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87
87
되찾은 이름 (3)
“엘런, 너는 나한테 너무 말을 안 한다고.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도무지 너의 속을 알 수가 없어.”
파티가 시작되고 몇 시간이 흐르자 엘런의 저택은 난장판이 되었다. 곳곳에 술통이 굴러다녔고 그 술통 옆에는 사람들이 굴러다녔다.
“그러고 보면 아카데미 때부터 도통 모를 녀석이긴 했지.”
“맞아요! 엘런 님의 속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어떨 때 보면 엘런 님은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니까요? 제가 주는 정보가 도움은 되긴 합니까? 예?”
그곳에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엘런이 유일했다. 하지만 정말로 엘런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킨버와 가빈이 아니었다.
“레미, 네 이놈! 아니지 엘런이지, 엘런. 아무튼 어떻게 나한테까지 그런 걸 속일 수가 있던 것이냐? 내 너의 죄를 엄중히 묻겠다!”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몰라도 파티의 시작과 함께 로미우가 등장했다.
그가 등장한 순간 저택의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 사이로 술이 스며들자 딱딱했던 분위기가 이내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물론 결과가 좋다고는 하기 힘들지만 말이야.’
엘런은 레비테이션 마법과 클린 마법을 이용해 술에 취한 사람들을 차례차례 빈방으로 들여보냈다.
‘오늘은 끝까지 마시자고 했는데 정말 끝을 보았구나.’
마지막으로 로미우를 자신의 방으로 옮기고 있을 때, 엘런의 입가로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으음, 아바마마께는 비밀이야. 혹시라도 아시면 천인공노하실 거야.”
침대에 뉘어진 로미우가 잠꼬대를 하듯 말을 내뱉었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뒷정리를 마친 엘런은 저택 밖을 나와 정원을 거닐었다.
밝은 달빛 덕에 따로 라이트 마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준 마나로 기어코 그와 싸웠다는 말이냐?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곳을 거치지 않고 머리로 직접 들리는 소리, 프로뱅의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곳에서 도망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어요.’
엘런 역시 심어心語로 대답했다.
-잘했다. 어쨌든 결과만 좋았으면 된 거겠지. 그리고 위험으로부터 왕국을 구했다니 뿌듯하기도 하구나.
엘런과 함께하면서 프로뱅의 성격도 많이 변화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리치화의 부작용으로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회복하고 있던 것이다.
‘네트라는 자, 정말 무지막지했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분은 생전에도 누구보다 강력한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프로뱅의 침울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하긴 그의 모습이 끔찍하긴 했었죠. 그러고 보니 그가 사용하던 마법 중에 상대의 마법을 흡수하는 마법이 있었습니다.’
엘런은 자신의 마법을 먹어치우던 그 검은 마나를 떠올렸다.
-나도 혈마법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구나. 하지만 얼핏 보니 마나 드레인과 비슷한 것 같았다.
‘마나 드레인?’
엘런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마법이었다.
-흑마법사들이 마나가 담겨 있는 물질에서 마나를 꺼내 쓰던 마법이다. 현상 자체는 그분 이 사용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그랬군요. 그 마법은 잘만 사용하면 유용할 것 같았습니다.’
네트가 사용하던 마나 드레인은 매우 유용한 마법이었다. 엘런은 그 마법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네트 님은 어떻게 부활하신 것일까? 그리고 그 녀석들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 의문은 엘런도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저 역시도 그것이 의문입니다. 마지막에 그는 세 갈래로 나누어져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습니다.’
엘런은 마지막 순간 그 연기가 날아가는 방향을 전부 확인했었다.
‘분명한 것은 그자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꿍꿍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그자의 파편이 무슨 일을 일으킬지도 모르니 얼른 찾아야 합니다.’
엘런의 말대로 한시라도 빨리 그의 파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프로뱅에게는 걱정되는 점이 있었다.
-물론 너의 말이 맞긴 하다만, 나는 현재의 네가 그분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구나.
