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Want To Be Duke’s Adopted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132)
입양된 며느리는 파양을 준비합니다-132화(132/241)
한참 후, 진정이 되고 나서야 고개를 든 데미안은 뒤늦게 서류를 발견했다.
제리트의 이름으로 후원하는 고아원의 리스트와 그에 대한 보고서였다.
자신이 보고 있던 것과 같은 서류였다.
남부 일로도 바쁠 엘리를 대신해, 자신이 먼저 검토하고 있었던 것인데.
‘역시 엘리답네.’
고아원에서부터 느꼈지만, 엘리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주도한 일은 끝까지 책임을 졌다. 잠들기 전까지 서류를 검토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
‘……그러니 나도 더 열심히 해야 해.’
엘리가 저 혼자만 두고 멀리 떠나지 못하도록. 그럴 일은 절대 없도록 할 거지만.
‘만약 엘리가 내 곁을 떠난다면.’
익숙한 불안감이 소년의 마음을 메웠다.
꾹꾹 감춰놨던, 절대 물어보지 못할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엘리.”
데미안이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엘리는 어째서 수인의 언어를 할 줄 아는 거야?”
황궁에 간 날, 데미안은 보았다.
엘리가 다른 언어를 쓰는 모습을.
수인의 언어를 쓸 줄 아는 사람은 소수 일족이거나, 아니면 황족이라고 했다.
소수 일족일 가능성이 더 높지만, 만약, 정말 만약에 엘리가 황족이라면…….
소년의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엘리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 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너무나 싫었다.
데미안이 자책하듯 눈을 꼭 감았다. 문득 속이 답답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꿈은 아닐까.
눈을 뜨면 더러운 축사가, 충혈된 눈의 주인이 저를 반길 것만 같았다. 호흡이 점점 가빠질 무렵이었다.
그때였다.
“음…….”
잠투정을 하던 엘리가 손을 쭉 뻗으며 검지만 간신히 잡고 있던 손을 꼭 맞잡았다.
데미안이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여전히 엘리가 있었다. 이것은 현실이었다.
그 순간, 가빴던 호흡이 순식간에 진정됐다.
‘꿈이 아니야.’
꿈이라면 이렇게 가슴이 뛸 리가 없으니까.
‘역시 난 네가 누구든 상관없어.’
네가 날 버리지만 않는다면, 난 아무래도 좋아.
데미안이 지그시 엘리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잘 자, 엘리.”
너로 인해 내가 항상 내일을 꿈꾸는 것처럼.
“좋은 꿈 꿔.”
* * *
에르하르트가 귀환했을 땐 늦은 밤이었다.
피 묻은 망토를 한쪽에 벗어던진 그가 싱글벙글한 프란츠의 얼굴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엘리 님께서 오셨습니다.”
“……엘리가? 무슨 일로?”
그가 조금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륀켈트 후작님과 함께 오셨더군요.”
“그렇게 생색내더니. 륀켈트 후작도 드디어 돈의 흐름을 읽었나 보군.”
그가 이죽거리며 피 묻은 장갑을 벗었다.
소매 너머로 언뜻 드러난, 뼈대가 굵은 손목에 피가 묻어 있었다.
공작은 항상 장갑을 꼈다.
그러니 저기에 피가 묻어 있다는 건.
‘……또 피를 보셨나 보군.’
한때 폭주하는 듯했던 공작의 광증은, 북부 절벽의 마물들을 죄다 죽이고 나서야 사그라들었다.
그러니 한동안 잠잠할 텐데, 또 피를 묻히셨다니.
‘공자님과 엘리 님이 위험해지실까 봐 걱정되는 건가.’
평소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던 분인데.
‘공작님도 많이 변하셨군.’
프란츠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 묻은 장갑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
“두 분께선 방에 계십니다.”
“자고 있나?”
“불은 계속 켜져 있었지만 엘리님께서 도착하신 이후, 곧장 서류부터 보신다기에 방해가 될까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또 일인가.
에르하르트는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모처럼 돌아왔으니 쉬면 좋으련만.
‘또 누굴 걱정시키려고.’
쯧. 그가 작게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똑똑.
형식적인 노크 후, 곧장 문을 열었다.
“그만 일하고 이제 그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 했다.
색색거리는 두 개의 숨소리 때문이었다.
데미안과 엘리는 손을 꼭 잡은 채, 테이블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나참.”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최대한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덮은 담요나 자세를 봤을 때, 엘리가 먼저 잠든 것이 분명했다. 담요는 분명 데미안이 덮어준 것이겠지.
침대에 뉘이기 위해 그가 먼저 엘리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그때였다.
주욱- 늘어난다 싶더니 엘리의 몸이 기우뚱거리며 한쪽으로 처졌다.
