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86
86
되찾은 이름 (2)
왕좌를 기준으로 양옆에 귀족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해리포드에 있는 중앙 귀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엘런의 모습도 보였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대전이었지만, 이곳에는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곳의 침묵을 깰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오늘, 7년 전 있었던 아카데미 학생의 흑마법 연구 사건에 대한 재조사 최종 보고를 받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개인적으로 보고를 받았으나, 최종 결과에 대해서는 경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럼 수사관은 보고를 시작하라.”
“예, 폐하.”
이번 사건의 재수사를 담당한 수사관 래리가 사건의 경위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했다.
이미 다들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형식적으로 흘러갔다.
“……이상의 여러 정황과 물증으로 보아, 아카데미 학생 엘런의 흑마법 연구 혐의는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조작된 사건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래리의 설명이 끝나자 성미가 급한 귀족 하나가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범인이 누구란 말인가?”
그는 벼락부자가 된 상인으로, 어느 몰락한 귀족의 양자로 들어가 작위를 물려받은 자였다.
그에게서는 귀족으로서의 기품과 명예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크흠.”
고위 귀족들이 그에게 눈총을 보냈다. 국왕이 있는 자리에서 발언권도 얻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은 큰 결례였기 때문이다.
“얼른 말해 보아라.”
하지만 그는 그 눈총을 조금도 인식하지 않았다. 다행히 알베르토도 서둘러 범인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별말 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엘런의 스승이자 마탑의 4서클 마스터 유진 바머스입니다.”
래리가 범인의 이름을 밝혔지만, 귀족들 사이에서는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유진?”
“바머스 가문의 일원인 것 같은데 처음 들어 보는 이름입니다.”
“별 듣도 보도 못한 자들이 설치고 다니는군.”
유진은 궁정 대신이나 귀족들 사이에서는 전혀 유명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 녀석이 결국에는 일을 저질렀나 봅니다.”
“실력이 없으면 인성이라도 바르든가 해야지, 쯧쯧.”
마법사들 중에서는 그를 아는 자가 종종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유진은 마법보조사와 마법사의 경계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자를 과인의 앞으로 끌고 오너라.”
그 말에 문 앞에 있던 병사들이 신속하게 대전을 빠져나갔다.
“으힉,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그리고 잠시 후, 멀리서부터 겁에 잔뜩 질려 있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덜컹.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몸을 구속당한 채로 연신 소리를 질러 대고 있는 유진이 서 있었다.
‘드디어 나왔군.’
엘런은 유진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 뻔했다. 아르곤을 통해 유진이 범인으로 지목된 사실을 알고 각오를 했었기에 감정을 숨길 수 있었다.
“국왕 폐하 앞이다. 죄인을 안 꿇리고 뭐 하는 것이냐?”
퍼억.
“으아아.”
래리가 멍하니 서 있는 유진의 오금을 걷어찼다. 그러자 그는 양 무릎을 바닥에 꿇게 되었다.
“너의 이름을 고하라.”
유진의 옆에 선 래리가 그의 종아리를 슬쩍 밟았다.
“유, 유진 바머스입니다, 폐하.”
“그래, 바머스. 네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유진의 눈은 독 안에 든 쥐와 같았다. 하지만 그 눈은 알베르토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릭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얼른 말해라.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가는 알지?’
유진은 그의 입 모양을 알아들었다.
“주, 죽,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유진은 이마를 땅에 찧었다.
“어째서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는가? 엘런이라는 소년은 너의 제자였을 텐데.”
“그 아이의 성장이 스승인 저를 능가할 것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 후로도 알베르토가 여러 질문을 했지만, 그때마다 유진은 미리 짜인 대본을 읽는 것처럼 대답했다.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에 복종해야 할 마법사라는 자가 어찌 자신의 제자를……. 자격이 없는 자에게 너무나도 과한 직위를 주었다. 경들은 들어라. 이 시간부로 유진 바머스의 마법사 자격을 박탈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자신에 대한 처벌이 결정되었음에도 유진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은 며칠이 지났음에도 자신의 살갗에 닿아 있던 그 서늘한 감촉을 잊지 못했다.
“살고 싶으면 그냥 입 다물고 있어라. 어차피 피해자가 평민이니까 마법사 직위 박탈 정도로 끝날 거다. 목이 떨어진 채 이곳에 버려지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지?”
유진은 상대가 고작 20대 초반의 청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두려웠다.
‘릭, 저놈이 손을 쓸 줄 알았지.’
오직 거기서 엘런만이 그들 사이에 오가는 눈짓을 알아차렸다.
‘어차피, 나는 이름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누가 죄를 뒤집어쓰는지는 상관없다. 릭, 조금만 더 누려라. 결국에는 너희 둘 다 똑같은 신세가 되어 있을 거니까.’
엘런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그들은 서로의 거래가 성사되었음을 확인하는 고갯짓을 했다.
“끌고 가라.”
병사들은 다시 유진을 대전 밖으로 끌고나갔다.
“경들은 과인이 왜 한낱 평민의 사건을 재조사하고 나섰는지 궁금할 테지.”
알베르토의 시선이 엘런을 향했다.
“바로 레미 베리타티 남작. 그를 위해서이다.”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대체 그와 소년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프로드의 영웅 레미 베리타티, 아니, 엘런 베리타티 경이 바로 그 소년이기 때문이다.”
휘청.
큰 충격에 릭의 몸이 휘청거렸다. 다른 귀족들도 놀란 반응을 보였지만, 릭의 반응은 특히 눈에 띄었다.