엘런은 네트에 비해 턱없이 약했다. 이번에도 진리의 문이 아니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매번 그런 기적이 일어나길 바랄 수도 없었다.
‘스승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3분의 1로 쪼개진 그의 영혼조차 상대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의 도움?
이제 휴식기가 끝났으니 마법 지도는 계속해서 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꾸준한 성장은 가능해도 극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는 없었다.
‘엘프의 숲에 있는 지성의 탑. 저는 그곳에 갈 것입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프로뱅은 엘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지성의 탑은 자신이 엘런과 처음 만났을 때 내걸었던 조건이었다.
과거 엘프들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숲, 그곳에 숨겨진 엘프의 거주지.
그 탑이라면 엘런을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
‘드디어 제가 에니스까지 잡혀가게 된 이유를 사용할 때가 되었군요.’
스릉.
프로뱅의 연구실에서 챙겨 나온 날카롭게 벼려진 단도를 꺼내 들었다.
‘서약의 단도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겠군.
프로뱅도 오랜만에 지성의 탑을 방문할 생각에 조금은 들뜬 것 같았다.
‘일단은 폐하께 먼저 말씀드려야 합니다. 폐하의 명령이 떨어지는 대로 곧장 출발할 것입니다.’
-그가 쉽게 허락해 줄까?
‘글쎄요, 그건 부딪혀 봐야겠죠.’
* * *
알베르토 프로드.
그의 이름은 훗날 프로드 왕국의 역사책에 성군으로 기록된다.
대륙에서 마법이 가장 발달한 국가인 프로드,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탑과 귀족의 세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후기 프로드의 국왕들은 신하와의 권력 싸움에 많은 힘을 써야 했다.
왕권이 강해지면 신하들은 반발했고 결국에는 그들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신권이 강해지는 것을 국왕으로서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복잡한 왕권과 신권의 관계 속에서 적절한 조화를 이룬 것이 바로 알베르토 프로드였다.
그는 절대적인 왕명을 내세우면서도 신하들의 반발을 성공적으로 억제할 수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바로 특별 알현 요청권이었다.
한 나라의 국왕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었다. 귀족의 수장인 공작이나 마탑의 탑주, 관원을 지휘하는 재상 정도나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프로드에서는 어떤 귀족이든 국왕에게 알현을 요청할 수 있었다.
물론 일정한 절차를 밟아야 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국왕을 직접 만나 자신들의 입장을 전할 수 있었다.
알베르토는 이를 통해 귀족들의 요구사항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엘런도 비록 단승이기는 하지만, 남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국왕에게 알현을 요청할 수 있었다.
“따로 예복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국왕 폐하를 알현하기 전에 환복하시면 됩니다.”
이주일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알현 절차는 단 3일 만에 완료되었다.
‘베리타티 경의 알현 요청이라고 하였느냐? 얼른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라.’
알베르토가 엘런의 요청을 보고는 다른 일을 제쳐 두고 곧장 그를 궁으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국왕 폐하께 안내해 주겠나?”
익숙한 손놀림으로 예복을 입고 나온 엘런이 말했다. 예복 위에 걸친 침묵의 로브가 흩날리는 모습이 고위 마법사와도 같아 보였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종장 글렌, 그는 엘런이 처음 입궁했을 때도 그를 안내했던 자였다.
엘런도 특유의 편안함을 주는 미소 때문에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엘런이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 글렌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폐하께서는 대전에 계시는 것이 아닌가 보군.”
그가 멈춰 선 곳은 왕궁의 구석에 있어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작은 식당이었다.
하지만 그 문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식들과 프로드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장식에 먼지가 한 톨도 없는 것으로 보아 특별하게 관리하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통상적으로 특별 알현은 이곳에서 하십니다.”
글렌은 조곤조곤하게 대답하고는 식당 문에 노크를 했다.
“들라 하라.”
누가 왔는지 말하기도 전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글렌은 살짝 몸을 옆으로 비켜섰다.
‘이름을 되찾은 후에 폐하를 직접 만나는 일은 처음이군.’
