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92
92
정령술 (1)
* * *
‘스승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연회가 끝난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엘런이 물었다.
-어떤 것을 말이냐?
‘지성의 탑에 들어가려면 시기를 맞춰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는 테오스에게 지성의 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오는 길이었다.
프로뱅이 말한 지성의 탑은 어떤 건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세계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쩐지, 탑에서 거주하는 엘프라니. 상상이 되지 않긴 했어.’
그리고 그 지성의 탑에 들어가는 것은 1년에 딱 한 번만 허락되었다.
다행히 그 시기가 두 달 후면 돌아온다고 했다.
운이 안 좋았으면 꼬박 1년을 이곳에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사실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는 그 탑에 대한 모든 것이 흐릿하구나. 오로지 내가 지성의 탑에 가서 강해졌다는 사실만 명확하게 기억난다.
프로뱅은 제자에게 그 사실을 말하는 것이 창피해서 숨겼던 것이다.
-로드의 말대로 정말 그분이라는 자가 지워버린 것인가?
테오스가 말하길, 지성의 탑의 그분은 자신을 기억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였다.
‘그래도 덕분에 엘프와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하기도 합니다.’
테오스는 지성의 탑이 열릴 때까지 그가 엘리너스에서 거주하는 것을 흔쾌히 허락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엘런은 엘프와 함께 생활했다.
엘런에게 따로 방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지금 누워 있는 곳도 커다란 잎사귀였다.
그 잎사귀는 그가 몸을 눕히고도 여유가 남아 몸을 덮을 수도 있었다.
그에게는 뜻밖의 두 달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누군가는 휴가가 생겼다며 이 낙원의 평화를 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엘런의 성장 의지는 결코 멈추는 일이 없었다.
그는 엘프들에게서 하나라도 더 배워 가기 위해 애를 썼다.
이따금 그들의 사냥을 따라 나간 적도 있었다.
엘런은 페리스를 보고 엘프도 육식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엘런의 생각대로 그들은 육류를 즐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식사마다 필요한 만큼의 육류를 곁들였다.
그들과 함께 나간 사냥에서 엘런은 엘프들의 궁술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들의 화살은 600미터가량 떨어진 사냥감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명중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하는 동물들을 위해서라도 즉사를 시키는 것이 미덕이라고 했다.
경쾌한 활시위 소리와 시원한 파공음, 그리고 목표를 꿰뚫는 타격음.
그들이 사용하는 활은 정말로 매력적인 무기였다.
엘런은 그 궁술에 흥미가 생겨 활을 배워 보고 싶다고 했다.
“자네 정말로 재능이 전무하군.”
그가 활을 쏘는 것을 본 가르노아가 한 말이었다.
과녁에 적중하지 않더라도 활을 들고 쏘는 것만 봐도 재능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엘런은 앞으로 궁술만 연마한다고 하더라도 일반 궁병 수준에 머물 재능이었다.
아무리 노력에 재능을 가진 엘런이라고 해도 고작 그 수준이 되기 위해 활을 연습하고 싶지 않았다.
‘재능과는 척을 두고 있는 몸뚱이군.’
일찌감치 활에 미련을 버린 엘런은 사냥이 아닌 채집을 따라다녔다.
엘프의 숲에는 전 세계의 모든 식물이 모여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서식하는 환경이 달랐지만, 이곳에서만큼은 환경에 구애받지 않았다.
엘런은 그들을 따라다니며 식물들에 대해 공부했다.
사냥에 나가 활을 쏘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따라갔다.
‘이제 슬슬 눈에 익기 시작했다.’
그는 먹을 수 있는 식물, 독성이 있는 식물 등 전 대륙의 식물을 직접 보고 채집할 기회를 가졌다.
식물학자들의 꿈과도 같은 것을 그가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고대어를 공부했다.
해가 떨어지면 활동량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엘프와 달리 인간은 낮과 밤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밤마다 엘프의 도서관에서 빌린 고대어와 고대 마법에 관한 책을 읽었다.
엘리너스에는 고대어에 관한 자료가 풍부했다.
엘프는 인간에 비해 10배 이상의 수명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들이 역사책을 통해 공부하는 과거의 일도 그들에게는 한 편의 기억에 불과했다.
