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95
95
서리의 이시르 (2)
* * *
“서리의 이시르, 그를 막을 수 있는 생각이 떠올랐소.”
“그게 무엇이오?”
첫 만남 이후로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러셀이었지만, 수호자답게 엘리너스의 안위에 있어서는 사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건 그대를 비롯해 모든 엘프의 동의를 구해야 할 것이오.”
“얼른 말해 보시오.”
긴 수명만큼이나 모든 일에 여유롭게 대하는 그들이었으나 지금 같을 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대들은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없어서 고전하고 있소. 그 사거리만 확보하면 되는 일이오. 바로 불과 바람을 이용하는 것이오.”
러셀은 엘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불과 바람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본디 불은 태울 것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는 법. 그의 힘이 닿지 않는 네 지점에 불을 놓고, 바람으로 불길을 조정하여 그에게로 모으는 것이오. 그는 한기에서 태어난 존재라오. 그러니 그 상성인 열기를 이용한다면 승산이 있소.”
분명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가장 문제였던 사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상성을 이용하여 화력을 올리기까지 했다.
“그것은 안 될 일이오.”
엘런이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공의 말대로라면 북쪽 숲의 반 이상이 타 버리고 말 것이오.”
엘프는 숲을 사랑하는 종족이다.
애초에 존재 목적이 세계수와 그의 권능을 가꾸기 위함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숲을 파괴하는 것은 용납은 물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육식을 하기 위해 사냥을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들은 숲의 균형을 유지하는 존재.
그 때문에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범위에서의 사냥과 채집만 허락되었다.
하지만 숲을 태우는 것은 그 균형을 모조리 깨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대들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한 것이오.”
“그래, 나의 대답은 거절이오.”
엘런의 말에도 러셀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대로 두고 보고만 있을 것이오? 그대에게는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방법이 있소?”
러셀은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엘런의 말 대로였다. 수호자들이 언제까지고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라버니…….”
옆에 있던 페리스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러셀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엘런이 말한 전략에 섣불리 찬성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 숲을 태워도 될 것인가.
그녀는 그저 이런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원망스러웠다.
“아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우리가 살기 위해 숲의 조화를 깨뜨릴 수 없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엘런의 말에 혹했던 자신을 타이르기 위함이었다.
‘정말 답답한 족속들이군.’
인간인 엘런은 그런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필요하면 화공을, 어떨 때는 수공을…….
그것이 자연을 이용하는 전략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토록 합리적인 전략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오.”
러셀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크악.”
“커헉.”
더 이상 버티지 못한 파수꾼 2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럴수록 러셀의 굳은 마음은 점차 흐트러지고 있었다.
쿵.
북쪽에서 들린 소리에 러셀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할아버님!”
그곳은 수호자들이 이시르를 잡아 놓고 있는 방향이었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냉기가 몰아쳤다.
쩌저적.
나무와 수풀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급격한 온도 저하로 상처 부위가 얼어붙은 엘프들이 신음을 내뱉었다.
다행히 추슬러진 것인지 더는 냉기가 몰려오지 않았다.
“이봐, 이러고도 그대는 그대의 신념만을 지키고 있을 것이오?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생각해 보란 말이야!”
엘런은 상황이 급박해져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고지식하게 있는 러셀을 보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
‘엘프로서의 본분을 지킬 것인가. 엘프의 생명을 살릴 것인가.’
고민에 빠졌던 러셀은 결정을 내린 듯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좋소. 그대의 전략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시오. 모든 지원을 약속하겠소.”
“괜찮으신가요?”
페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엘프 로드의 손자라고 해도 그에게 모든 명령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똑같은 엘프의 일원일 뿐이었다.
“괜찮다. 설령 엘리너스에서 추방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엘리너스를 지켜 내겠다.”
러셀이 부상당한 파수꾼들에게 갔다.
파수꾼은 엘리너스의 수비대였다.
그들만큼은 수호자의 지시를 존중한다.
그리고 러셀은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수호자였다.
“나는 숲을 지키기 위해 숲을 파괴하려 한다. 이 일로 인한 책임은 모두 내가 지도록 하겠다. 그러니 형제들이여 힘을 빌려다오.”
러셀의 표정은 복잡 미묘했다. 많은 감정이 오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의지만큼은 파수꾼들을 넘어 엘런에게까지 전해졌다.
“나는 동의해. 얼마든지 도와주지.”
제일 처음 반응한 것은 가르노아였다.
“나 역시.”
“형제의 의지를 받아들이겠어.”
다른 파수꾼들도 손을 들며 화답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엘런이 러셀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이시르의 영향력이 정확히 얼마나 되오? 우리는 그곳에서 벗어나야 하오.”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 * *
“테오스 님.”
엘런은 러셀과 자신이 짠 전략을 말해주기 위해 수호자들이 이시르를 잡고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수호자 9명이 각자의 정령을 통해 이시르를 가둬 놓고 있었다.
그가 갇혀 있음에도 주위의 온도는 다른 곳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후욱.
테오스가 입김을 내뱉었다.
“지성의 탑에는 다녀왔는가? 미안하네. 지금은 내가 그대를 환영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군.”
주위는 입김이 나올 만큼 추웠지만,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저도 사정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러셀과 함께 전략을 짰습니다. 그것을 전해 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테오스의 표정이 작게나마 밝아졌다.
엘런은 자신이 생각한 전략을 테오스에게 설명했다. 그걸 들을수록 테오스의 표정은 아리송해졌다.
