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80
80
용기 (2)
“프로드군의 깃발이다! 해리포드의 지원군이 도착했어.”
망루에 있던 병사가 크게 소리쳤다. 언뜻 보기에도 대규모의 병력이었다.
“정말이야? 다행이다. 늦지 않았구나.”
“그렇다니까. 저기 똑똑히 보인다고.”
성벽에 서 있던 병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관에게 달려갔다.
며칠 전부터 케니프라 게이트 주변에 몬스터가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지원군이 온다고 했지만, 그것은 확실하지 않았다.
케니프라의 병사들은 지원군에 상관없이 목숨을 건 혈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이 도착했다.
“이번 전투, 이길 수 있겠어.”
병사의 눈에 희망의 빛이 드는 것 같았다.
‘저 녀석 신났군.’
망루에서 그를 지켜보던 병사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살았다.’
그는 저 멀리서 오고 있는 프로드군을 보았다. 각 부대를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 보였다.
‘베리타티 님의 말씀대로 전군이 동원되었구나. 심지어 마탑의 깃발까지 있어. 그리고…… 저건?’
그의 눈에 어떤 문양이 들어왔다. 왕관과 사자, 그리고 말.
“으악!”
입을 하도 크게 벌려 하마터면 그는 턱이 빠질 뻔했다.
“와, 왕족?”
병사가 본 것처럼 지원군의 구성은 이례적이었다. 프로드군에 마탑의 마법사에 더해 바로 로미우 왕자가 있었다.
“왕자님, 앞에 보이는 성이 바로 케니프라 성입니다. 휴고 바클러 자작이 영지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구나.”
지금까지 왕실 밖을 제대로 나가 본 적이 없는 로미우는 매우 들떠 있었다.
‘저기가 프로드의 방파제.’
피어 산맥으로부터 프로드를 수호하는 케니프라 성.
그것이 자신의 눈앞에 보였다.
“오라버니. 감정은 좀 숨기시면 안 되나요?”
앙칼진 목소리가 로미우의 생각을 뚫고 들어왔다.
“내, 내가 언제 감정을 드러냈다고 그러느냐?”
“지금 그게 드러내는 거겠지요.”
프로드 왕가의 상징인 백금발을 한껏 틀어 올린 여성이 로미우를 째려보며 말했다.
그녀는 바로 프로드의 공주 세르넬이었다.
국무회의에서 로미우에게 활약을 빼앗긴 그녀는 이번 원정에 참가했다며 나섰다.
물론 알베르토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녀의 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그녀를 옹호한 건 올란도였다.
왕족이 나서 성난 케니프라의 민심을 직접 달래 주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공주를 밀착 경호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세르넬을 지지하는 올란도의 의중을 눈치챈 알베르토는 로미우도 원정대에 포함시켰다.
“세르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거라. 이곳은 전쟁터야. 나는 네가 다칠까 봐 걱정되는구나.”
“오라버니만 여기서 공을 쌓겠다 이건가요? 제가 그걸 두고 보고만 있을 것 같나요?”
“그, 그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또 말을 더듬으시네요. 제발 왕족의 권위를 생각하세요.”
로미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으니 그렇게 쏘아붙이지 말거라. 그리고 네가 공을 세우는 것을 막지는 않을 테니 체들턴 경 옆에 딱 붙어 있거라.”
“에? 아, 알겠어요.”
로미우의 예상 못 한 반응에 세르넬은 당황했다.
‘그자야. 그자와 만나고 나서부터 이렇게 됐어.’
세르넬이 엘런의 얼굴을 떠올리며 분노하고 있을 때였다.
“케니프라의 수호자 휴고 바클러가 프로드의 미래를 뵙습니다.”
지원군에 왕족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휴고를 비롯한 케니프라의 주요 인사들이 마중을 나왔다.
“나도 반갑군. 몬스터들로부터 프로드를 수호하느라 노고가 많다.”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로미우가 제법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휴고의 뒤에 서 있던 엘런은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제법이야.’
엘런을 본 로미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주변에 보는 사람이 많았기에 그들은 예법에 맞게 서로에게 인사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여독이 쌓이셨을 텐데 안으로 드시지요. 현 상황을 보고할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휴고의 말에 로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현재 이곳에서 이틀거리에 몬스터의 집결해 있습니다. 우리가 방어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케니프라 게이트는 성벽이 있는 방어 시설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방어의 이점을 살리기 힘든 실정입니다.”
