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ny magic power, but I'm good at it at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224
224화
224화
휘이이잉─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황량한 밤의 사막.
“······.”
유진은 사막 너머의 공동에서 펼쳐지는 격전을 지켜보았다.
마력포에 터지고 검과 마법에 찢겨나가는 아귀들을.
그의 마력이 깃든 공간이 무너지고, 아귀들이 스러져가고 있었다.
투둑, 툭.
문득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져 유진의 머리를 적셔왔다.
쏴아아······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순식간에 거센 빗발이 되어 사막에 쏟아져 내린다.
엔마는 말없이 마력을 일으켜 유진에게 닿는 비를 차단했다.
“왜 지켜만 보는지 묻지 않는구나.”
“유진님의 뜻에 전 그저 따를 뿐입니다.”
엔마의 맹목적인 대답에 쓰게 웃은 유진이 아귀에 맞서는 초인들을 지켜본다.
유진의 눈에 비친 그들은 눈이 부셨다. 일상을 지키고, 또 이어가려는 모습이. 그 또한 시작은 저들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그러기에는 이 세상이, 이터니티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유진은 알고 있었다.
아니, 어긋낫던 적은 없다. 이터니티는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으니.
그렇기에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마수가 없고, 재앙이 존재하지 않으며, 마기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럴 수 있는 힘이 지금의 유진에게는 존재하고 있었다.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으나······”
유진의 시선이 공동의 어딘가를 응시한다.
그곳에는 초인들을 지휘하며 무수한 단검으로 아귀들을 척살하는 이해솔이 존재했다.
처음에는 의문이었다. 이해솔이 어찌 자신의 계획을 그리 잘 알고 있는지. 어째서 막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지가.
하지만 그 정체를 알고 나면 당연한 태도일 지도 몰랐다.
“설마 이방인일 줄이야.”
그는 여신이 데려온 세상 밖의 인간이었으니.
이해솔에게 남은 여신의 흔적이, 그 잔향이 지금의 유진에게는 보여왔다.
그런데 왜일까. 이 속에서 들끓듯 솟아오르는 원인 모를 분노는. 이해솔을 향한 적개심은.
─조심해, 잡아먹힐지도 모르니까.
문득 우르크의 마력을 넘겨주기 전에 이해솔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 건가.”
녀석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자신이 우르크에게 삼켜져 스스로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훗.”
“유진님?”
느닷없는 유진의 실소에 엔마가 의아해할 때였다.
“아무래도 내가 당한 모양이구나.”
“예? 그러면 빨리 조치를······”
“아니.”
손을 들어 엔마를 막은 유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늦었구나.”
우르크의 망령이 자신의 정신을 침식해옴을. 의식이 갉아 먹히고 있음을 유진은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괴욕만이 남은 망령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이터니티가 파괴되는 것을 유진은 원치 않는다. 그렇게 되기 전에 스스로 자멸을 택할 테지.
“이게 당신의 수인가?”
빗발이 거세게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암운 너머에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유진이 물었다.
“여신.”
쏴아아······
마치 물음에 화답하듯 더욱 거세게 쏟아져내리는 빗발. 이를 바라보는 유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린다.
그것은 자조도, 달관도 아닌, 이상에 다가선 이의 웃음이었다.
당했다는 것이 꼭 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에.
콰르릉──────!
순간, 거대한 굉음이 사막을 떨어 울렸다.
거짓말처럼 그치는 비. 먹구름이 갈라지며 신비로운 오로라가 커튼처럼 사막에 드리운다.
그 오로라를 따라 푸른 마력의 조각들이 별무리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 마력의 조각이란 바로, 이터니티의 ‘단면’이었다.
파아아아아······
흩날리는 마력의 조각이 갈수록 많아지고, 사막에 드리운 오로라의 광휘는 커져만 간다.
그것은 파괴이며 또한, 새로운 개벽이었다.
유진은 자멸을 택하는 대신 스스로의 마력을 바쳐 이터니티를 재구성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터니티의 붕괴가 시작되었음에도여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나타나지 못했다. 그토록 거대한 존재가 내려온다면 이터니티는 버티지 못하고 파괴되어버릴 테니.
“거기서 지켜보게.”
암운이 사라진 몽환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유진이 미소 지었다.
***
─그어어어······
지하공동을 가득 메운 아귀들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든다.
그러나 밀려드는 것만큼이나 허물어져 내리는 속도 또한 빨랐다.
콰아아아앙──
마력포가 공간을 가르고 이본느의 불길이 아귀들을 불태운다.
“하앗!”
은가예의 검이 휘둘러지자 중력의 마력이 일어나며 아귀의 일각이 와르르 무너진다.
“`!”
짓눌려 꿈틀거리는 아귀들을 가리키며 소리치는 은가예.
달려나간 은가장의 무사들이 쓰러진 아귀들을 정리한다.
그밖에 여명의 수호자, 별의 성좌, 백야······
각 길드의 초인들은 각자의 방면에서 밀려드는 아귀들을 처리했다.
“빨리빨리 잡으세요! 아카데미가 길드에 뒤처져서는 안 됩니다!”
조교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도 쉴 틈 없이 마법을 쏘아대는 김주혁 교수와 아카데미의 교수진.
