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85
85
되찾은 이름 (1)
“저, 저, 하찮은…….”
“국왕 폐하 납시오.”
사회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때문에 릭의 뒷말은 묻혀 버렸다.
연회장에 있던 이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커튼이 걷히고 프로드의 국왕 알베르토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금빛 머리카락은 불빛을 받아 더욱 밝게 빛났다.
“위대하신 프로드의 어버이를 뵙습니다.”
아카드 공작이 참가자를 대표로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모두 고개를 들어도 좋다.”
단상 위에 있는 알베르토는 평소보다 훨씬 화려한 복장을 하고 서 있었다. 국왕의 뒤로 로미우와 세르넬도 자리하고 있었다.
로미우는 엘런과 눈이 마주치자 슬쩍 웃어 보였다. 그 옆에 있던 세르넬은 엘런을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럼 다음으로 오늘 연회의 주인공을 소개하겠습니다. 명예의 훈장 수여자 레미 베리타티 남작입니다!”
파앗.
연회장을 비추던 라이트가 꺼지고 하나의 불빛만이 남아 엘런을 비췄다.
짝짝짝.
커다란 박수 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엘런은 의연한 발걸음으로 단상 위에 올라갔다.
“언제 예법을 배운 것이지? 마탑 출신도 아닌데 말이야.”
“도저히 평민 출신이라고는 믿기지 않는군.”
“국왕 폐하 앞에서도 저렇게 태연하다니, 웬만한 귀족 자제보다도 긴장하지 않고 있잖아.”
척.
알베르토의 앞에 선 엘런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신 베리타티가 프로드의 어버이를 뵙습니다.”
알베르토는 사회자가 준비해 둔 훈장을 받아 들고는 엘런에게 다가갔다.
“레미 베리타티, 경은 케니프라의 이상 징후를 앞서 포착하고 그 위협을 막아 내었다. 또한, 미지의 적으로부터 왕족, 나아가 프로드를 수호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에 과인은 명예의 훈장을 수여하니 경은 고개를 들어 이를 받으라.”
엘런이 몸을 일으키자 알베르토가 그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 주었다.
짝짝짝짝.
이번에는 더 큰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왕실 악단의 웅장한 연주가 함께 울려 퍼졌다. 연회장의 모두가 프로드의 어린 영웅을 축하했다.
“신 베리타티, 앞으로도 프로드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알베르토는 엘런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열린 왕실 연회라서 그런지 분위기가 아주 좋아 보이는군. 경들도 영웅의 탄생을 함께 축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바란다.”
연주되던 곡의 템포가 바뀌었다. 귀족들이 경쾌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그렇게 무르익어 갔다.
“다들 신경전이 치열하군.”
“소신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습니다.”
알베르토의 말에 엘런이 얼른 답변했다.
“그렇게 경에게 적대적이던 세력들이 이제는 경과 어떻게든 연을 맺고 싶어 안달이 났군.”
연회장을 보니 단상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춤을 추고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엘런에게 흘끔흘끔 시선을 보냈다.
‘밑바닥이나 위나 다를 게 없네.’
마법보조사로서 마법사의 비위를 맞춰 온 엘런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인연을 맺으려 하는 입장에서 인연을 맺고 싶어 하는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왠지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 베리타티 경은 연회장 뒤의 응접실로 따라오도록 하라. 저들은 로미우와 세르넬이 상대해 줄 것이니.”
드디어 원하는 내용이 나오자 엘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먼저 일어서서 걸어가는 알베르토를 쫓아 단상의 커튼 뒤로 들어갔다.
“여기에 앉도록 하라.”
그곳은 국왕의 개인 응접실이었다. 그곳은 공식적인 응접실처럼 크고 화려하기보다는 작고 정갈한 분위기였다.
“다시 한 번 프로드 왕국을 대표하여 경에게 감사를 표한다.”
“과찬이십니다. 소신의 충성을 다했을 뿐입니다.”
알베르토가 옅은 웃음을 보였다.
“혹, 명예의 훈장 수여자에게 주어지는 특혜에 대해 알고 있는가?”
그의 녹색 눈동자에는 천연덕스러운 모습의 엘런이 비쳤다.
“특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수여자는 과인에게 어떠한 청도 올릴 수 있으며 과인은 그 청을 진지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엘런의 당황한 표정은 깨나 그럴듯해 보였다.
“어떠한 청이라도 괜찮은 것입니까?”
“그렇다. 그러니 경은 마음 놓고 말하도록 하라.”
흑마법을 연구한 자신의 아들을 살려 달라는 마이크 하즈의 청은 받아들여졌다.
그것이 현 국왕의 결정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선례로서 작용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실패한다면 영원한 도망자가 되는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불안감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례로 보나 현재 왕실과의 관계로 보나 알베르토가 들어줄 확률이 높았다.
케니프라의 일을 계기로 귀족들의 여론도 자신에게 우호적이게 돌아갔다. 가장 큰 걸림돌인 올란도도 마침 병상 중에 있었다.
모든 요인이 이번 도박의 승리를 확신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명을 쓰고 위장 마법을 사용하기 싫다.’
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인 이유가 그의 결심을 굳혔다.
“국왕 폐하께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청이 아니라 고백을 하겠다?”
알베르토는 오른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엘런이 털썩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숙였다.
“소신은 가명을 사용하여 감히 국왕 폐하를 능멸했습니다.”
“지금 무어라고 했는가? 가명이라니?”