신화시대라고도 불리는 고대는 그런 엘프에게도 먼 역사이기는 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 세상에 있는 자료들 보다는 훨씬 질 좋은 자료를 구할 수 있었다.
이렇듯 엘런은 단 하루도 공부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너스에서 한 모든 활동 중에서 엘런이 가장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할아버지를 배웅하고 오느라 늦었어요. 죄송해요.”
페리스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대답했다.
“테오스 님이 어디 가셨어?”
“아, 요즘 들어 북쪽에서 식물들이 냉해를 입는 일이 발생해서요. 조사 차원에서 할아버지께서 가셨어요.”
이곳에서 로드는 왕이 아니라 보호자의 역할임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얼른 시작하자고.”
“누가 인간 아니랄까 봐. 성질이 매우 급하시군요.”
엘런은 하루도 빠짐없이 페리스와 만나고 있었다.
“이전에 이어서 오늘은 정령의 기운을 느끼는 걸 해 볼 거예요.”
엘런이 그녀에게 배우고 있는 것은 바로 정령술이었다.
페리스는 정령 친화도가 매우 높은 탁월한 정령사였다.
그녀는 엘런이 정령술에 관심을 갖자 자청해서 그에게 정령술을 가르쳐 주었다.
“눈을 감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거예요. 그들의 현상이 아니라 그들을 느껴야 해요.”
며칠째 같은 것만 반복하고 있었다.
엘런은 여전히 그들을 느끼지 못했다.
페리스는 실력 있는 정령사도 몇 주는 걸리는 일이니 마음 편히 먹으라고 했다.
‘괜한 집중은 그들을 느끼는 것에 방해된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상태로 만들어야 해.’
엘런은 눈을 감고 모든 긴장을 풀었다. 시각이 차단되자 다른 감각들이 깨어났다.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부터 혈액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소리까지 들렸다.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도 느껴졌다.
엘런은 그 감각에서도 더욱 멀어졌다.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꺄르르.
자신의 의식이 깨어 있는 건지 아닌지조차 구분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꼬마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의식이 멀어질수록 그 소리는 점차 선명하게 들렸다.
살랑.
가볍게 부는 바람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여 놓았다.
그 바람은 개구쟁이 같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분명 눈을 감고 있음에도 그 모습이 보였다.
사악.
우락부락한 몸을 가진 작은 사내, 불꽃으로 된 새, 푸른색의 작은 소녀의 모습도 보였다.
꺄르륵.
엘런이 그들을 알아차리자 그들은 더욱 즐겁게 웃었다.
‘저들이 정령?’
그가 생각을 하는 순간 모든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촉각, 청각이 돌아오더니 마침내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시각까지 되찾았다.
색다른 경험을 한 그는 한동안 멀뚱멀뚱 앞만 쳐다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에 눈이 동그래져 그를 쳐다보고 있는 페리스가 들어왔다.
그녀는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입은 뭔가를 말하고 싶어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괜찮아?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엘런이 그녀의 상태를 묻자 그제 서야 그녀의 두 눈이 깜빡였다.
“어, 어떻게……?”
“뭐라고?”
“어떻게 정령을 느낀 거죠?”
그녀는 소리를 치다시피 말했다.
“나 방금 정령을 느낀 거야?”
엘런이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 느꼈던 그 희미한 감각이 바로 정령의 기운이었단 말인가.
“저도 일주일은 걸렸었는데.”
페리스는 여전히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정령술을 배울 수 있는 거고?”
검술, 마법, 연금술 등 어느 분야든 간에 재능이 필요 없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정령술이라는 분야는 재능이 전부였다.
정령 친화력이라고 불리는 그 능력은 정령계와 교류할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한다.
만약 이 정령 친화력이 부족해 정령의 기운을 느낄 수 없다면, 애초에 물질계에 존재하지도 않는 정령의 힘을 빌릴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스승님은 엘프를 만났을 때, 정령술을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나요?’
며칠 전, 엘런이 프로뱅에게 물었던 말이었다.
-당연히 가르쳐 달라고 했지. 정령술 만큼 매력적인 것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나는 그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어. 정령 친화력이 낮아서 그들의 힘을 빌릴 수 없다고 하더구나.