춤을 추듯 휘둘리는 서하린의 검에서 피어오르는 백염, 은호성의 해일을 담은 검강 등······
이터니티의 내로라하는 초인들이 선보이는 절기에 아귀들이 속절없이 쓸려나간다.
“역시 일손이 많으니까 편하네.”
이를 구경하며 감탄을 하고 있자니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거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예요?”
“다 끝날 때까지.”
“아우, 내가 괜히 말했지······”
아멜리아는 현재 아귀들이 나타나는 곳마다 바삐 시선을 옮겨가며 고개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시선의 이동에 따라 그람의 단검이 날아다니며 아귀들을 도륙한다.
마력이 뭉쳐진 아귀의 급소를 아멜리아가 보면 이를 시야를 공유받은 단검이 꿰뚫고 있던 것이다.
내가 아멜리아와 시야를 공유하면 그람에게도 그것이 전달되었으니.
우르크의 마력으로 변화한 아귀의 급소를 아멜리아가 볼 수 있다기에 취한 조치였다.
그러한 아멜리아의 노고 덕에 그람은 엄청난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람의 서포트를 받으며 아귀들을 베어나가는 생도 한 명이 눈에 띈다.
생도의 검에 베인 아귀는 더 이상 재생하지 못하고 그대로 스러져나갔다.
“천우진이군요.”
내가 바라보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린 소피아가 생도의 이름을 말한다.
“쓸만해졌죠?”
“예, 확실히······”
거침없이 아귀들을 베어나가는 천우진을 바라보며 소피아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무서울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어느 정도죠?”
“누가 상대더라도 쉽게 꺾기는 어려울 겁니다.”
“소피아는요?”
“물론 저한테는 안 됩니다.”
자신감에 찬 소피아의 단언에 내가 피식 웃어 보였다.
역시 든든하단 말이지.
하기야, 천우진이 아무리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곤 해도 소피아와의 실력차는 확연하다.
하물며 소피아 역시 놀고만 있던 게 아니다.
소피아의 수련량은 가히 살인적인 수준이었으니까.
아무튼, 천우진에 대한 소피아의 평가에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천우진과 검을 맞대본 적이 있는 그녀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데려가도 되겠네요.”
“예? 데려가다니, 어딜······”
소피아가 의아해할 때였다.
키이이잉──
날카로운 기음과 함께 내 앞의 풍경이 갈라지며 아공이 입을 벌린다.
“뭐예요? 단검들이······!”
돌연 단검들이 내게로 회수되자 나를 돌아봤던 아멜리아가 내 앞에 열린 아공을 보곤 놀란 표정을 짓는다.
“너도 따라와.”
“예?”
눈을 깜빡이는 아멜리아와 저 멀리서 나를 돌아보는 천우진. 내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한세연과 소피아. 그들을 바라보며 내가 입을 열었다.
“끝을 보러 가야지.”
그렇게 내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쿠우우웅───!
돌연 운석이 떨어진 것 같은 거대한 충격이 지하공동이 뒤흔들었다.
거기에 내포된 가공할 마력의 파동에 초인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유독 마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멜리아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우욱······”
허리를 숙인 채 헛구역질을 하는 아멜리아의 등에 내가 기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괜찮냐?”
“이, 이게 무슨······”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아멜리아가 균열의 문을 바라본다. 그런 그녀의 눈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그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시작했네.”
“뭐가 시작했다는 거죠?”
“이터니티의 붕괴.”
“!”
그 말에는 아멜리아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은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내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막으러 가야지.”
열려진 아공을 가리키며 당당히 하는 내 말에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만큼이나 내 발언의 스케일은 방대해도 너무 방대했으니.
그때, 어느새 다가온 천우진이 나를 응시하며 물어왔다.
“해솔아. 의심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인을 위해 물어볼게.”
“뭔데?”
“막을 수 있어?”
말은 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같은 의문을 담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물론이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막을 수 없으면 시작도 안 했어.”
내 대답에 천우진은 마주 웃어 보였다.
“좋아, 그럼 가자.”
그러곤 아공을 향해 몸을 돌린다.
“······에?”
천우진의 행동력에 아멜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협회장님은 아귀를 맡아주십시오.”
“알겠네, 빨리 처리하고 합류하지.”
“은가주님, 가예좀 빌려가겠습니다.”
“허허, 도움이 되면 얼마든지 빌려가게.”
자신을 제외하고 진행되는 이야기에 아멜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모두가 별다른 의문도 표하지 않은 채 이해솔의 말을 따르고 있던 것이다.
“잠깐만요, 이렇게 간단히 받아들여도 되는 이야기인가요?”
“아가씨가 이해하게. 지금이 찬밥 더운밥 가
리고 있을 상황은 아니잖나?”
“그렇기는 한데······”
“지금도 늦었을지 모르지.”
균열의 문을 바라보는 차시우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져 있었다. 그 모습에 아멜리아도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여유가 넘쳐 보이던 이 협회장조차긴장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제야 사람들이 왜 이해솔의 말에 군말없이 따르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가공할 마력을 느끼게 되면 누구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질 테니.
대체 무슨 근거로 이해솔이 저리 당당한지는 의문이었지만.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를 제외한 일행이 하나, 둘 아공의 너머로 사라졌다.
“아, 몰라.”
귀를 삐죽이며 망설이던 아멜리아는 아공이 줄어들자, 고개를 홱 젖곤 뛰어갔다.