영주성 회의실에는 각 군의 대표와 올란도, 세르넬 그리고 로미우가 있었다.
휴고의 보고에 따르면 상황이 좋지 않았다. 못 막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군 측 피해도 클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목책이라도 쌓아 올려 성벽을 구축해야 할 것 같군. 이번 지원군에는 마법보조사도 꽤 포함되어 있으니 그들을 이용하면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올란도가 마나를 이용해 지도 위에 선을 그으며 말했다.
“그러는 것이 좋아 보이는구나. 그러면 우리 측 병사들의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을 거야.”
세르넬이 올란도의 의견에 동의했다. 원정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명의 말에 각 군의 대표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중 3명은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방어하는 자가 공격에 대비해 유리한 지형을 만드는 것은 아주 정석적인 전략이었다.
‘그런데 아마 소용없을 거다.’
목책은 이미 휴고가 생각했던 방법이었다. 실제로 그는 엘런과 도일의 도움을 받아 목책을 쌓아 올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대편에는 광폭화된 대형 몬스터들이 섞여 있었다.
평소라면 모르겠지만, 근력이 대폭 향상된 대형 몬스터들이 휘두르는 도끼 한 번이면 목책은 나뭇가지처럼 부러졌다.
‘직접 안 보았으니 모를 만도 하지.’
엘런의 속내를 알아차린 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저희도…….”
휴고가 자신들의 실수를 말하려 했다.
“체들턴 경의 의견도 좋아 보이지만, 상대 몬스터들은 광폭화되어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가졌다고 들었다.”
휴고의 말을 막은 것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던 로미우였다. 올란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렇습니다.”
“그런 대형몬스터들이 포함된다면 이 목책으로는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차라리 이것은 어떤가?”
그는 케인 강을 가리켰다. 케니프라 게이트 북쪽에 있는 강으로 피어 산맥에서 흘러나온 물들이 모여 이룬 곳이었다.
“마법사들이 이곳의 물길을 틀어 케니프라 게이트 앞에 해자를 조성하는 것이다. 다행히 원정대에 마법사가 많으니 임시로 물길을 트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은데.”
로미우는 지도에 그려진 강의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이 정도면 대형 몬스터까지는 안 되겠지만 작은 몬스터들은 충분히 잠길 정도는 되겠군. 그럼 상대하기 훨씬 수월하겠어.”
짝짝짝.
박수를 친 사람은 엘런이었다.
“직접 보지도 않으셨는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엘런의 말에 로미우는 쑥스러웠다.
그는 왕실의 있는 대부분의 책을 읽었을 정도로 독서광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걸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 용기가 엘런 덕분에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목책은 저희가 이미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해자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시도해 볼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휴고까지 로미우의 의견을 거들고 나섰다. 로미우는 이런 환대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경들의 의견은 어떤가?”
항상 주변의 의견을 묻는 로미우였다. 평소에는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는 행동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질문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좋은 전략입니다.”
“저희는 감히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침내 올란도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로미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꽈악.
세르넬이 올란도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도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나보고 기다리라는 말이야?’
세르넬은 초조했다.
올란도를 비롯한 몇 명의 귀족과 계획한 대로면 이번 국무회의에서부터 두각을 드러내야 했다.
로미우의 무능함을 증명할 기회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그의 능력만 돋보이고 있었다.
‘올란도, 저 녀석만 믿고 있을 순 없어. 내가 무슨 수라도 써야겠어.’
원래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불안감으로 이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 * *
케니프라 게이트 앞에 해자를 만드는 일은 척척 진행되었다. 케인강에서 물길을 따 와 게이트 앞까지 연결했다. 물길 위에는 흙과 나무를 덮었고 상류를 막아 물이 흐르지는 않게 만들었다.
엘런은 몬스터들의 배후에 인간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것을 들은 로미우가 해자를 위장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전투 직전 몬스터들이 몰려올 때 둑을 터뜨려 해자가 완성되게 하는 전략이었다.
크르르.
크앙!
취이- 취륵!
그리고 그 둑을 터뜨려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눈이 시뻘게진 몬스터들이 게이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블린, 오크부터 트롤에 심지어 뒤에는 오우거까지 보였다.
“맨 뒤에는 오우거야?”