이어진 프로뱅의 대답은 그것이었다.
프로드 왕국의 대마법사 칭호까지 얻은 프로뱅조차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배우지도 못했다.
재능이 전부인 이 분야에서 엘런은 자신의 재능을 찾은 것이다. 그것도 엘프조차 뛰어넘는 정도의 것이었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지만, 그래요. 정령을 느꼈으니 이제 그들과 계약을 맺을 수 있어요.”
페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계약?”
“자신만의 정령을 찾아 그와 계약을 맺는 걸 말해요. 계약을 하면 정령계의 힘을 훨씬 안정적으로 가져올 수 있죠.”
정령술의 가장 큰 고비라고 할 수 있는 곳을 통과했기 때문에 다음 단계는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물론, 그 계약은 지금 바로 할 수는 없어요. 정령의 기운을 느꼈다고 해도 아주 일시적이었거든요. 앞으로 며칠은 더 숙달해야 해요.”
엘런이 그들을 느낀 것은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보다 빠르지만, 엘런 님에게 맞는 정령을 찾는 것을 서두르려면 이론도 병행해야겠어요.”
페리스는 뛰어난 학생을 보는 선생님의 눈빛으로 말했다.
“당장 숙달할게.”
* * *
처음으로 정령을 느끼고 4일이 지났다. 이제 엘런은 자유롭게 그들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하단 말밖에 안 나오는군요. 이제 계약을 해도 되겠어요.”
페리스는 4대 정령 이외의 다른 정령도 인지하는 엘런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계약에 따로 필요한 게 있어?”
“그런 건 없어요. 엘런 님은 저처럼 바람의 기운을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실프와의 계약을 위한 진을 그릴게요.”
엘런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페리스는 그 주위로 복잡해 보이는 진을 그려 나갔다.
마법진처럼 수식을 형상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 같아 보였다.
“이걸로 된 것 같네요.”
계약을 위한 진에 마지막 점을 찍은 페리스가 허리를 폈다.
“따로 주문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냥 실프와의 계약을 떠올리기만 하면 돼요. 물질계와 정령계의 연결은 이 진이 도와줄 거예요.”
엘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계약을 통해 그는 마법이 아닌 새로운 힘을 개척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끝이 없이 성장하는구나.
프로뱅은 엘런을 보며 뿌듯해했다.
‘침착하려 했지만, 들뜨는 마음은 어쩔 수 없네요.’
-이것으로 나도 개척하지 못한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너에게 배울 게 많아지겠구나.
‘잘 끝내겠습니다.’
프로뱅과의 대화를 마친 엘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가 처음으로 정령을 느꼈을 때처럼 차례차례 감각을 하나씩 닫았다.
이제는 그 경지에 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프.’
엘런은 그 이름을 계속해서 외쳤다.
정령계의 실프들이 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기이잉.
페리스가 그렸던 진이 환한 빛을 내며 작동했다.
그 진은 두 세계 사이의 통로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페리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 엘런 님에게 맞는 실프가 응답하기만 하면 되겠네요.’
정령의 계약이라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평생을 함께하는 정령을 구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의식이었다.
‘부디 좋은 아이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핑그르르.
그때 갑자기 엘런의 손목에 있던 나침반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저게 왜……?”
예상치 못한 상황에 페리스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 회전은 멈출 낌새도 없이 계속되었다.
화악.
쨍그랑.
계약이 끝났음을 알리는 듯 진의 빛이 사그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엘런의 나침반도 깨져 버렸다.
“으음?”
의식이 돌아온 엘런은 주변 상황부터 살폈다.
“괜찮으세요?”
페리스의 질문에 엘런은 자기 몸을 훑어보았다. 문제가 있는 것은 없었다.
“문제없어. 그런데 계약은 성공한 거야?”
엘런의 질문에 페리스의 가는 손가락이 한 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공간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바로 계약진이 만들어 놓은 통로를 따라 정령이 넘어오고 있다는 말이었다.
일렁거림이 잦아지고 드디어 엘런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엑?”
“아.”
엘런과 페리스는 그 정령을 보고는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