“같이 가요!”
***
신비로운 오로라가 커튼처럼 드리운 밤의 사막.
마력의 조각들이 별처럼 떨어져 내리는 그 공간은 실로 몽환적이었다.
하지만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초인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이터니티가···”
사막에 드리운 오로라는 세상의 번짐이요, 떨어져 내리는 마력의 조각은 세계의 파편이었으니. 즉,
“···붕괴되고 있어.”
세상의 종말이었다.
콰과과과과광──
찰나, 떨어져 내리던 마력의 조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갔다.
“어?!”
놀란 은가예가 눈을 크게 뜨고, 아멜리아가 나를 돌아보며 버럭 소리친다.
“무슨 짓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마력의 조각들을 부순 것은 바로 나였다.
무수히 늘어난 그람의 단검이 마력의 조각들을 부숴나가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한 번 부수어진 마력의 조각이 복구되기 위해서는 기나긴 세월이 필요하다.
그동안 조각이 빠져나간 부위는 세계의 구멍, 즉 결함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떨어지는 것보단 차라리 이게 나아.”
“네?”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의문을 표하던 일행이 내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확실히 부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어요.”
세계에서 떨어져나온 마력의 조각들이 사막의 언덕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 언덕의 위에는 홀로 붕괴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기른 남성.
영멸의 밤, 유진이었다.
세계에서 떨어져나온 마력의 조각들은 그에게로 흡수되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무 빨라.’
마력의 조각들이 떨어져나오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족히 3배는 빠른 속도였다. 그만큼 이터니티의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벼랑을 향해 질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걸렸군.
‘그런 것 같네요.’
그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알아차린 것이다. 자신의 정신이 우르크에게 침식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세계를 붕괴시키는 것은 유진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런 속도라면 더더욱.
모르긴 해도 지금 이 순간에도 유진에게는 어마어마한 부담이 가해지고 있으리라.
‘문제는 역시 너무 빠르다는 거지.’
떨어져 내리는 마력의 조각들을 바라보는 내 미간이 좁아진다.
유진이 부담을 진만큼 그것은 나에게도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마력의 조각들이 유진에게 가는 것을 막는 것만으로 내 발이 묶여버렸으니······.
‘하는 수 없나.’
상정 외의 상황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나는 결국 손을 앞으로 뻗었다.
유진이 저렇게 나온 이상 나 또한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벌써부터 힘을 빼는 건 내키지 않지만.’
키이이잉──
오로라가 펼쳐진 사막의 밤하늘에 누군가가 그어놓은 듯한 기다란 빗금이 생겨난다.
이윽고 하늘을 갈라놓은 그것이 눈을 뜨듯 벌어지며 시꺼먼 동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때였다.
콰과과과과광──!
돌연, 떨어져 내리던 마력의 조각들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람이 한 일이 아니었다. 내 시선이 요란한 총성이 울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타다다다당─!
한세연의 양손에 쥐여진 베레타가 불을 뿜고 있었다. 그녀만이 아니다.
“저기에요!”
아멜리아가 이어질 붕괴의 지점을 가리키자 은가예의 중력이 떨어져 내리는 마력의 조각들을 정체시킨다. 이어서 소피아의 강기가 정체된 조각들을 박살낸다.
마기를 내뿜는 흑요, 공간을 이지러트리는 요호, 빛을 쏘아내는 아나스타샤까지.
어느새 나온 파랑이마저 합류하며 사막의 밤하늘이 푸른 마력의 가루에 휩싸인다.
“음.”
나는 이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일행에게는 이것 외에 따로 해줘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지금의 상황은 내가 예상하지 않은 전개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다녀와.”
마치 내 고민을 다 안다는 듯이 다녀오라 말하는 한세연.
“괜찮겠어?”
그녀는 대답을 하는 대신 작게 웃어 보였다.
“알았다. 기다리고 있어.”
“응.”
“조심하고.”
나는 몸을 돌렸다. 어차피 벌어진 일, 빨리 끝내버리는 게 모두에게 좋았으니까.
“길을 열어줄게.”
“부탁한다.”
내 대답에 싱긋 웃은 천우진이 허공을 향해 검을 긋는다.
순간,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듯한 환청이 들려왔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나는 유진과 나 사이에 있던 벽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간다. 아까 말한 거 잊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세연이는 내가 반드시 지킬게.”
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는 듯 농담조로 대답하는 천우진.
“어, 부탁한다.”
피식 웃어 보인 내가 손을 내리그었다. 그러자 풍경이 갈리며 모습을 드러내는 아공. 그 안으로 내가 걸음을 옮겼다.
***
······아공을 넘어서자 멀리서 올려다보았던 몽환의 오로라가 눈앞에 물결쳤다.
광활한 밤의 사막이 발아래로 아스라이 펼쳐진다.
“아름답지 않은가?”
순간, 뒤에서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부서져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흘낏, 구멍 난 하늘을 올려다본 내가 입을 열었다.
“복구하려면 100년은 걸리겠네.”
“하핫.”
내 대답이 웃기기라도 했는지 유진이 실소를 터트렸다.
“뭐가 웃긴데?”
인상을 찌푸리자 유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감상이라기엔 너무 삭막한 대답이라 웃었네.”