“베리타티 경은 흑마법사로 낙인 찍힐 것을 두려워하여 이름을 감춘 채로 활동했다. 과인의 나라를 원망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충신의 모습으로 이 나라를 지켰다.”
알베르토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연설이 절정으로 가고 있다는 표시였다.
“과인은 그런 베리타티 경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고자 이 사건을 재조사했으며 결국에는 진범을 찾았다. 앞으로도 원칙과 정의가 바로 선 왕국을 만들도록 하겠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귀족들은 큰절을 하며 그를 추켜세웠다.
“엘런 베리타티 경, 그대는 모든 억울함을 털어 버리고 지금과 같이 과인을 위해 충성하라.”
척.
“명이 다할 때까지 폐하께 충성하겠나이다.”
* * *
“레, 아니, 엘런 님!”
가빈과 카빈은 호칭이 헷갈린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이름을 부르는 게 안 익숙하지?”
엘런이 슬며시 웃었다.
“그래서 오늘은 보고할 만한 정보가 있어? 얼른 끝내 버리자고.”
그들은 각자가 준비해 온 자료들을 엘런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엘런님께서 말씀하신 공학자들 중 한 명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둘 중에 카빈이 먼저 보고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말한 것은 엘런이 가장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리버였습니다.”
“혹시, 약품을 연구하는 연금술사였어?”
엘런의 눈이 반짝였다.
“맞습니다. 문제는 원래 연금술사라는 작자들이 정상은 아니긴 하지만, 이번 인물은 그 정도가 특히 심하다고 합니다. 솔직한 말로 제가 제대로 찾은 게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카빈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며 끝에 가서는 말을 얼버무렸다.
“괜찮아. 원래 이상한 거로 유명한 자였으니까.”
마법약사 리버.
이름 앞에 붙는 호칭처럼 그는 마법으로 약을 만드는 자였다.
연금술사와 하는 일이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그는 여느 연금술사와는 달리 의학에 특화된 약을 만들었다. 미래에서 사용되던 상비약은 대부분이 그의 작품이었다.
그를 미리 포섭할 수만 있다면, 왕실에도 공급될 약들을 한발 앞서 독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만들어낸 활력제는 효과가 탁월하지.’
그런 미래의 약품들을 몇십 년 이상 앞당겨 쓸 수 있다면, 자신의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성격이 괴짜라는 것만 빼면 완벽할 텐데.’
엘런은 전생에서 그를 한번 만나 본 적이 있었다.
그의 첫인상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얼른 그와 접촉해 봐. 웬만하면 원하는 조건들 다 들어주고. 아마 마정석과 전용 연구실 제공이라는 조건을 내걸면 금방 넘어올 거야.”
연구하는 것 자체를 인생의 낙으로 생각하는 자. 엘런이 아는 리버는 그런 자였다.
“예. 맡겨만 주세요.”
“그럼 가빈 차례인가?”
카빈에 이어 가빈이 앞으로 나섰다.
“엘런님의 지원 덕분에 케니프라 지역의 복구 진행 상황은 양호합니다. 걱정할 한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엘런은 케니프라의 복구 비용을 조금이나마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사비를 이용했다. 휴고라면 그 돈을 헛되이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흑사회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에니스에 그 단체를 아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엘런이 귀를 쫑긋 세웠다.
“흑사회는 흑마법 중에서도 혈마법을 연구하는 학파입니다. 미치광이 혈마법사 네트를 따르는 이들로 그가 사용했던 마법을 계승한다고 합니다.”
광폭화, 몬스터의 정신 지배, 마나를 흡수하는 것. 그 모두가 네트가 생전에 사용하던 마법이었다.
“마이크 하즈 백작에 의해 해리포드 침공이 사전에 저지당하면서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아마 흑사회가 전부는 아닐 거야. 거기에 대해서도 계속 조사해 줘.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던 마법. 그걸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가빈은 엘런이 말한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메모했다. 그것은 그가 최고의 정보원이 될 수 있는 자질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엘런님의 말씀대로 하메론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사했습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며칠간 휴직을 냈던 하메론이 완전히 족적을 감췄습니다. 이는 마탑의 수뇌부들조차 이유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마탑의 고위 마법사, 그것도 신의 재능이라 불리는 하메론의 실종이었다. 이것은 왕국을 발칵 뒤집을 소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빈의 예상과는 달리 엘런은 침착한 반응이었다.
‘이번에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일까?’
가빈은 혹시 엘런이 드래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가빈은 그가 요청한 정보를 이해할 수 없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조사를 해 보면 마치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정보와 상황이 딱 들어맞았다.
‘엘런님의 정체가 무엇이든 저런 분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지.’
가빈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생각을 흩어 버렸다.
“결국 떠난 것인가?”
하메론은 전생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시기에 족적을 감춰 버렸다. 이제 이곳저곳에서 그의 영웅담이 들려올 것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엘런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의문들을 일축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그가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쭉 켰다.
“요즘 쉬는 날도 없이 일했잖아. 특히 오늘은 내 기분이 좋은 날이기도 하고.”
쾅쾅.
그때, 누군가 엘런의 방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엘런, 밑에 준비 다 됐어! 주인공만 내려오면 돼.”
그것은 킨버의 목소리였다.
“준비가 다 됐나 보군. 우리끼리 파티나 즐기자고.”
엘런이 씨익 웃으며 문을 열어젖혔다. 1층에는 그루트와 킨버를 비롯해 킨버 상단의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이름을 되찾은 걸 축하한다, 엘런.”
킨버가 손을 건넸다.
“다들 고마워.”
엘런이 킨버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에게 있어 이날은 근 7년 이래 가장 마음이 편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