“오늘따라 더 미쳐 보이는군.”
“살아남을 수 있겠죠?”
게이트 병사들의 몸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것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흘렀다. 그 정도로 몬스터 무리의 위용은 남달랐다.
녀석들은 누구에게 명령을 받은 것처럼 대열을 유지하며 점점 게이트로 진격해왔다.
“지금이야.”
로미우가 엘런을 보며 말했다.
피이잉.
쾅.
신호탄이 하늘로 치솟더니 밝은 빛을 내며 터졌다. 그 밝기와 소리로 예상하건대 꽤 멀리서도 신호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몬스터들은 그런 신호탄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단단한 외피를 자랑하는 포레스트 웜들이 앞장서서 몬스터 무리를 보호하고 있어 멀리서부터 공격을 할 수도 없었다.
다소 느리지만 그만큼 철저하게 게이트로 진격하는 모습이 마치 인간의 군대 같았다.
“조금만 더.”
하지만 인간들은 녀석들이 더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그들이 닿기만을 기다렸다.
쑤욱.
찌익.
끼에엑.
포레스트 웜과 바로 뒤에 붙어 있던 고블린들이 갑자기 바닥으로 꺼져 버렸다.
날을 세우고 있던 칼과 창들이 녀석들의 몸을 쑤셨다.
뒤따라오던 몬스터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춤거렸다.
콰콰콰.
그때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장 엄청난 물이 몰려왔다.
쏴아아아.
그 물은 녀석들이 빠져 있는 구덩이를 채워 버렸다.
녀석들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호흡을 할 수 없게 된 녀석들은 그곳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몸 곳곳에 박힌 칼과 창이 그들을 옭아맸다.
“와아아.”
“이게 인간이다!”
“인간의 지혜를 얕보지 말란 말이야.”
병사들이 손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좋아, 보기 좋게 걸려들었구나.”
로미우 역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의 이론적인 전략이 실전에 적용될지 불안했었다. 그 결과를 직접 확인하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저들의 앞을 지켜 주던 포레스트 웜이 모두 없어졌다. 화살과 마법을 쏟아부어라!”
휴고의 지시가 떨어졌다.
임시로 지어진 목책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화살을 쏘았다. 마법보조사들이 공격을 보조했다.
하늘을 뒤덮을 것같이 새까만 화살이 몬스터의 진영으로 쏟아졌다.
앞에서 공격을 막아 주던 포레스트 웜이 사라지자 그 공격은 온전히 고블린과 오크의 몫이었다.
끼익!
취이익- 취익.
그러자 광폭화 마법과 정신 조종 마법이 함께 걸려있는 지휘관 몬스터들이 나섰다.
살아남은 포레스트 웝들이 몸을 길게 쭉 뻗어 해자를 잇는 다리를 만들었다.
원체 몸집이 큰 녀석들이라 꽤 커다란 다리가 될 수 있었다.
조잡한 방패를 든 녀석들이 앞장서며 그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몬스터들이 차례차례 해자를 넘어왔다.
“허어, 말로만 들었는데 정말로 몬스터들이 협력을 하는군.”
“보고도 믿기지 않습니다.”
뒤에서 보고 있던 마법사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런 반응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쯤 되면 배후에 있다는 자들을 보고 싶어.”
로미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아르곤을 시켜 조사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레미가 그렇게 말하니 안심이 돼. 그런데 체들턴 후작이 보이지 않네?”
로미우의 말에 엘런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올란도는 마탑의 대표로서 마탑에서 보낸 파견 병력을 지휘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로미우 녀석의 세력이 약하다고는 하지만, 전장을 이탈하는 건 너무하는군.’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도 마법사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들먹이며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쿠르릉.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해자를 따라 커다란 벽이 솟아올랐다. 졸지에 몬스터들은 해자를 건넌 몬스터와 그렇지 못한 몬스터로 양분되었다.
“지금이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해자를 가로질렀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확인한 로미우는 턱이 빠질 뻔했다.
“저, 저건? 세르넬!”
‘저 자식들이 갑자기 왜?’
엘런도 당황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게이트 옆으로 나 있는 조그만 숲에서 세르넬과 올란도 그리고 마법사 무리가 뛰쳐나왔다.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높은 경지를 이룬 자들이었다.
“이제부터는 각개격파다.”
세르넬의 지시에 맞춰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