“사실인데 뭘.”
실제로 저러한 거대한 결함이 메꿔지기 위해서는 못해도 100년은 걸릴 터였다.
“110년.”
“?”
“110년 걸리네.”
유진이 나를 돌아보며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간, 주변의 풍경이 변화했다.
오로라가 드리웠던 어두운 하늘은 맑은 구름이 떠다니는 따스한 햇살로.
모래뿐이 없던 황량한 사막은 푸르른 산과 들로 바뀌었다.
“이건?”
“내 과거의 기억이네.”
유진이 어딘가를 바라본다. 산야의 언덕을 따라 지어진 마을로 밝은 표정의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아무런 근심도 없는 평화로운 광경. 하지만 그 평화는 돌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무언가로 인해 깨져나갔다.
“······붕괴.”
“이 세상은 불완전하지. 붕괴가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지만 없는 일은 아니네.”
마치 눈발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신비로운 광경에 무심코 세계의 조각을 만진 사람들이 노면으로 쓰러진다.
과도한 마력을 내포한 세계의 조각은 생명체에게 극독이나 다름없었으니.
─꺄아아악!
평화로웠던 산야의 마을은 한순간에 죽음의 비가 내리는 지옥이 되어버렸다.
이는 유진이 비추는 과거.
그가 겪은 붕괴의 기록이다.
“붕괴가 일어난 지역은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지.”
유진의 말대로 산야의 대기에는 한 줌의 마력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지면이 쩍쩍 갈라지고, 나무와 들판이 누렇게 바랜다.
“하지만 붕괴가 위험한 이유는 그게 다가 아니네.”
“세계의 조각.”
유진이 정답이라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네. 떨어져 나온 세계의 조각은 추산하기 어려운 마력을 지녔지. 만약 그것이 악인의 손에 들어간다면······”
퍼어어어어엉─!
돌연, 산야가 폭발하듯 튀어 오르며 푸른 마력의 덩어리들이 일어난다.
그것은 떨어져나온 세계의 조각이 일으킨 마력재해. 즉,
“재앙이네.”
─끄아아아아!
산야에 기거하던 사람들이 터지고, 부서져 나간다.
인간의 마력을 흡수해 덩치를 키우는 기괴한 덩어리들.
녀석들은 내가 이터니티에서 보아왔던 그 어떤 것하고도 달랐다.
불길하고 꺼림칙했으며 살아있는 것이라고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녀석들은 실제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의 억지력. 그것이 떨어져나와 개별화를 이룬 것이 바로 녀석들의 정체였으니까.
세계의 오류.
이른바 ‘디아’였다.
스스스스스──
지옥으로 변한 마을의 풍경이 녹아내리며 밤의 사막이 들어찬다.
거기에는 조금 전 보았던 괴물들이 모래 무더기를 뚫고 일어나고 있었다.
기괴하게 일렁이는 마력의 덩어리.
‘디아’였다.
녀석들은 세계의 조각을 부수고 있는 일행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벌어지는 일행과 디아의 교전.
“안 도와줘도 되겠나?”
“뭐 하러?”
내 반문에 질문을 했던 유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가 보기에 일행은 당장 밀려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그도 그럴 게 일행의 공격은 디아에게 전혀 먹히지가 않고 있던 것이다.
실체가 있는 듯하나, 실체가 없기에 상대할 수 없는 존재.
‘재앙’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가 바로 디아였다.
유진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을의 괴멸을 지켜본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일행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도와주지도 못하잖아?”
“눈치가 빠르군.”
“대놓고 가둬놓고 눈치는 무슨.”
내가 코웃음을 치자 유진이 예의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균열을 조율할 수 있는 그대가 위험에 처하게 둘 수는 없네.”
현재 나와 사막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결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진은 나를 가두어두고 있는 그 결계가 지금 나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있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즉.
“내가 나가면 죽을 거라는 이야기 같네?”
“맞네.”
고개를 끄덕인 유진이 결계의 바깥을 가리켰다.
오로라가 펼쳐진 하늘에선 여전히 세계의 조각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며 사막에는 디아들이 배회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저것들 왜 저래?’
꾸물거리며 결계의 주변을 맴도는 디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다.
마치 내가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은······
“저 디아들의 표적은 그대네.”
“나라고?”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는 섭리에서 파생된 녀석들이네. 당연히 섭리의 습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지. 그런 녀석들에게 이방인이 보인다면 어떻게 되겠나?”
“···죽이겠지.”
내 인상이 구겨졌다.
섭리에서 파생된 녀석들에게 이터니티의 존재가 아닌 나는 배척해야 될 불순물로 여겨질 게 뻔했던 것이다.
여신의 통제를 벗어난 녀석들이 나를 특별취급해 줄 리도 없었고.
“쯧.”
어느새 결계의 주위로 몰려든 디아들을 본 내가 혀를 찼다.
“떨어져나온 것들이 어설프게 섭리흉내네.”
이렇게 되면 일행에게 디아를 맡기려던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고 봐야했다.
붕괴의 중심인 이 주변은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사지(死地)였으니······.
콰츠즈즈즛──!
떨어져 내리는 세계의 조각들이 붉은 스파크를 튀기며 갈려 나간다.
휘몰아치는 마력풍에 디아들의 형체가 소멸되고 수복되기를 반복했다.