시선을 내리자, 데미안과 맞잡은 손이 보였다.
에르하르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잠이 들었으니, 이때만큼은 좀 느슨해져도 좋으련만.
‘하여튼 누굴 닮았는지.’
하는 수 없이 두 아이들을 한꺼번에 안았다.
눈 하나 찡그리지 않고 가볍게 안아 든 그가 아이들을 침대에 눕혔다.
이불을 덮어주자 엘리가 기다렸다는 듯 고로롱 코를 골았고, 데미안은 그런 엘리에게 조금 더 파고들었다.
창문 너머, 천천히 휘날리는 작은 눈. 바람의 부름에 응답하듯 흔들리는 촛불.
그리고 아이들의 따스한 체온.
아무런 고뇌도 느껴지지 않는, 평화로운 순간.
이 순간이 영원할 수 있을까.
스스로 던진 질문에 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것을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걱정 없이 잘 자라기만을 바랄 뿐.
“잘 자라.”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으으응” 하며 잠꼬대를 했다.
가족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 * *
휘잉.
작게 불어오는 바람에 난 인상을 찡그렸다.
평소 불어오던 남부의 따스한 바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좀 더 이불속으로 파고드는데, 따끈한 것이 품속에서 꼬물거렸다.
‘난로인가 봐.’
추웠는데 잘됐다. 흐뭇하게 웃는데, 문득 턱이 간지러웠다.
이상하다. 난로에 털이 달렸을 리 없는데…….
……잠깐만. 털?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시선에 보이는 건 곱슬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살짝 드러난, 빨갛다 못해 시뻘건 귀 끝.
‘데미안이잖아!’
나는 헐레벌떡 일어나 품의 데미안을 놔주었다.
얼마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데미안 얼굴 전체가 잘 익은 토마토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미안해. 잠결에 그만……. 많이 답답했지.”
“괘, 괜찮아…….”
“괜찮기는, 얼굴이 그렇게 빨간데.”
혹시나 아팠을까, 뺨을 쓰다듬던 난 멈칫했다.
“데미안.”
“응?”
“혹시 키 컸어?”
분명 앉아 있을 때, 내가 데미안을 내려다봤던 것 같은데.
지금 나와 데미안의 눈높이는 비슷했다.
“그래?”
데미안은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일어나 볼래?”
내 부름에 데미안이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눈높이가 비슷했다.
분명 나보다 한참 작았었는데…….
‘한 달 새 벌써 이렇게 커?’
아이들이 워낙 쑥쑥 자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얼떨떨한 마음에 데미안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엘리?”
데미안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제야 난 뒤늦게 손을 내렸다.
“미안해, 아까 많이 놀랐지. 피곤해서 잠버릇이 심해졌나 봐. 다음에도 이런 일 있으면 그냥 나 때려. 알았지?”
“으응…….”
데미안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때려도 된다니까- 하고 말하려는데.
“누가 누굴 때려?”
“공작님!”
공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밝을 때, 공작성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라서 저절로 몸이 벌떡 일어났다.
공작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세상이 뒤집히지 않고서야, 데미안이 널 때릴 리 없는데. 얼굴이 엉망이군.”
“자, 잠을 너무 많이 자서 그래요.”
“수면 부족이었다는 뜻이다. 또 쓰러지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안 쓰러질게요.”
얌전히 대답하자 공작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나오너라. 밥 먹어야지.”
“네에.”
기다렸다는 듯 아셀과 로이나가 나와 데미안을 씻겨주었다.
그 후, 우리는 곧장 식당으로 갔다.
오랜만에 함께 식사해서 그런지 밥이 술술 넘어갔다.
“체한다.”
“괜찮아요.”
공작의 걱정을 한 귀로 흘리며 맛있게 먹고 있는데, 프란츠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엔 여러 서신이 들려 있었다. 무심한 얼굴로 보낸 이를 확인하던 공작이 일순간 얼굴을 굳혔다.
“이걸 왜 가져왔지?”
“……무슨 내용이 있을지 모르니, 일단 공작님께서 확인하는 게 좋으실 것 같습니다.”
“태워버려.”
“하지만 수신인은-”
프란츠가 무어라 대답하려다 입을 닫았다.
‘대체 뭐기에 저런 반응이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때였다.
죄송하다는 듯, 고개 숙이고 돌아서던 프란츠가 실수로 서신을 떨어뜨렸다.
덕분에 고스란히 발신인이 드러났다.
‘주워줘야지.’
무심결에 의자에서 내려가자 프란츠가 다급히 날 불렀다.
“엘리 님, 괜찮습니다. 제가-”
서신을 줍던 난, 그대로 굳고 말았다.
봉투에 적힌, ‘마르시프’ 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마르시프 백작가.
그곳은 내가 첫 번째로 파양된 가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