“그것을 러셀이 받아들였단 말인가?”
테오스가 아는 러셀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 아이였다.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다른 엘프들을 위해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나섰습니다.”
테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을 뛰어넘은 제자로군. 그 아이를 설득할 줄이야. 가슴 속에 그 뜨거운 열정이 그 아이에게도 전해졌나 보군. 대단한 아이야.’
쿵.
한 수호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피를 토했다.
수호자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오랜 시간 정령을 소환하고 있는 것은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시르는 그 틈으로 비집고 나오려고 했다.
휘이잉.
수호자가 쓰러지며 낸 것은 정말 작은 균열이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나오는 냉기는 피부를 찢어 버릴 것 같았다.
그것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극한의 추위로 피부가 갈라지면서 엘런의 손등에 피가 흘러내렸다.
‘정말 어마어마하군.’
엘런은 손등의 피를 닦아 냈다.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화력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수호자들은 이곳에서 물려야 합니다. 러셀의 말로는 테오스 님이 방법을 알고 계실 거라고 했습니다.”
“그건 나한테 맡기면 되네.”
자신하는 테오스를 보며 엘런은 호기심이 생겼다.
수호자 9명도 간신히 가두고 있는 이 무지막지한 녀석을 어떻게 혼자서 막겠다는 것일까.
그리고 테오스는 곧바로 그 질문에 답변을 보여 주었다.
“대지의 주인이여, 나와 그대의 맹약에 따라 부름에 응하소서.”
쿠쿠쿠쿠쿠.
온 세상을 뒤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테오스가 밟고 있는 땅에서 어떤 형체가 만들어졌다.
그 형체는 곧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구릿빛 피부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근육, 중부 대륙에 있다는 야만 전사들이 사용할 것 같은 갑주와 도끼.
-꼬마야, 어찌하여 나를 불렀는가?
엘프 중 가장 오랜 시간 존재했다는 엘프로드에게 꼬마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았다.
그는 바로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었다.
“트로웰 님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부디 도와주시길.”
트로웰의 시선이 이시르를 향했다
-알겠다.
트로웰이 들고 있던 거대한 도끼로 땅을 내리쳤다.
쿠르릉.
그러자 이시르의 주위로 거대한 땅이 솟아올랐다.
“이런 방법이었구나.”
엘런은 넋이 나간 채로 정령왕의 권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쉽게도 그렇게 긴 시간 유지할 수는 없네. 얼른 이곳에서 떠나야 하네.”
테오스의 말에 정신을 차린 엘런은 재빨리 그곳을 이탈했다. 다른 수호자들도 몸을 추스르고는 엘런이 말한 장소로 흩어졌다.
쾅, 쾅, 쾅.
이시르가 그 장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라고 할지라도 굳건한 대지의 주인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 *
꿀꺽.
그것은 러셀의 목구멍을 따라 침이 넘어가는 소리였다. 그들 중에서 가장 긴장하고 있는 것은 러셀이었다.
툭.
테오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의 선택은 옳았다. 꼭 너의 신념을 이루어 내라.”
“예.”
테오스의 응원에 용기를 얻은 러셀은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지시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엘런의 모습이 보였다.
척.
엘런의 손이 내려갔다. 각자의 위치에서 가장 높은 나무에 서 있던 그들은 모두 엘런의 지시를 볼 수 있었다.
“불을 놓아라.”
화르륵.
불의 정령들이 화염을 내뿜었다.
시뻘건 불꽃이 숲에 떨어졌다.
온통 자신이 먹어치울 것밖에 없는 곳에 떨어진 화염은 금세 세력을 확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엘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 차례인가?’
정령의 계약은 계약자의 성형과 유사한 정령과 이루어진다.
엘프라는 종족과 불은 그렇게 상성이 맞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의 정령을 다루는 엘프의 수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엘런은 한쪽 지역을 혼자서 맡기로 했다.
‘파이어월. 10 중첩.’
화악.
오히려 다른 곳보다 훨씬 더 강한 불꽃이 일었다.
“불길을 조절해라.”
휘이잉.
이번에는 바람의 정령들 차례였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은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불길을 조절했다.
네 방향에서 일어난 불꽃은 바람에 막혀 결국 한 곳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곳은 바로 이시르가 있는 곳이었다.
테오스의 말대로 트로웰의 지속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정령계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수록 물질계로 소환될 때의 반작용이 크다고 하였다.
하지만 정령왕이 버텨 준 몇 분의 시간은 수호자들이 피신하기에 충분했다.
트로웰의 힘이 소멸하고 이시르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불꽃이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었다.
‘방향은 계산한 대로다.’
불길을 보고 있는 엘런은 노심초사하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독자적인 활동이 가능한 정령왕을 제외하고는 정령은 계약자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질 수 없다.
그 때문에 바람의 정령을 통한 불길 조정도 그 거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순전히 불의 의지에 의존해야 했다. 다행히 그 불은 엘런이 계산했던 대로 움직였다.
화르르륵.
사방에서 다가온 불꽃이 드디어 이시르를 포위했다.
뜨거운 공기와 차가운 공기가 서로의 자리를 내주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다툼을 벌였다.
그리고 승리한 쪽은 화염이었다.
주위를 빙빙 도는 것 같던 화염은 이내 이시르를 집어 삼켜 버렸다.
“됐다!”
이시르가 완전히 불꽃에 삼켜지는 것을 보며 엘런이 쾌재를 불렀다.
사아악.
그리고 그 기쁨은 갑자기 불어 닥친 냉기와 함께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