이곳에 펼쳐진 오로라가 주변의 모든 마력이 깃든 것들을 파괴해버리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 디아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저것들을 이곳에서 끌고 나가야만 했다.
‘떨어져나온 것들이 하나만 할 것이지.’
귀찮게 꼬여버린 상황에 투덜거린 내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경고 하나만 하자.”
몸을 푸는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유진이 갸웃거렸다.
“경고?”
“내가 뭘 하던 건드리지 마.”
“그건···”
키이이잉──
유진의 말을 자르며 내 손 위로 시꺼먼 균열이 일어났다.
“그쪽도 이게 없어지면 곤란하잖아?”
“충고라기보다는 협박이군.”
“그건 알아서 생각하고.”
나는 디아들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그런 내 시야에 나와 디아들을 가로막은 마력의 벽이 훤히 보여왔다.
===
[융합력(S)]◆ 아멜리아
===
암만 자취를 숨긴다 한들 아멜리아의 눈을 빌린 내 시야에 걸려들지 않을 마력이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확인한 마력의 벽은 견고했다. 조금의 틈조차 보이지 않았고, 일반적인 방법으로 부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를 확인했음에도 내 걸음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갈수록 빨라졌다.
===
[융합력(S)]◆ 아멜리아 → 소피아 포코르니
===
융합의 대상이 바뀌자 시야에서 벽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와 맞바꾸어 들어 올린 검에 이형을 부수는 분쇄의 기운이 깃들었다.
─재미있는 힘이구나.
이를 다루는 건 대보구의 검령, 그람.
우웅······.
그녀의 의지를 담은 검이 분쇄의 기운을 빌어 현현한다.
검에 맺힌 기운이 뚜렷한 검의 형상을 띄었다. 단순하나 일말의 마력조차 낭비되지 않는 지극의 검.
스악─
그 지극의 검이 그어지며 일순 공간이 잘려 나가는 듯한 환상이 일었다.
그리고.
파아아아아아─
푸른 조각들이 신기루처럼 비산했다. 휘몰아치는 마력풍에 머리가 흩날린다. 나를 가두어놓았던 마력의 벽이 깨져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맹수를 막아주던 울타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파츠즈즈즛─!
푸른 스파크를 튀기며 소멸하고 복구되기를 반복하던 디아들이 나를 향해 밀려들었다.
나 또한 녀석들을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마치 불에 뛰어드는 나방 같은 모습이었으나 나는 거침없었다.
“꺼져!”
손을 휘두르자 이카루스의 반지에서 항마력이 일어나며 덤벼드는 디아들을 지워버렸다.
나는 연거푸 항마력을 일으키며 디아의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사막을 내달리며 뒤를 힐끗 돌아본 내가 혀를 내둘렀다.
“겁나게도 많네.”
스아아아아······
뿌연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내 뒤를 바짝 따라붙는 디아의 무리.
어느새 항마력에 지워졌던 녀석들까지 복구되어가고 있는 모습은 소름마저 끼쳤으나 내 입가에 지어진 것은 여유로운 미소였다.
‘어쨌든 다 따라왔나.’
내가 무슨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한 놈도 빠짐없이 죄다 나를 쫓아오는 디아들.
사막을 배회하던 놈들마저 따라붙는 것이 가히 미친 어그로였다.
그 덕분에 사방으로 퍼져 있던 디아들이 한 곳으로 전부 모여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죽지도 않는 괴물들을 어찌 정리하느냐인데······
“문제없겠네.”
사막 너머를 바라본 내가 미소 지었다.
그곳에는 대검을 하늘로 들어 올린 소파아가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는 듯 두 눈을 감은 그녀의 대검으로 가공할 기운이 모여들고 있었다.
고오오······
하늘을 덮을 듯이 솟아난 혼마력의 검강은 마치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리듯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방향을 틀어 그곳을 향해 내달렸다.
그런 내 뒤를 디아의 군단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쫓아왔다.
***
“와요, 소피아씨.”
아멜리아의 부름에 소피아가 감았던 눈을 조용히 떴다.
그녀의 시야에 자신을 향해 쫓기듯 달려오는 이해솔이 보여왔다. 그런 이해솔의 뒤로는 디아의 무리가 따르고 있었다.
정확히 소피아가 예견한 상황이 그대로 일어나자 아멜리아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해솔이라면 어떻게든 디아들을 끌고 올 거라며 소피아가 무한한 믿음을 보였던 것이다.
“저렇게 올 건 어떻게 안 거예요? 역시 미리 둘이······”
“직감입니다.”
“네?”
“해솔님이라면 일단 저지르고 보리라 생각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왠지 묘하게 납득이 가는 말에 아멜리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소피아는 자신의 답이 들어맞았음에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해솔이 떠나기 전 나누었던 대화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곧 있으면 마수떼가 나타날 거예요. 소피아가 처리해주세요.
그리 말하며 이해솔은 자신에게 한 가지 능력을 공유해주었다.
“잘 보입니다. 해솔님.”
소피아의 시야에 달려드는 디아들의 ‘영핵’이 선명히 보여왔다.
그녀가 융합력을 통해 공유받은 능력이란 바로 영혼을 보는 눈, 「선각자의 눈」이었다.
보이지 않으면 간섭조차 할 수 없는 영핵에 타격을 입힐 수 있게 된 것이다.
