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81
81
압도당하다
화르르륵.
커다란 불길이 일더니 해자를 건너온 몬스터를 집어삼켜 버렸다.
마법사들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바닥에서 치솟는 얼음 기둥, 머리 위로 내려치는 벼락, 날카로운 바람. 모든 속성의 마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몬스터들이 모두 정리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우리 전략이 맞아떨어졌구나.”
“공주님의 안목이 뛰어나신 덕입니다.”
올란도가 세르넬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체들턴 경과 마탑의 마법사들이 있어서 가능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세르넬은 높이 솟아 있는 벽을 보았다.
“저 벽 너머에 있는 적들까지 처치해야만 완벽하지 않겠느냐?”
“적들은 이 정도의 마법을 디스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얼른 올라가시지요. 마나 소모가 심한 벽이라 마법사들도 겨우 유지하고 있습니다.”
올란도의 눈짓을 받은 마법사가 레비테이션을 사용했다.
두웅.
마법을 유지해야 하는 마법사들을 제외하고 모든 일행이 벽 위로 올라갔다. 길이 막힌 반대편의 몬스터들은 있는 힘껏 벽을 내려치고 있었다. 하지만 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미련한 것들, 이제 곧 자신들의 머리 위로 무엇이 떨어질지도 모르고 있구나.”
마법사들은 세르넬이 한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콰아앙.
또다시 가지각색의 마법이 연출되었다.
올란도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쉬지 않고 공격 마법을 사용했다. 그에 따라 몬스터의 수도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마법사의 전력을 실제로 보니 정말 압도적이야.”
로미우는 목책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목책 안은 마법사들의 위용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공주님이 아주 불안했나 봅니다.”
“원체 지기 싫어하는 아이이다 보니. 그래도 나는 저 아이가 걱정이야.”
로미우의 말대로 세르넬은 그렇게 넓지 않은 벽에서 위태위태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엘런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저곳의 마나……. 뭔가 심상치 않아.’
엘런은 뷰 마나 포스를 사용하여 벽 뒤를 보았다. 그곳 마나의 흐름이 미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저기 있는 자들이라면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건데.’
그 순간, 갑자기 미묘하기만 했던 뒤틀림이 거대한 균열이 되었다.
엘런이 그 변화를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벽에 있던 마법사 하나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옆에 있던 두 명의 마법사 역시 실드를 사용하지도 못한 채 쓰러졌다.
소란스럽던 목책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어떻게 된 거야?”
로미우도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압도적인 무력을 보이던 프로드의 마법사 3명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당했다.
“저 검은 건 또 뭐고…….”
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벽의 뒤쪽은 이제 완전히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콰앙.
급기야 벽이 부서져 버렸다. 짙은 흙먼지가 일었다. 이 모든 과정이 불과 몇 초 사이에 일어났다.
“세르넬!”
벽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 로미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레미, 부탁…….”
타앗.
로미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런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는 최대의 속도로 벽을 향해 달려갔다. 언뜻 보기에는 공간 마법인 블링크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덕분에 엘런은 순식간에 해자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벽이 무너지면서 벽 뒤쪽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온통 검은색이었다. 마치 대기 중의 마나가 검은색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뭐지?’
끈적끈적해진 마나가 몸에 엉겨 붙었다.
‘느낌은 평소 흑사회가 사용하는 마나와 비슷한데.’
그때보다는 훨씬 더 기분 나쁘고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으아악!”
비명이 어둠 속을 헤집었다. 이곳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라면 세르넬 일행밖에 없었다.
엘런은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다들 정신 차리고 공주님부터 보호해.”
올란도가 두려움에 넋이 나가버린 마법사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정작 공주의 뒤를 노리고 다가오는 검은 마수는 보지 못했다.
“세르넬 공주님!”
그 모습을 본 엘런이 서둘러 방어 마법을 펼쳤다.
슈우웅.
이전 흑사회와의 전투 때처럼 그의 방어 마법이 흡수당해 버렸다.
하지만 아주 잠깐의 시간은 벌 수 있었다.
그 시간 덕에 엘런은 세르넬을 구할 수 있었다.
“어, 어떻게 네가 여기를?”
바닥에 넘어진 세르넬이 엘런을 보며 물었다.
“지금은 그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엘런은 자신 앞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일어섰다.
“이봐, 저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올란도가 평소 그토록 무시하던 엘런에게 질문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오늘 살아서 돌아가긴 글렀다는 사실은 알겠군요.”
그들의 눈에 어떤 존재의 모습이 비쳤다.
머리 위로 치솟아 있는 거대한 뿔, 핏기가 하나도 없는 창백한 피부, 흰자 없이 검은색으로만 가득 차 있는 눈, 등 뒤에서 여러 갈래로 꿈틀거리고 있는 칠흑같이 검은 마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
그들의 눈에 그 존재는 이렇게 비쳤다.
딸꾹.
한 마법사가 그 존재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딸꾹질을 했다.
-저건 설마 네트 님의 영혼?
프로뱅은 저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는 사람이에요?’
-저 존재는 내가 살던 시대를 풍미했던 마법사. 진리에 가장 가까우셨던 분. 네트 님의 혼을 담고 있는 것 같구나.
엘런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희대의 혈마법사 네트라면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법을 위해서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린 자. 대륙에서 흑마법을 금지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 제공자.
