의 거동이 심상치 않으니 지원군이 필요하다고 수차례 보고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지원군 파견이 잦으면 왕실의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을 염려해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
“오면서 보니 사태가 급박한 것 같았습니다.”
“방금 자네도 봤다시피 몬스터들이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불리할 때면 항상 누군가의 명령을 듣는 군인처럼 움직이더군.”
휴고의 눈에 약간의 두려움이 비쳤다.
“얼마 전에는 리틀 게이트가 돌파당했고 몬스터들이 물밀 듯이 들어왔네. 그런데도 애드가 그놈은 여전히 내 보고를 묵살했지. 왕실 평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것이 끝난 후 보고를 올리겠다고 하더군.”
엘런은 이 전쟁이 어떻게 벌어지게 된 것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케니프라 지역의 대부분이 몬스터들에게 점령당한 후 왕실에서 대대적으로 토벌에 나섰다.
엘런은 그때야 이 전쟁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전쟁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몬스터들이 매복을 하거나 보급로를 끊는 등 전술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토벌이 끝날 때까지도 몬스터들이 어째서 전술을 사용했는지 밝히지 못했다.
‘그때쯤 하메론도 홀연히 떠나 버렸었구나.’
어째서인지 그 시기에 하메론은 고위 마법사 자리를 내려놓고 마탑을 떠나 버렸다.
그러고는 평생을 떠돌이 마법사로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 이유를 찾아내야지.’
몬스터들이 광폭해진 이유를 알아야 내야만 과거의 끔찍했던 그 전쟁을 막을 수 있다.
“바클러 님, 이 전쟁, 제가 막아 보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몬스터들이 광폭해지고 지능적인 이유를 알아내면 이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휴고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알려면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 봐야겠지. 자네 알고는 있는 건가? 그곳은 바로 피어 산맥일세.”
휴고가 원인 조사를 할 수 없는 이유였다. 이 상황에서 피어 산맥으로 들어갈 조사단을 꾸리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예, 그래서 그곳에 가 보려고 합니다.”
“자네 제정신인가?”
상급 몬스터까지 득실거리는 그곳에 아무 준비도 없이 혼자 들어가겠다는 것은 자살행위와도 같았다.
“소규모도 아니고 그 많은 몬스터들이 리틀 게이트 쪽으로 돌아가려면 아마 며칠이 걸릴 겁니다. 그 안에 실마리를 찾아서 돌아오겠습니다.”
엘런의 굳은 의지를 보니 휴고는 알 수 없는 신뢰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알겠네. 나는 한 개 군단을 요청했었네. 그걸 대신해서 온 게 자네이니 보여 주게, 자네가 그 군단 만큼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엘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저는 곧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꼭 좀 부탁하겠네.”
엘런의 시선이 피어 산맥으로 향했다.
알 수 없는 몬스터들의 괴성이 이곳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