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96
96
서리의 이시르 (3)
* * *
쿠오오.
웅크리고 있던 이시르가 몸을 펼치면서 포효했다.
냉기를 가두고 있던 열풍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
그리고 매섭게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큰일이다.’
이대로면 이시르의 냉기가 불꽃을 눌러 버릴 것이다.
아직 이렇게 팽팽한 상황에서 더 밀려나기 전에 승기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그가 있는 곳은 정령이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더 이상은 화력을 공급할 방법이 없었다.
‘여기서 다시 불을 지펴야 하나?’
처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곳에서부터 불을 놓아 불길을 조정하는 것이다.
‘이미 불길이 다 타 버려서 불가능해.’
불이 옮겨 붙으려면 바로 옆에 태울 게 있어야 했다.
하지만 처음 놓은 불이 이시르에게 가는 동안 이미 숲을 다 태워 버렸기에 같은 길은 사용할 수 없었다.
새로운 길을 계산하고 그것을 다른 지역의 엘프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전에 이시르를 둘러싼 불이 꺼져 버릴 것이다.
게다가 다른 길을 사용하면 숲에 끼치는 피해도 훨씬 증가했다.
어려운 결정을 해 준 러셀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의 피해는 없어야 했다.
‘그렇다면 저곳까지 화염을 어떻게 공급해야 하지?’
엘런의 마법이 닿기에도 거리가 멀었다.
저렇게 먼 거리까지 마법을 사용하려면 수식이 복잡해지고 작은 착오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위치로 떨어진다.
“나, 가능.”
제피로스가 혼자서 고심하고 있는 엘런의 앞에 나타났다.
“제피로스, 그게 무슨 소리야? 가능하다니?”
“나, 멀어도, 가능.”
아직은 말에 익숙하지 못한 그였다.
하지만 엘런은 그렇게 뚝뚝 끊기는 말임에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저곳까지 갈 수 있다는 거야?”
제피로스가 끄덕였다.
잊힌 정령, 다시 말해 고대 정령은 오랜 시간 존재한 덕에 정령계와 물질계의 벽을 허물 수 있었다.
그들은 물질계에서도 그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고, 계약자에게 구속되지 않고 어디서든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제피로스의 바람을 사용할 수 있다.’
엘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제피로스 덕에 바람은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은 해결하지 못했다.
엘프들에게서 끌어 쓸 수 있는 힘이라면…….
쐐애액.
문득 엘런의 머릿속에 파공음이 들렸다.
실제로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인상 깊게 보았던 엘프들의 궁술이 떠오른 것이다.
“가르노아 공.”
엘런이 급하게 가르노아를 찾았다.
“왜 그러시오?”
불안한 눈빛으로 이시르를 지켜보고 있던 엘프들 무리에서 그가 나왔다.
“혹시 활을 쏘아 저곳을 맞출 수 있겠소?”
“미안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오.”
가르노아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그것은 엘런도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아무리 그들의 궁술이 인간보다 월등하다고는 하나 이렇게 먼 거리까지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바람의 힘을 받는 건 어떻겠소?”
“바람의 힘?”
가르노아는 여전히 엘런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령의 힘이 저기까지 닿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않소?”
후우웅.
제피로스의 바람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가르노아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잊힌 정령이 성장한 것이오?”
그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제피로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정령과 계약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중급 정령이 되었다니.
아무리 고대 정령이라도 너무 빠른 성장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얻게 되었소. 제피로스라면 그대들의 화살을 저곳까지 인도해 줄 수 있을 것이오.”
“충분하오.”
그의 대답을 들은 엘런은 곧장 다른 지역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가 있는 곳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나무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어떤 방해물도 없었다.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그들이라면 엘런의 동작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대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소.”
엘런의 옆에서 눈 역할을 해 주던 엘프가 말했다.
“부탁하겠소.”
엘런이 나무 밑에 있던 엘프들에게 말했다.
쫘아악.
신호를 받은 엘프들은 일제히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그들의 장궁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휘어졌다.
화륵.
그들의 화살촉에 불꽃이 타올랐다.
공중에서 이곳을 내려 본다면 나무 사이로 무수히 많은 붉은 점들이 보였을 것이다.
태앵.
따로 지시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화살을 쏜 것은 거의 동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리고 화살이 쏘아지는 순간 목표하는 방향으로 거센 바람이 불었다.
정령들이 일으킨 바람으로, 엘프들이 먼 거리에 있는 사냥감을 노릴 때 즐겨 쓰는 방법이었다.
불의 정령과 화염 마법으로 만든 불화살은 일반적인 불화살과 전혀 달랐다. 하나하나의 불꽃이 화로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세 좋게 날아가던 화살도 물리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화살은 점점 날아가는 힘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려 했다.