이제는 그가 생전보다 훨씬 끔찍한 모습으로 엘런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자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 것이죠?’
-나 역시 궁금하다. 다만 예상하건대…….
프로뱅이 자신의 말을 이어 가려 할 때였다.
-피의 마법이 느껴지기에 와 봤더니 흥미로운 짓거리를 하고 있군.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엘런의 머리에 울렸다. 프로뱅의 말과 같은 방식이었다.
‘뭐, 뭐야? 어떻게 우리 대화에 낄 수가 있는 거지?’
-그런 하찮은 정신 연결에 개입하는 일은 쉬운 일이지. 리치가 몸에 들러붙어 있는 것인가? 재미있군.
목소리는 엘런의 당황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계속해서 울렸다.
-하지만 순수한 피의 마법을 흉내만 낸 그 역겨운 냄새는 숨길 수가 없구나.
그의 검은 눈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윽!”
드래곤 피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그의 눈빛에 엘런은 꼼짝할 수 없었다.
털썩.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은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쓰러진 그들의 눈, 코, 입에서 생기가 빠져나오더니 네트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끄으, 쿨럭.”
결국, 엘런의 입에서도 붉은 선혈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존재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저런 놈을 무슨 수로 막는다는 거지?’
어떤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욕지거리를 내뱉듯 막막함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 나를 좀 살려다오.”
세르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 일인지 그녀는 마법사들보다 더 오래 버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올란도가 넓은 보호 마법을 쳐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젠장, 내가 6서클만 되었어도…….’
항정신계열 마법은 6서클의 마법이었다. 침묵의 로브 덕에 6서클의 위력을 낼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곧 6서클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올란도, 저놈도 이제 얼마 못 가 쓰러질 것 같은데.’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의 마법이 깨져 버리는 순간 2명 역시 의식을 잃을 것이다. 그러면 저기 쓰러져 있는 마법사들처럼 생기를 모두 빼앗겨 빈 껍질이 될 것이다.
-엘런, 도망쳐야 한다.
그때, 프로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자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쿨럭.”
올란도도 한계에 치달은 것 같았다. 그것이 엘런의 마음을 더 급하게 만들었다.
-당장의 내상은 나의 힘으로 치료를 하고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너라면 도망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뱅은 엘런이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목숨을 구해야 그다음도 있는 것이다. 설령 여기 있는 모두가 죽는다 하더라도 이곳의 상황을 알려야 한다. 모든 왕국이 연합하면 저자를 이길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엘런의 고개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 잘 생각했다. 내 힘을 빌려 내상부터 치료하거라.
엘런이 차고 있던 프로뱅의 목걸이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빛은 엘런의 몸으로 스며들어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마나들을 진정시켰다.
“후우.”
엘런은 웅크리고 있던 몸을 폈다. 혼미해져 가던 정신도 돌아왔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프로뱅은 대답하지 않았다. 엘런에게 한 번에 많은 마나를 공급한 탓에 휴식기에 들어간 것이다.
-서로 마나를 공급할 정도로 리치와의 교감이 발달할 것인가?
“그건 당신이 알 바가 아닌 것 같은데.”
엘런의 말에 네트의 눈이 다시 한 번 안광을 내뿜었다.
여전히 강한 압박감이 몰려왔지만, 이번에는 버틸 수 있었다.
-스승의 말대로 애송이들이 여럿 모인다고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아니, 그전에 이곳에서 도망은 가지도 못할 텐데.
엘런이 바닥에 떨어진 스태프를 주워 들었다.
“당신에게서 도망갈 수 있냐고? 아니. 나는 도망을 가지 않을 것이다.”
엘런의 눈에 강인한 의지가 서렸다.
‘저 녀석을 막아 낼 수 있을까?’
존재 자체가 차원이 다른 저자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는 프로드의 왕자와 공주,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있었다. 막아 내야만 했다.
엘런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착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과거의 삶보다 더 떵떵거리며 살고 싶어서 사건들을 해결했다.
하지만 부네르 인신매매 사건과 케니프라 지역의 사건을 거치며 엘런에게는 공명심과는 다른 감정이 생겼다.
이제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열등감에서는 벗어났다. 과거로 회귀하며 자신이 했던 노력에 걸맞은 능력이 생겼다.
이제는 마탑의 시험에 떨어지고 와서 홀로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울지 않아도 되었다.
마법보조사라며 마법사의 멸시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는 그럴 수 있는 힘과 명예와 부가 있었다.
이곳에서 도망치면 된다. 그리고 미친 혈마법사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리면 된다. 난세에는 영웅이 등장하는 법. 대륙의 영웅들이 한데 힘을 모아 저자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이 힘, 명예, 부 모두를 계속해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몸뚱이가, 생존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꽈아악.
스태프를 꽉 쥐었다. 엘런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한 상태였다.
이제는 무력함을 이유로 비겁하게 살아남기 싫어졌다. 그런 방관자가 되기 싫다.
‘차라리 이렇게 싸우다 죽어도 좋다.’
신념이 있다면 그 신념을 다하고 죽는 것이 훨씬 좋다.
-그래서 나에게 덤비겠다는 것이군.
타앗. 타앗.
엘런의 발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어떤 방향으로든 최고의 속도로 움직일 준비가 되었다.
“죽을 때까지 덤비겠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