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88
88
엘프의 숲 (1)
두두두.
푸른 초원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빠르면서도 규칙적인 소리. 그것만으로도 그 말이 명마名馬임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초록색의 잔디를 횡으로 수놓고 있는 흑마黑馬의 주인은 바로 엘런이었다.
알베르토의 말대로 그에게 받은 금패를 들고 가자 마구간에서는 허둥지둥 말을 1마리 꺼내 주었다.
윤기 나는 검은 털, 터질 것 같은 허벅지 근육, 점잖은 태도. 그 말은 척 보기에도 잘 훈련된 말이었다.
해리포드를 떠난 후 일주일간, 쉬지 않고 달렸음에도 흑마는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동부 수림지대인데.’
엘런은 말을 타는 자세에서 지도를 꺼내 보고 있었다.
엘프의 숲.
드래곤과 함께 자취를 감추어 버린 신비의 종족 엘프, 그들이 거주하던 곳이 바로 엘프의 숲이었다.
엘프가 사라진 후에도 그곳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엘프를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이 남겨 놓은 유산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곳을 탐험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비밀스러운 숲은 사람들의 침입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무수하게 펼쳐진 수림은 탐험가로 하여금 방향감을 상실하게 했다.
또 그 수림은 태양 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시간 감각조차 흐려지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야.’
엘프의 숲에서는 어떤 마법사도 성공적으로 수식을 완성하지 못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방해요소가 그들의 수식 계산을 흩트려 놓았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탐험가는 엘프의 숲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겨우 살아 돌아온 이들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다.
결국에 왕국은 엘프의 숲의 통행을 금지시켰고 그 숲은 영원한 비밀의 숲으로 남게 되었다.
-그것은 세계수 때문이다.
프로뱅은 현대 마법사들을 한참 초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엘런도 그의 말이라면 기대감을 가지고 들었다.
‘세계수가 수식을 방해한다는 건가요?’
세계수는 태초의 세계와 함께 태어났다는 나무다.
-그래, 세계수가 있는 지역은 동식물이 번성하고 하나하나 생기가 맴돌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엘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지역의 외곽은 비정상적으로 수목이 우거지고 수식 계산의 방해를 받게 되지. 그것은 세계수의 보호 본능 때문이다. 자신의 가호가 닿는 지역으로 외부인이 침입하는 것을 막는 것이지.
생명의 나무 세계수, 그 보호 본능 덕분에 엘프는 탐욕스러운 인간의 손길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수와 수식 방해. 예상대로 힘든 탐험이겠어.’
프로뱅의 말을 듣고 동부 수림지대에 대한 생각을 하는 동안, 흑마는 엘런을 한 도시 앞까지 데려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나무꾼의 도시 벨라였다.
‘이곳에서 동부 수림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겠지.’
벨라는 동부 수림에서 벌목한 나무와 그곳에서만 나는 과일과 약초를 판매하는 도시였다.
동부 수림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그 덕분에 벨라는 프로드 왕국에서 가장 큰 목재 시장을 가지게 되었다.
엘런은 벨라의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바로 그 목재 시장으로 갔다.
“어떤 나무도 쉽게 베어 넘길 수 있는 도끼입니다!”
“동부 수림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나침반이 있습니다.”
“다양한 건조 식량을 준비해 가세요. 서부의 재료로 만든 식량도 있으니, 취향대로 골라 가세요.”
시장이 열리는 곳에 사람이 몰리게 되는 법.
나무꾼의 도시라는 명성에 맞게, 벨라에는 동부 수림을 오가는 나무꾼들을 위한 용품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수림에서만큼은 일반인들과 다를 게 없는 엘런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따로 수식 계산이 필요 없는 필립스의 체술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칼이랑 나침반 하나씩 주세요.”
“안목이 탁월하군. 바로 준비해 주겠네.”
엘런은 상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했다. 그러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식사를 하고 싶은데 이곳에서 사람이 가장 많은 식당이 어딥니까?”
“자네, 이곳 사람이 아닌가 보구먼. 나무 위의 휴식으로 가 보게. 여기서 거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시장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인다면, 사람이 있는 곳에는 정보가 모이기 마련이다.
상인들이 말해 준 길을 따라 걷다 보니 3층 규모의 커다란 식당이 보였다.
옅은 갈색의 나무 간판에 깔끔한 글씨체로 ‘나무 위의 휴식’이라고 적혀 있었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분 좋은 방울 소리가 엘런을 반겨주었다.
“버섯 수프와 빵으로 주세요.”
주문을 마친 엘런은 곧바로 주위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요즘 돈벌이가 영 별로란 말이야.”
“그러니까 나 따라서 한 번만 가자니까. 한탕 크게 하고 나서 손 털어 버리면 돼.”
“나는 됐다. 그런 거 하다가 경비대에게 잡혀 가지나 마라.”
한참을 듣고 있었지만, 크게 의미 있는 대화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탁.
“식기 전에 먹게나.”
식당 주인이 엘런 앞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몸을 보아하니 나무꾼은 아닌 것 같은데 어쩐 일로 여기에 왔는가?”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걸친 채 물어보자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것이 이곳의 장사 수완이라면 수완이었다.
“그냥 여행자입니다. 동부 수림지대를 탐험해 보려고 하죠.”