“저 여자는 제가 맡을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느새 나타난 엔마를 향해 움직이는 아멜리아를 흘낏 일별한 소피아가 다시 전방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해솔이 스스로를 미끼삼아 디아들을 끌고 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고오오···!
소피아의 대검에 맺힌 혼마력이 가공할 빛을 뿜어내며 밝게 타오른다.
그 선상에 놓인 것은 모래 먼지를 피워올리며 달려오는 디아의 무리.
공격하기엔 지금이 가장 이상적인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해솔마저 휘말려버린다.
그렇기에 소피아가 적절한 순간을 노리던 와중이었다.
─쳐요!
이해솔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공격하라는 신호.
그가 검강의 반경에서 벗어나려면 제법 거리가 남아있었으나 소피아는 그 말 한마디에 망설임 없이 대검을 내리그었다.
“하아압-!”
그녀의 기합성과 함께 혼마력의 검강이 사막으로 떨어져 내렸다.
에필로그
225.
쿠아아아앙──!
거대한 검강이 떨어져 내리며 선상에 있던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달려들던 디아들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고, 폭포처럼 일어난 모래 무더기가 세상을 뿌옇게 뒤덮는다.
“휘유~ 엄청나네.”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그 파괴적인 광경을 구경하며 내가 혀를 내둘렀다.
소피아의 검강이야 언제봐도 굉장했으나 어째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해솔님, 괜찮으십니까?”
“예, 보다시피요.”
소피아에게 그리 답하며 나는 열린 아공을 닫았다.
검강이 덮쳐들기 직전에 소피아의 곁으로 아공의 균열을 열어 검강의 반경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것이다.
그 결과, 나를 쫓던 디아들은 고스란히 검강의 먹이가 되어버렸다.
녀석들이 자랑하는 ‘재생’은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분쇄자로 영핵을 박살내버렸으니 쉽게는 복구 못하겠지.’
운 좋게 살아남은 디아들도 있었으나 놈들은 천우진의 검에 베여나가고 있었다.
스아악─
푸른 검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더 이상 디아가 존재하지 않았다.
일검일멸(一劍一滅).
특별할 것 없는 단순한 베기에 디아들은 맥을 못추었다.
그렇다고 천우진이 영핵을 베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쟤는 그게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내가 혀를 내둘렀다.
“진짜 사기네.”
기실, 저것이야말로 천우진이 가진 사기성이자 검성의 참모습이었다.
검성의 기프트는 아무것도 고려할 필요 없이 무엇이건 베어버리는 권능이었던 것이다.
“쟤도 걱정할 필요는 없겠고.”
엔마와 대치한 아멜리아에게서 터져 나오는 순수마력을 본 내가 중얼거렸다.
밤의 사막을 한낮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새하얗게 터져 나오는 마력.
저건 아멜리아가 스스로의 방어기제를 풀어버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저 상태의 아멜리아라면 설사 상대가 유진의 종자라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사기투성이네.’
누구는 이렇게 땀 뻘뻘 흘려가며 개고생을 하는데.
소피아를 돌아본 내가 안쓰러운 마음에 입을 열었다.
“힘들면 좀 쉬어요.”
소피아의 전신은 비라도 맞은 듯 땀으로 축 젖어있었다.
타샤와 싸움을 하고 연달아 검강을 뽑아내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을 쏟아낸 그녀였기에 탈진해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내 염려에 소피아가 나를 바라보며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죽을 만큼 힘듭니다.”
“그럼···”
“끝나고 나서 잔뜩 쉬도록 하겠습니다.”
스스로 휴가를 선언한 그녀의 시선이 사막의 언덕을 향한다. 그곳에 서 있는 유진을 확인한 내가 쓰게 웃었다.
어딘가 망가지기라도 한 듯 유진에게서 우르크의 마력이 음산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으니.
그나저나.
“소피아가 쉬는 만큼 제가 일해야 하는데요?”
“예, 그래 주십시오.”
“왠지 부려 먹겠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맞습니다.”
“······.”
멍하니 입을 벌린 나는 소피아의 입가에 맺힌 짓궂은 장난기를 발견하고는 혀를 찼다.
······이거 완전히 꿰여버렸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고개를 내저은 내가 앞을 바라보았다.
“우선 저것부터 정리하죠.”
콰과과과과······
마력을 무분별하게 발산하는 유진은 이제 완연한 폭주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만큼 디아의 소멸이 녀석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유진이 세계를 개편하려는 이유는 바로 디아와 같이 ‘불멸’하는 마수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런데 불멸하리라 단정지었던 디아가 눈앞에서 소멸해버렸으니 흔들릴 수밖에.
‘사실 완전히 소멸한 건 아니지만.’
유진의 생각대로 마수나 디아는 완전한 불멸체다.
우르크가 죽고 이터니티의 엔딩이 나오지 않는 이상 시스템적으로 마수는 끊임없이 순환하게 되어있었으니까.
당연히 디아 또한 영구적으로 소멸한 게 아니었다.
소피아의 분쇄자에 영핵이 부숴짐으로써 일시적인 소멸상태가 되어버린 것뿐이지.
그건 천우진이 없앤 디아들도 마찬가지였다.시간이 지나면 분명 되살아나리라.