엘런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급스럽게 생긴 문에 손을 올렸다.
끼익.
“왔는가?”
그곳에는 알베르토가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도 엘런의 입궁에 맞춰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단 식사부터 들도록 하지.”
엘런이 예를 올리기도 전에 알베르토가 식사를 권했다.
“요즘 로미우의 성장을 보는 재미로 살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제왕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지더군. 이게 다 경 덕분이네.”
알베르토가 고기를 썰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왕자님이 가지고 있던 능력이 이제야 드러나는 것입니다. 소신은 그저 시기가 맞았을 뿐입니다.”
“허허허, 이래서 경이 마음에 든단 말이지.”
그들은 그 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베르토는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어 즐거웠다.
“그래, 경은 어떤 일 때문에 과인을 보자고 한 것인가? 과인이 보기에는 뭔가 중요한 결단을 내린 것 같은데 말이야.”
길었던 서론 끝에 드디어 알베르토가 본론을 꺼냈다.
“알고 계셨습니까?”
“이래 봬도 사람 보는 안목으로 사는 자리다. 한번 말해보아라. 경의 결심은 무엇인가?”
엘런은 먹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고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폐하, 이번에 저는 제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자와의 전투에서도 운이 조금만 덜 했더라면 저는 물론 왕자님과 공주님까지도 위험할 뻔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준비해 온 말을 시작했다. 프로드의 영웅이니 뭐니 해도 눈앞의 알베르토보다는 한없이 미약한 존재였다. 그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계획이 바뀔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엘런은 그를 설득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저는 아직 그자의 최후를 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그는 세 갈래로 나누어져 흩어졌습니다. 그가 거기서 무슨 짓을 일으킬지는 예상할 수 없습니다.”
엘런은 당연하다는 듯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탁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저는 저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또 흩어진 그자의 파편을 찾아 제거하기 위해서 당분간 프로드를 떠나고자 합니다. 국왕 폐하의 너그러운 처사를 부탁드립니다.”
엘런의 말이 끝나자 알베르토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당분간이라면 얼마를 말하는 것이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몇 달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엘런의 대답을 들은 그의 표정은 더욱 굳었다.
“지금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경에게 불리한 일이 아닌가?”
엘런에게 적대감을 보이던 귀족 세력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호감을 표하기 시작했다. 마탑에서도 그에 대해 재평가를 하겠다고 나서고 있었다.
마법을 전혀 모르는 알베르토가 보기에도 엘런 정도면 고위 마법사는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앞길은 문자 그대로 승승장구였다. 그런데 지금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이 좋은 시기를 놓치게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미 고센 제국을 비롯해 외국에서 경에 대해 위기감을 갖기 시작했다. 해리 포드를 벗어나 혼자서 적의 소굴을 활보한다니. 그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 아닌가?”
이미 케니프라 전투에서 많은 마법사를 잃었다. 하메론도 실종된 상태였다. 여기서 엘런마저 잃는다면 프로드 왕국의 국력은 바닥을 치게 될 것이었다.
“폐하, 폐하의 말씀대로 지금은 제가 입지를 다지기에 더없이 좋은 시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에 복종하는 마법사입니다. 정치 싸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엘런이 알베르토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그 무엇도 꺾을 수 없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저는 영원히 프로드를 지키는 수호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시작점입니다.”
“후우.”
알베르토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의 아쉬움을 모두 털어 낼 때까지 한숨은 멈추지 않았다.
“경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툭.
알베르토는 금으로 된 작은 패 하나를 올려놓았다.
“긴 여행을 떠날 때는 좋은 말이 필수겠지. 이 패를 들고 왕실 마구간을 찾아가면 그곳에서 가장 좋은 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폐하…….”
알베르토는 못내 아쉬운 듯 엘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경의 행적은 프로드 왕실에서 책임지고 감추어 주겠다. 그러니 경은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와 그 성과를 과인에게 보고하라.”
“죽어서라도 하명하신 것을 받들겠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