“동부 수림지대라……. 참 매력적인 곳이지. 자네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 왔어. 다들 지쳐 떨어져 나가기 일쑤였지만.”
엘런은 식당 주인의 몸을 보았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탄탄한 근육, 손바닥에 배겨 있는 굳은살, 여기저기 나 있는 옅은 흉터. 필시 왕년에 이름을 날렸던 나무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외곽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프의 숲, 그곳까지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엘런의 말에 주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수림지대 외부가 아니라 내부라고? 자네,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는 겐가? 그곳은 베테랑 나무꾼들도 절대 들어가지 않는 곳이야.”
동부 수림지대는 외곽 지대와 엘프의 숲으로 나뉜다.
벌목을 하고 과일이나 약초 채집을 하는 것들은 모두 외곽 지대에서 하는 것이었다. 출입금지 지역으로 지정된 곳은 내부인 엘프의 숲이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될 수 있다면 베테랑 나무꾼과 동행을 하려고 합니다.”
엘런이 말하는 내용이 흥미로웠는지 주변에 있던 몇몇 나무꾼들도 관심을 가졌다.
“거기가 괜히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된 것이 아니야. 괜한 영웅 심리로 아까운 목숨 버리지 말게나.”
“쯧쯧, 또 한 사람 죽어 나가겠군.”
“나무하러 갔다가 시체라도 보면 얼마나 기분 나쁜데.”
관심을 기울이던 나무꾼들도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신들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더군다나 자네는 몰래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니 왕실에서 만들어 놓은 통로를 사용하지 못할 것 아닌가? 너무 위험하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런은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휴우, 그 눈빛을 보니 내가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군.”
주인은 자신의 허리에 걸려 있던 나침반을 꺼냈다.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게.”
“이게 무엇입니까?”
엘런은 나침반을 받아 들며 물었다.
이곳저곳에 묻어 있는 손때가 이 나침반은 아주 오랫동안 사용됐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엘프의 숲에 가까워질수록 일반 나침반은 말을 듣지 않을 걸세. 그래서 숙련된 나무꾼들도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리지.”
“이건 다르다는 말씀입니까?”
엘런은 그 나침반을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일반 나침반처럼 바늘 축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떠 있었다.
“그건 나의 조상님부터 사용해 오던 것이네. 그러니까 나침반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었다는 말이지.”
“그렇게 귀한 것을 제게 주셔도 되겠습니까?”
식당 주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대대로 물려 오던 것이었는데 난 보다시피 혼자라네.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이었는데 자네가 들고 가게.”
주인이 준 나침반이 핑그르르 돌았다.
“아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 번씩 그렇게 제자리에서 돌 때가 있어. 그래도 방향은 정확하니까 믿어도 좋네.”
주인은 머쓱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유용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조심이나 다녀오시게.”
주인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주방으로 가 버렸다.
-호오, 이렇게 유용한 게 있었단 말인가?
프로뱅이 그 나침반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의 시대에는 이런 것이 없었겠군요.’
-방향을 표시해 주는 것이 있었다면 그렇게 길을 헤맬 일도 없었겠지. 그리고 이 나침반에서는 뭔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뭔가를 떠올리고 있는 듯 프로뱅은 아무 말이 없었다.
딸랑.
프로뱅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식당 문이 열렸다.
“하아, 하아.”
그 사람은 여기까지 뛰어왔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성큼성큼.
주위를 빠르게 훑은 그자는 혼자 앉아있는 엘런을 향해 걸어왔다.
그러고는 엘런의 옆자리에 앉았다.
누군가 본다면 일행으로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적대감이나 살기는 느껴지지 않는데?’
순간적으로 신경을 날카롭게 세운 엘런은 기운을 누그러뜨렸다.
‘뭐 하는 녀석이지?’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무슨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책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덜컹.
이번에는 식당 문이 거칠게 열렸다.
어찌나 거칠게 열렸는지 방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손님들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들은 하나같이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상급 소드 익스퍼드?’
상급 소드 익스퍼드가 5명이었다. 하급 소드 마스터급도 1명 끼어 있었다.
변방 도시에 있기에는 꽤나 화려한 집단이었다.
그들은 식당 안을 훑어보더니 다시 밖으로 나갔다.
엘런은 자신의 옆에 앉은 후드와 저들 사이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렇게 된 것이군.’
무엇인가 눈치채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나설 생각도 없었다.
저 정도 집단과 싸움을 벌이면 분명 소란이 일 것이었다. 최대한 정체를 숨기며 돌아다녀도 모자랄 판국에 애써 소란을 일으키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꾸벅.
그들이 떠난 것을 확인하자 후드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초록색?’
엘런의 눈에 순간적으로 초록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초록색 머리는 대륙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색깔이었다.
하지만 후드는 엘런이 물어볼 틈도 없이 식당 밖으로 후다닥 나가 버렸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기분 좋은 바람이 일렁였다.
-……런.
엘런은 그 신비한 기운에 자기도 모르게 심취했다.
-엘런!
프로뱅의 호통 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몇 분은 더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네, 네?’
-정신을 어디다 놓고 있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딴생각을 좀 하느라……. 그런데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다음 프로뱅이 한 말에 엘런은 먹고 있던 수프를 내뿜을 뻔했다. 그의 말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저 녀석, 엘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