하지만 이를 모르는 유진으로서는 디아들이 완전히 소멸한 것처럼 보일 터였다. 실제로 지금 녀석들은 소멸된 상태였으니까.
이는 유진이 세계를 재편하려는 목적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흔들리는 유진의 정신을 우르크의 망령이 파고든 것이다.
“소피아, 내가 신호하면 놈을 베세요.”
“알겠습니다.”
소피아의 대답을 들은 내가 유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정말 끝을 내야 할 시간이었다.
***
휘이이······
사막의 언덕을 중심으로 거센 마력풍이 휘몰아친다.
먼지조차 갈려 나가는 그 마력풍의 안으로 나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그람의 비호를 받는 나를 이런 마력풍 정도로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추운데 후딱 끝내고 들어가죠.”
─훗, 그래야겠군.
마치 마실을 나온 듯한 내 말투에 그람이 나직이 웃음을 흘린다.
그러나 평온한 대화와 달리 마력풍의 내부는 위험천만하기만 했다.
폭주한 마력이 휘몰아쳤으며, 죽은 자의 영혼이 사방을 배회했다.
흑귀(黑鬼).
자신이 죽인 자를 그림자로 부활시켜 조종하는 유진의 능력.
나는 덤벼드는 놈들을 그람으로 베어가며 전진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이해솔.
문득 그람이 말을 걸어왔다.
“그람이 저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건 처음이네요.”
─그런가?
“예. 예언자 아니면 그대라 했습니다.”
─훗, 그랬군.
“가려는 거면 안 보내줍니다.”
─그대는 참 이상한 데서 눈치가 빨라.
기가 막히다는 듯 말한 그람에게서 돌연 마력이 방출되어 나를 밀쳐놓았다.
다음 순간, 마력풍의 너머에서 푸른 해일이 밀려들었다.
그것은 누구도 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세계의 의지. ‘억지력’이었다.
자신의 모든 마력을 세계의 붕괴에 쏟아부은 유진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억지력에 오류를 일으킨 것이다.
나를 밀친 그람은 그 물결치는 억지력의 앞으로 나아갔다.
스스로를 희생해 이곳에 펼쳐진 억지력을 없애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람의 움직임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추었다.
“말했죠, 안 보내준다고.”
─······!
다음 순간, 물결치던 억지력이 유리처럼 무너져내렸다.
─이건······
“잊으셨어요? 나 외부인인 거.”
세계의 억지력이 작용하는 대상이란 어디까지나 ‘이터니티의 존재’다.
외부인인 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억지력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던 것이다.
어지간한 억지력은 지금처럼 기력으로 쉽게 무너트릴 수 있을 정도로.
─그렇다 하더라도 이 안으로 들어가면 그대는 죽는다.
“죽을지 살지는 해봐야 아는 거죠.”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세계가 붕괴해 죽을 처지였다.
─나를 사용하면 억지력을 없앨 수 있을 텐데?
“싫습니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 검인데, 죽어도 같이 죽어야죠.”
안 그러면 찝찝해서 내가 잠을 못 잔다.
─현명한 줄 알았는데 바보였군.
“성격이 이 모양이니 그람이 이해 좀 해주시죠.”
─이전부터 생각했다만, 그대는 마치 나를 인간처럼 대하는군.
“뭐, 다를 게 있나요?”
말만 통하면 그게 사람이지.
─나를 인간 취급하는 건 그대가 처음이다.
“그거 영광이네요.”
─훗.
별났군. 그리 말하는 그람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피식 미소 지은 내가 그람을 다시 거머쥐었다.
“그럼 가시죠.”
그렇게 나는 억지력의 영역으로 발을 내디뎠다.
휘아아아아─!
순간, 푸른 억지력의 파도가 내 몸을 덮쳐들었다.
마치 영혼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충격에 일순 정신이 뒤흔들렸으나, 나는 이내 억지력의 기류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갈수록 짙어지는 기류에 점차 몸을 가누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딱히 뭔가 뾰족한 수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억지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희생이 따라야 했으니.
다만, 그 희생이 꼭 그람일 필요는 없었다.
휘아아······
물결치는 억지력을 바라보는 내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선각자의 눈].영혼조차 꿰뚫어 보는 눈이 억지력의 중심과 그 너머의 유진을 응시한다.
그러던 어느 순간.
파직-!
억지력의 벽에 거미줄처럼 금이 번졌다. 더불어 내 눈이 미친 듯이 아파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양 눈을 부여쥐고 무릎을 꿇었다.
“큭!”
억지력과 맞바꾸어 선각자의 눈이 부서져 내리고 있던 것이다.
아쉽기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눈이야 조금 덜 보고 살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이 고통은 상상이상이네.’
마치 불구덩이에 눈알을 넣고 지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악문 입가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다행히도 그 고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선각자의 눈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뭐?”
파아아아아─!
놀란 내가 눈을 뜬 순간, 억지력이 무너져내렸다.
“크아아아아아!”
유진의 괴성이 사막에 울려 퍼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머리를 부여쥔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녀석을 멍하니 쳐다보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소리쳤다.
“소피아!”
후아앙 ─!
외치기 무섭게 내 곁으로 광풍이 지나갔다.
소피아의 대검이 떨어져 내리며 유진을 좀먹고 있던 우르크의 망령이 부서져 나갔다.
