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91
91
엘프의 숲 (4)
* * *
엘런의 눈은 호기심을 가득 담아 연신 빛을 내고 있었다.
‘정말 다른 세상이군.’
엘리너스는 인간들의 생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처음 보는 식물들이 도처에 즐비했고 그곳에 있는 엘프들은 그 자연과 조화롭게 보였다.
특이한 점은 건물의 개수가 몇 개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특정한 건물을 짓고 사는 것이 아니었다. 나뭇가지 사이에 열린 커다란 나뭇잎이 그들의 침대였다.
건물은 공방이나 대장간, 도서관 같이 정말 필요한 것만 있었다.
자칫하면 중부 대륙에 있다는 원시 야만부족과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우아함은 그런 생각을 전혀 들지 않게 했다.
-이곳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구나. 모든 게 멈춰있는 것 같다.
프로뱅도 자신만의 회상에 젖어 있었다.
“저쪽은 우리가 음식을 저장해 놓는 곳이에요. 세계수 님의 축복으로 부족함 없이 살고 있지만, 몇 달 분량의 음식은 저장해 두고 있어요.”
페리스가 옆에서 재잘재잘 설명을 해 주었다. 그녀도 이방인의 방문이 내심 즐거웠다.
“페리스!”
그녀가 한창 대장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을 때,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페리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그녀와 같은 초록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서 있었다.
페리스가 귀여운 외모였다면 그는 귀공자 같았다.
대륙 어느 왕국의 왕자도 저토록 기품 있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러셀 오라버니!”
페리스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러고는 곧장 그에게로 달려가 안겼다.
“걱정했단다.”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주었으니 괜찮다.”
잠깐의 따뜻한 상봉을 끝낸 러셀은 엘런에게도 꾸벅 인사를 했다.
“페리스가 신세를 졌다고 하던데 정말 고맙소.”
“괜찮소. 마침 나도 이곳을 찾아가던 중이었기에 안내를 받을 수 있었소.”
첫 만남부터 어린아이 같았던 페리스에게는 자연스럽게 여동생을 대하듯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러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그녀와는 전혀 달랐기에 격식을 차린 말이 나갔다.
“아, 인사가 늦었군. 반갑소, 엘리너스의 열 번째 수호자 러셀이라고 하오. 엘프의 낙원에 온 것을 환영하오.”
러셀이 엘런에게 악수를 청했다.
“프로드 왕국의 마법사 엘런이라고 하오. 낯선 이방인을 이토록 환영해 주니 나야말로 고마울 다름이오.”
맞잡은 그의 손에서 딱딱한 굳은살이 느껴졌다.
수도 없이 많은 활을 쏘아왔다는 증거였다.
‘이자에게서는 정령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페리스에게서는 항상 살랑거리는 바람이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때도 실프의 기운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감정에 쉽게 동화되는 탓에 그녀의 상태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러셀에게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엘프가 성장할수록 정령을 다루는 능령이 커지게 된다. 그만큼 정령의 기운을 숨길 수 있게 되고 감정의 동기화도 조절할 수 있게 되지.
그러고 보니 주변의 다른 엘프들에게서는 정령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페리스에게서 실프를 느낄 수 있던 것은 그녀가 아직 어려서였던 것이다.
-그나저나 저 녀석은 기억이 나는 것 같군. 엘프 로드의 손자였나?
그 말을 들으니 러셀의 기품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럼 저 녀석도……?’
엘런은 깜짝 놀라며 페리스를 쳐다보았다.
엘런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철이 없던 건가?’
엘런은 혼자서 뭔가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활을 곧잘 쏘아서 기억에 남는다.
프로뱅의 말이 머리에서 들리는 순간이었다.
러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홱.
그는 엘런의 목걸이를 잡아채 버렸다.
투둑.
프로뱅의 목걸이가 끊어지며 그의 손에 들어갔다.
“이게 뭐 하는 짓이오?”
차갑게 변한 엘런의 눈에서 러셀을 향한 살기가 풀풀 풍겼다.
“이것은 어버이의 법칙에 어긋나는 물건인 것 같군. 위험 물건으로 판단해 현장에서 압수하도록 하겠소.”
러셀은 천으로 프로뱅의 목걸이를 감싸고는 그의 품에 넣었다.
“오라버니, 아무리 위험 물건이라도 그렇게 무례하게 가져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에요.”
페리스가 노기를 띤 얼굴로 말했다.
“너는 아버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벌써 잊은 게냐? 이런 물건을 엘리너스로 들이다니!”
러셀의 감정이 동요되었는지 주변에 거친 바람이 불었다.
“그건 위험한 것이 아니니 돌려주시오. 내가 보증하겠소.”
엘런은 억지로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그때의 인간과 똑같이 말하는군.”
하지만 러셀은 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힘으로 빼앗도록 하겠소.”
“피할 수 없는 전투라면 진지하게 임하겠소.”
“안 돼요, 엘런 님! 오라버니도 그만하세요.”
상황이 격해지자 페리스가 둘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주변의 엘프들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화아악.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엘런의 허리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이건?’
그 빛의 정체를 확인한 엘런은 그것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서약의 단도였다.
원래는 매끈했던 검신의 옆면에 알아 볼 수 없는 글자들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전투 직전보다 지금 러셀의 표정이 더욱 굳어 있었다.
“엘리너스의 첫 번째 수호자이자 모든 엘프의 보호자 테오스는 이 검을 가진 인간에게 깊은 은혜를 표한다. 그는 나의 벗이자 모든 엘프의 벗으로서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다.”