“제피로스, 지금이야.”
“알았어.”
제피로스의 모습이 점차 옅어지더니 곧 완전히 바람에 스며들었다.
휘이이잉.
그가 스며든 바람은 네 방향에서 날아온 화살에 골고루 퍼졌다.
뒤를 받쳐 주는 바람이 생기자 화살들은 계속해서 날아갈 수 있었다.
하늘을 붉게 수놓은 화살은 일제히 이시르에게로 떨어졌다.
화아아.
그 화력은 서로 팽팽하게 맞서던 균형을 깨뜨렸다.
이시르가 내뿜던 냉기가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지금이라면 이시르에게 다가갈 수 있다.
“예.”
나무에서 뛰어내린 엘런은 이시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우리의 생각보다 인간은 강한 것 같네.”
“저 정도의 속도면 형제들에게 뒤처지지도 않겠어.”
엘프들은 잠시 넋을 놓고 엘런의 꽁무니를 쫓았다.
그의 모습은 어느새 저 멀리서 보였다.
‘불길에 휩싸여 있음에도 이런 한기라니.’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엘런의 몸이 떨려왔다.
온도 유지 마법이 걸린 침묵의 로브에 추가로 냉기 저항 마법까지 걸었지만, 한기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주변의 나무나 동물들은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100여 년 전 보았을 때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구나. 불화살이 아니었으면 접근도 못 했겠어.
‘그들도 때맞춰 도착해주겠죠?’
엘런은 이시르가 있는 곳까지 거의 도착했다.
-로드가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 거다. 아마 늦지 않을 거야.
열기와 한기가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엘런은 안심할 수 있었다.
“벗이여, 아무래도 우리의 기억이 어긋난 것 같지는 않네.”
그곳에는 테오스와 러셀이 서 있었다.
“스승님에게 봉인에 대해서 모두 전달받았습니다.”
엘런은 곧바로 바닥에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뜨거운 화염은 그저 이시르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진정한 해결책은 그를 다시 봉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괜찮겠나? 봉인을 위한 나무가 이미 부서져 버렸네.”
이시르를 봉인하기 위해서는 그를 담고 있을 만한 커다란 그릇이 필요했다.
그래서 테오스와 프로뱅은 엘프의 숲에서도 아주 오래된 나무를 봉인 장소로 사용했다.
하지만 그 나무는 이시르가 나타나면서 부서져 버렸다.
이제는 이시르를 담을 만한 그릇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그대에게 방도가 있나 보군.”
테오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런은 곧바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러셀은 엘런이 그리고 있는 마법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체계의 진이 엘런의 손에 의해 쓰이고 있었다.
“다 되었습니다.”
엘런이 마법진을 완성했다. 이제는 엘프들이 나설 차례였다.
“고맙네.”
테오스가 마법진에 섰다.
프로뱅이 고안한 마법진은 마나가 아닌 엘프의 정령 친화력을 연료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자연 현상인 이시르를 구속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테오스의 힘이 엘런의 마법진으로 흘러 들어갔다.
위잉.
엘프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엘프.
그에게서 나온 힘을 머금은 마법진은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는 복잡한 수식이 형상화되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이시르를 구속하기 위한 봉인식이었다.
쿵.
이시르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불길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봉인식이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쿠오오오.
그가 포효했지만, 그 소리는 점점 멀어지는 듯이 들렸다.
겹겹이 쌓여 가는 봉인식이 그 소리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크아악.
그때, 엘런의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역시, 네놈이 맞았구나.’
이시르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엘프의 신성한 기운은 그에게 특히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네놈이 여기까지.
“거기서 빠져나오기에는 너무 늦었어.”
엘런의 말대로 이시르의 봉인은 이미 거의 진행되었다.
몸을 덜덜 떨리게 하던 추위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시르와 네트의 영혼이 작은 구슬처럼 변했다.
“이제부터는 그대의 몫이라네. 준비한 그릇에다가 봉인하게.”
“예.”
엘런은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지직.
엘런의 손끝과 구슬 사이에서 무엇인가 연결되었다.
그것을 본 테오스는 엘런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설마? 그건 너무 위험하네!”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제 몸이 버티기를 바라야겠죠.”
하지만 엘런은 봉인을 멈추지 않았다.
쏘옥.
그 구슬은 엘런의 몸으로 들어왔다.
“끄으윽.”
그리고 몸 곳곳을 찢어 버리는 것 같은 고통이 함께 몰려왔다.
뼈가 뒤틀리고 장기가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고통은 당장이라도 엘런의 몸을 터뜨리고 밖으로 빠져나오려 했다.
“끄아아악!”