“크아아아악!”
완전히 부서지지 않은 망령에게서 마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폭주하는 녀석을 가만히 응시하던 내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세계의 붕괴에 모든 마력을 쏟아붓고 껍데기만 남은 녀석의 폭주는 그리 두려울 게 아니었으니.
여전히 위협적이고 굉장한 마력을 발산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쪽도 원군이 도착을 한 것이다.
어느새 마력풍이 걷혀나간 사막의 언덕. 그 주변으로 수많은 이들이 포진해 있었다.
차시우, 고르고프, 은호성, 그레이슨, 한윤, 서하린, 가스턴, 웨인, 이리나······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최상격의 초인들부터 십혈의 마인들까지.
그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터져 나오는 우르크의 마력에 정신을 차리곤 달려 올라온다.
긴장이 풀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다리가 휘청였다.
“해솔님! 괜찮으십니까?”
놀란 소피아가 재빨리 나를 받아 들었다.
“소피아.”
“예, 해솔님.”
“아파요.”
“예?”
의아해하던 소피아는 내가 어깨를 가리키자 그제야 나를 잡고 있던 손에서 황급히 힘을 풀었다.
그 허둥거리는 모습에 픽 웃은 나는 몸을 기댔다.
예고도 없이 와닿는 무게감에 놀란 소피아가 움찔거렸다.
“···해솔님?”
“앉죠.”
“네.”
이전까지는 몰랐는데 억지력을 거슬러 오르느라 내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사막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는 이어지는 싸움을 구경했다.
마력을 폭주한 유진, 아니. 우르크의 망령은 어마어마한 힘을 선보였으나 녀석의 상대는 이터니티의 정점에 달한 초인과 마인들이었다.
그들은 노련하게 망령의 힘을 빼가며 차분히 녀석을 몰아붙였다.
그렇게 나와 소피아가 말없이 구경을 하는 사이, 끝이 찾아왔다.
“허무하네요.”
“예, 그렇군요.”
내 말에 소피아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의 최후는 천우진의 기프트, 검성에 망령이 소멸하고, 차시우의 검에 목이 잘려 나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유진은 죽었으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문제는 저건데.”
여전히 무너져내리고 있는 사막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가 미간을 좁혔다.
유진은 죽었으나 녀석의 마력은 남아 세계의 붕괴를 이어가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붕괴는 사막을 넘어 이터니티 전역으로 번지리라.
하지만 이러한 심각한 문제는 의외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균열의 중심으로 이어지는 사막의 너머. 그곳에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을 본 내가 중얼거렸다.
“해결됐네.”
두 사람은 바로 오두막으로 향했던 타샤와 잠에 빠져있던 노아였다.
타샤 맥도웰이 노아의 본체를 깨워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다.
그리고 노아라면 붕괴를 늦추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오랜 세월 균열의 진행을 막아온 베테랑이 바로 노아였으니.
뭐, 아예 멈추지는 못하겠지만······
“그 정도쯤은 알아서 해결하시죠.”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순간, 밤하늘에 누군가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환상이 보여왔다.
그나저나······
“그건 대체 뭐였지?”
나는 선각자의 눈을 희생해 유진이 펼쳐놓은 억지력을 부수려 했다.
그러나 선각자의 눈은 여전히 건재했고, 억지력은 부서져 내렸다.
그 풀리지 않는 의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모든 일이 끝나고 필드를 돌아나가는 길.
“안 알려줘도 되겠어?”
“응, 말하지 마.”
이리나는 한세연의 말에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세연은 이번 싸움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뤘다.
그것을 한세연의 곁에 왔던 이리나는 또렷이 보았다.
그런데 한세연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이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아니, 걸음이 가벼운 게 오히려 기분이 좋아보이기까지 했다.
이리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언제 이해한 적이 있긴 하겠냐만은······
그때, 저 멀리서 이해솔이 보여오자 한세연이 그녀를 남겨두곤 먼저 걸어갔다.
“진짜 좋아하나 보네.”
날듯이 걸어가는 한세연의 뒷모습을 보며 이리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런 여자가 좋아하는 이해솔은 정말 복을 얼마나 받은 건가를 궁금해하며.
***
“해솔아!”
여전히 의문에 잠긴 채로 길을 걷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만 놀라 발을 멈춰버렸다.
“야, 너······”
“응?”
내 반응에 한세연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전히 평소와 같은 모습.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서는 무언가 하나가 빠져있었다.
===
▶한세연
보유 기프트 : X
===
천리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존재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배고프지?”
“어, 그렇긴 한데 그보다······”
“밥 먹으러 가자. 카레재료 사놨어.”
내 말을 끊으며 팔짱을 껴오는 한세연. 그 모습에 픽 웃은 나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내 말에 한세연이 방긋 웃어 보였다.
밖으로 나오니 세상에는 어느덧 노을이 져오고 있었다. 그 위로 떠오르는 상태창.
===
[최종 시나리오 : 귀환]수락하시겠습니까?
===
“배고프다, 가자.”
“응.”
밝게 웃는 한세연의 대답을 들으며, 내 곁을 따라 걷는 소피아와 보폭을 맞추며 일행과 함께 노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렇게 우리가 사라진 거리. 흐릿해져 가는 상태창에는 하나의 문구만이 남았다.
‘NO.’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