페리스가 더듬더듬 그 글자를 읽어내려 갔다.
“이거 싸울 것까지도 없겠는데? 어서 내 목걸이를 돌려주겠소?”
러셀은 침울한 표정으로 그에게 프로뱅의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이음쇠가 끊어졌던 목걸이는 어느새 말끔히 복구되어 있었다.
-저런 무례한 녀석을 보았나!
엘런이 목걸이를 착용하자마자 프로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머릿속에서 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더 어색했다.
“이거 오랜 벗을 만나는가 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더니 처음 보는 이가 있군.”
갑자기 등장한 그 엘프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활과 검, 창으로 무장하고 있는 엘프들이 줄지어 있었다.
-로드다.
프로뱅의 그 한마디로 그의 존재감이 모두 설명되었다.
그리 큰 몸집이 아님에도 태산이 서 있는 것 같은 존재감.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깊은 눈.
그것은 엘프 로드만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aura였다.
“저희들이 보호자이시여.”
주변에 있는 엘프들이 모두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올렸다.
엘프는 집단생활을 하지만 조직 생활과는 거리가 먼 종족이었다.
그들에게는 계급도 나이도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들이 충성을 바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엘프 로드, 눈앞에 있는 저자였다.
“프로드 왕국의 마법사 엘런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낯선 이방인이여. 엘리너스의 첫 번째 수호자 테오스라네.”
그의 인자한 웃음에도 엘런의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국왕을 몇 번이나 만나왔던가.
하지만 그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이토록 긴장되지는 않았다.
“그대는 어찌하여 오랜 벗의 물건을 들고 있는 것인가?”
“그는 저의 스승이셨습니다.”
테오스는 옛 추억을 떠올린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나도 그의 소식이 듣고 싶군. 내가 자리를 마련해도 괜찮겠나?”
“예, 물론입니다.”
* * *
‘엘프에 대한 생각이 꽤 많이 바뀌는 것 같아.’
엘런은 자신의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엘프를 보고 생각했다.
테오스가 마련한다는 자리는 조촐한 식사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엘런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연회를 열었다.
엘리너스의 엘프들은 술과 고기, 각종 과일을 가지고 와서는 연회를 즐겼다.
‘그래도 인간들보다는 훨씬 점잖군.’
그들이 추는 춤은 몸을 살랑살랑 흔드는 정도였다.
술도 독하지도 않고 깔끔하게 흘러들어 갔다.
과일을 담은 것인지 향긋함까지 더해져서 아주 맛이 좋았다.
특히 그들의 감정에 동화된 정령들도 함께 노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들만의 술과 분위기에 취한 엘런은 기분이 살짝 들뜨는 것 같았다.
“이렇게 연회를 연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군. 다들 즐거워 보여서 나까지도 즐거워지는 것 같네.’
테오스가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엘프가 충성을 바친다고 해서 그것이 계급화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것에 대한 무한한 감사의 의미였다.
그렇기에 연회장에는 로드를 위한 상석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엘프들과 마찬가지로 함께 즐기는 것이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엘런의 말에 테오스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겠군. 마음껏 즐기게나. 그대 역시 나의 은인이니. 내 손녀딸이 신세를 졌다고 하더군.”
엘런과 테오스는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정중했다.
“아닙니다. 다 하늘의 뜻이 아니었겠습니까?”
“허허, 하늘의 뜻이라……. 나의 손녀가 바깥세상에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것부터가 그 뜻의 시작인 것인가?”
호기심과 모험심은 인간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신체를 가진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은 바로 이것들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페리스는 별난 엘프였다.
보통의 엘프는 평생을 엘리너스에 살면서도 부족함 없이 살아간다.
하지만 페리스는 어릴 때부터 바깥세상이 궁금하다며 엘리너스를 나가곤 했다.
“그럼 엘프의 숲 외곽지대의 길을 아는 것도 그런 것 때문이었습니까?”
“그렇다네. 우리들 중에서 그 아이만큼 바깥 길을 잘 아는 사람은 없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절묘했다.
“그래도 인간 세계까지 나간 적은 없었거늘. 호기심은 때문에 큰 화를 입을 뻔했어.”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페리스를 보았다.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다른 이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자, 이제는 자네 이야기를 들려주겠나, 오랜 벗이여.”
테오스의 손가락이 프로뱅의 목걸이에 닿았다.
-칫, 그 얼굴은 아직도 그대로이군요.
“하지만 그대는 참으로 많이 변했군.”
프로뱅이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테오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일이 많았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대의 원한이 그대로 전해지는군.”
그의 위로가 전해진 것일까. 프로뱅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상처를 추스를 시간이 필요할 듯하군. 그렇다면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눠 보겠나?”
테오스가 자신의 눈을 바라보자 엘런은 얼른 눈을 돌렸다.
꼭 마음속을 읽히고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 나는 그대의 마음을 읽을 수 없으니 너무 심려치 말게나.”
‘저런 말을 하면서 심려치 말라니.’
엘런은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불안했다.
“그대는 어찌 지성의 탑을 찾으러 왔는가?”
그 질문에 엘런은 그냥 숨기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숨기려 해도 그가 모두 안다면, 굳이 애를 쓰며 숨길 필요도 없었다.
그런 엘런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테오스도 싱긋 웃었다.
“난 그저 오래 산 덕에 그대의 욕망과 상황이 모두 추측되는 것뿐이라네. 진정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분은 따로 있지. 지성의 탑에서 그분을 만나게나. 그럼 그분이 판단을 내려 줄 걸세.”
엘런의 눈에 기대감이 서렸다.
“그분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