엘런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소신의 본명은 엘런, 마법 아카데미 132기 입학생입니다. 저는 흑마법을 연구했다는 죄목으로 커리큘럼을 모두 수료하지 못한 채, 에니스에 수용되었습니다.”
알베르토는 계속되는 충격에 도무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엘런……. 들어 본 적이 있다. 릭 체들턴과 더불어 마법 아카데미 최고의 인재였으며, 동시에 에니스를 탈옥한 두 번째 죄수, 그자가 바로 경이었는가?”
수용소 에니스가 건립된 이래로 그곳을 탈출한 사람은 단 2명이었다. 최초의 탈옥자가 바로 에단 그론리드였으며 두 번째가 엘런이었다. 그런 중대한 사실은 당연히 알베르토의 귀에도 들어갔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국법을 어긴 자가 감옥에서 탈출한 것은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다만, 저는 누군가에 의해 모함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조잡한 증거를 만들어 저에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제가 폐하께 드릴 청은 그 일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입니다.”
엘런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와 알베르토의 녹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뒤엉켰다.
“아무리 왕국을 수호한 영웅이라 할지라도 적법하지 못한 행동에 대해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소신이 애초에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면 처벌 자체가 무효가 아니겠습니까?”
엘런의 말이 끝났음에도 알베르토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엘런 역시 알베르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군. 프로드의 영웅이 에니스의 탈옥수였다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수용소를 탈옥한 것이며 본명을 속인 것이며, 이것들은 모두 과인을 능멸하는 일이다.”
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켜 엘런에게 다가갔다.
“하나, 경의 말대로 이 모든 것은 경에게 씌워진 누명 때문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과인은 프로드의 영웅이자 명예의 훈장 수여자인 경의 청을 들어주도록 하겠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폐하!”
그가 엘런을 일으켜 세웠다.
“그 일에 대해서는 내 철저히 조사해 보도록 하겠다. 단, 경의 말과는 달리 아무런 문제점도 찾을 수 없다면 그 대가는 꼭 치러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 * *
“7년 전 마법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흑마법 연구 사건에 대해 철저히 재조사하라.”
대부분의 귀족은 그 말을 듣고 의아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니스의 탈옥 사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자가 거의 없었다.
알베르토가 프로드 최악의 감옥이라는 에니스의 탈옥 사실이 퍼지는 것을 걱정하여 내린 조치였다.
엘런이 아카데미에서 유명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관심 있는 귀족들에게 한해서이다.
다른 이들에게 어떤 아카데미 학생이 흑마법을 연구해 에니스에 수용당했다는 소식은 전혀 특별하지 않은 소식이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자의 죄를 그것도 7년이나 지나서 재조사 하겠다고 선언하니, 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 소식에 당황하는 인물이 딱 1명 있었다.
‘젠장, 갑자기 무슨 일이지? 폐하께서 눈치라도 채셨나?’
그는 바로 그 사건의 주동자인 릭 체들턴이었다. 하지만 재조사를 반대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조사는 착실히 진행되었다.
‘베리타티 경의 말이 진실인 것 같은데.’
조사가 진행될수록 알베르토는 엘런의 말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애초에 엘런이 흑마법을 연구했다고 주장하던 증거 자체가 조잡했다. 당시에는 엘런이 문제를 제기할 마음이 없었기에 채택되었을 뿐이다.
‘증거도 증거지만, 재판 절차에 누군가가 개입된 흔적이 다분하다.’
재판의 진행 속도며 형의 집행까지 모두 비정상적으로 빨리 진행되었다.
누군가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이런 속도를 내는 것이 무리였다.
‘이제는 그 범인만 찾으면 베리타티 경의 누명을 풀어 줄 수 있겠군.’
한편, 체들턴가의 지하 연구실에는 근심걱정이 가득한 표정의 두 사내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조사 경과를 들어 보니 이미 결정적인 것들은 모두 나왔다고 합니다. 이제 범인만 찾으면 끝이라고 하는데,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릭의 말에 자크는 입가를 파르르 떨었다.
“폐하는 어째서 평민 따위가 에니스로 잡혀 간 것에 관심을 가진다는 말이냐?”
그는 불안함을 숨기지 못했다.
“이대로 범인이 우리라고 밝혀진다면, 나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가 위험에 빠질 것이다.”
릭이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는 이 한심한 숙부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그러니까 방법을 강구하자는 것 아닙니까. 아버님도 병상에 있는 판국에 가문의 위기가 찾아오는 것은 절대로 막아야 할 일입니다.”
“젠장!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어떻게 할 건가? 우리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누군가 책임지기는 해야 한다고.”
자크는 조카 앞에서의 체면도 잊은 채, 소리를 꽥 질렀다.
“책임을 져?”
책임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릭은 귀로부터 전기가 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좋은 방법이라도 떠오른 것이냐?”
그런 릭의 모습에 자크는 기대감을 보였다.
나이는 20대 초반에 불과했지만, 가주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 있는 조카였다. 이 녀석이라면 자신을 살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증거를 조작할 때, 숙부님께서 직접 나섰습니까?”
자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놈의 스승이라는 자가 나서서 만들었지. 이름이…… 유진이었지, 아마. 그 녀석 지금 정기 검정 때문에 깨나 골치가 아픈 것 같았다.”
따악.
그 말에 릭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직 하늘이 체들턴 가문을 버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무슨 좋은 방법이 생각난 것이냐?”
“저희를 대신해 모든 책임을 져 줄 사람을 찾은 것 같습니다.”
릭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