엘런은 더는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몸 안에서 들끓던 네트의 마나가 일순간에 잠잠해졌다.
‘뭐, 뭐지?’
엘런은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확실했다. 갑자기 찾아왔던 고통은 찾아온 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괜찮은가?”
그 모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테오스가 엘런을 향해 달려왔다.
테오스도 힘을 많이 쏟았는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이시스라는 거대한 존재를 몸에 가둔 엘런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괜찮은 건가?’
엘런은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약간의 한기가 느껴질 뿐 그 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어떤 마나 하트에서는 충만감마저 느껴졌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고통이 한 번에 사라졌습니다.”
“자네의 몸으로 이시스를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였을 텐데.”
엘런의 몸을 살피던 테오스는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그대의 신체는 지성의 탑에 들어가기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 같군.”
“세계수 님께서 태초의 마나로 인해 체질이 개선되었을 것이라고 하긴 했습니다.”
테오스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초의 마나에 의한 육체적, 정신적 각성. 그것이 자네의 그릇을 성장시켰나 보군. 그대에게 천운이 따른 것 같네.”
그렇지 않아도 마법 사용에 최적화된 몸을 가지게 되어 기뻤던 엘런이었다.
덕분에 목숨까지 건졌다고 하니 세계수에 대한 약간의 악감정마저도 다 날아갔다.
“그런 것입니까? 세계수 님에게는 여러모로 빚을 많이 지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제자를 사지로 몰아넣는 스승이라니. 그건 보기 좋지 않네, 벗이여.”
테오스의 화살이 프로뱅에게 돌아갔다.
-나라고 안 말렸겠어요? 이 녀석 고집은 아무도 못 말립니다.
프로뱅이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허허, 그건 그대와 아주 꼭 닮은 것 같네.”
프로뱅과 엘런은 크게 웃었다.
“엘런 공.”
그때, 테오스의 뒤에 있던 러셀이 머쓱한든 뺨을 긁으며 걸어 나왔다.
“정말로 고맙소. 그대 덕분에 엘리너스를 수호할 수 있었소.”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야말로, 그대의 용기 있는 결정에 존경을 표하오. 그대가 아니었다면 이 전략을 시행도 못 했겠지.”
엘런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허허허.”
테오스는 100년 전, 자신과 프로뱅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대와 저 아이가 인간과 엘프의 새로운 관계를 맺어 갈 것 같네.”
* * *
“이제 떠나는 것이오?”
가르노아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밖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소. 인간 세상은 이곳처럼 평화롭지 않소.”
“이곳에 몇 달만 더 머무르면 인간 궁수 정도의 궁술은 만들어 줄 수 있을 텐데.”
그 말에 엘런은 쿡쿡 웃었다.
“그대의 입으로 내게 재능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것은 인간에게 배운다는 가정이었소.”
가르노아도 농담이 즐거운지 함께 웃었다.
그의 뒤로도 엘런은 배웅하기 위해 나온 엘프들이 많았다.
엘런은 두 달간 이곳에 머물면서 많은 이들과 인연을 나누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엘리너스를 위기에서 구해 낸 인간. 엘리너스의 귀빈. 그것이 그들 사이에서 엘런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다들 고맙소.”
그들은 미소로서 엘런의 인사에 답했다.
“이제 출발할게요.”
엘프의 숲 외곽까지는 페리스가 안내를 맡았다. 그녀는 엘리너스에서 자신보다 길을 잘 아는 이는 없다며 안내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러자.”
엘런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잠깐 기다리시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급하게 뛰어오고 있는 러셀이 보였다.
“허가를 받고 오느라 좀 늦었소. 아직 출발하지 않아서 다행이오.”
러셀은 물통 하나와 단검 하나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단검에 대해서는 엘런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프로뱅이 가지고 있던 서약의 단도와 같은 것이었다.
“그 서약의 단도에는 나와 할아버님의 서약이 모두 담겨 있소. 그대는 엘리너스의 영원한 귀빈이오.”
그의 극진한 인사에 엘런은 자신도 모르게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 물통은 세계수님의 은총이 담긴 물이오. 전에 보니 사악한 기운과 사투를 벌이는 것 같았소. 이 물은 세계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을 정화하는 힘이 있소. 아마 이것이 도움이 될 것이오.”
찰랑.
물통 안에서 맑은소리가 들렸다.
“그대의 배려에 감사드리오.”
“그럼, 다음에도 보기를 바라겠소.”
러셀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엘런은 몸을 돌렸다.
“러셀 오라버니는 내가 떠날 때도 저렇게까지 안 해 주셨으면서.”
페리스는 장난스럽게 볼을 부풀리며 투덜댔다.
“출발할까?”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