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Want To Be Duke’s Adopted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176)
입양된 며느리는 파양을 준비합니다-176화(176/241)
솔리오의 말을 들었을 때, 에르하르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일이었다.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쉬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금.”
그가 다소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에르하르트의 목소리엔 충격도, 상실도 없었다. 그저 진실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사람 같았다.
이에 솔리오는 입을 열어, 에르하르트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유리아는 임신 중이었어요.〉
에르하르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쁜 딸을 낳았다더군요.〉
“하.”
그러나 이내 이어진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을 잘못 맞춘 것 같군. 내 몸에 흐르는 이 빌어먹을 피는 절대 딸을 낳을 수 없어.”
〈유리아는 공작님의 광증을 정화했다고 들었어요. 그런 힘을 가진 그녀라면…… 딸을 낳아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솔리오가 조금 머뭇거렸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하르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은 상태였다.
유리아가…… 딸을 낳았을 리 없었으니까.
때문에 유리아의 힘이 있다면 그녀가 딸을 임신했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솔리오의 말은 이해하기 쉬웠고, 그만큼 그를 빠르게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증거는.”
에르하르트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유리아가 딸을 낳았다는 증거와 그 도둑이 무슨 연관이 있지? 그동안 조용히 살았으면서 갑자기 내게 소식을 전하려던 이유는 무엇이고?”
되묻는 목소리에 조급한 감정이 묻어났다.
〈그것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
〈하지만 증거는 분명 있다고 했어요. 섀넌이 라티오넬 백작가에 숨어든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살아 돌아오지는 못했지만요.〉
에르하르트가 반쯤 넋 나간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비웃듯 비틀려 올라간 입매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유리아는 죽었어.”
이윽고 그가 짓씹듯 말했다.
“그건 내가 제일 잘 알아.”
유리아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그가 진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녀의 기운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녀의 힘이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귀환 후, 그가 가장 먼저 조우한 것은 유리아가 아닌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 시종들이었다.
그들이 한참 만에 내뱉었다.
출정을 나가고 얼마 안 되지 않아, 유리아가 죽었다고.
처음엔 믿지 않았다. 그녀는 다소 짓궂은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어김없이 장난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어디에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남긴 것이라곤…… 이 저주받은 피를 해결하려고 했던 흔적들뿐이었다.
결국 에르하르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정말이구나.
그녀가 제 곁을 떠났구나.
그때 에르하르트의 이성은 완전히 날아갔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땐 스스로를 해쳤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 빌어먹을 피가 기어코 그를 살려놓았다. 결코 죽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벌을 주었다.
평생 죽지 않고 이 지옥 같은 삶을 살겠노라고.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그녀를 기억하겠노라고.
‘그런데, 아이라니.’
그녀가 만약 임신을 했다면 제게 알리지 않았을 리 없었다.
“임신이었을 리가…….”
미간을 일그러뜨린 그가 고통스럽게 중얼거린 순간.
“에르하르트, 할 이야기가 있어.”
유리아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건 당신에게도 무척 중요한 정보예요. 들으면 깜짝 놀랄 거예요.”
출정을 나가기 전에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소 엉뚱한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에르하르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를 닮은 녹색이면 좋겠어요.”
그것이, 설마 임신 사실을 전하려고 했던 것이라면.
범람하기 시작한 후회가 그를 휩쓸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남자가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폭주의 전조 증상이었다. 에르하르트는 이를 악물며 정신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이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리아가 남긴 보물을 찾아야 했다. 스스로를 해치는 건 그다음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가 혼란으로 뒤섞인 생각들을 정리했다.
출정 전, 유리아의 배는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임신 사실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이를 낳았다는 이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용인들이 알려주었던 유리아의 사망 시기에는 간극이 존재했다.
즉, 유리아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망 일자로부터 최소 몇 달은 더 살아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에르하르트는 가장 먼저 엘리를 떠올렸다.
아니, 처음 엘리를 봤을 때부터 그는 유리아를 떠올렸다.
맑은 녹안이 그녀와 꼭 닮아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 도둑에 대해 조사했다.
만약, 엘리의 엄마가, 그 도둑이 훔친 것이 엘리라면.
그 생각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조사했다.
그렇게 알아낸 정보는…….
엘리의 엄마, 그러니까 알려지지 않은 황후의 사생아 동생은, 유리아가 사라지기 전부터 임신 중이라는 것이었다.
출산을 했다면 13살, 엘리의 나이와 똑같을 터.
2차 전쟁을 나갈 당시, 유리아가 임신을 했었더라면 아이는 12살 혹은 11살이어야 했다.
황후는, 라티오넬은 사생아 황녀의 출산을 숨기기 위해 엘리의 엄마를 도둑으로 몰아 죽인 것이다.
그는 엘리가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애써 모든 사실을 숨겼다.
그 작은 아이가 알기에는 너무 비참하고, 충격적인 이야기였으니까.
에르하르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면 그 아이는.”
〈…….〉
“유리아의 아이는 지금 어디 있지.”
〈저도 그것까지는 알지 못 합니다.〉
“…….”
〈제가 아는 거라곤 아이를 출산한 곳이 대륙 남쪽이라는 정보뿐이었습니다. 섀넌이 무엇을 위해 백작가에 갔는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솔리오가 설명을 이어갔으나 에르하르트에게는 닿지 못했다.
대륙 남단.
한때 세계수가 있던 자리가 유리아를 처음 만난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기가 들끓어 언데드로 가득한 장소였다.
‘거기서 아이를 낳았다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아이는 어디에…….
생각하던 에르하르트의 숨이 일순간 멈췄다.
그를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사람은 유리아뿐이었다.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어머니 한 분이 계셨지만,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대, 대륙 최남단, 르디아 산맥입니다.”
그녀와 똑같은 힘을 가진 성녀이자 유일하게 그의 폭주를 제어한 사람.
그렇게 에르하르트는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솔리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언젠가 그가 알아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섀넌까지 죽고, 증거가 없는 상황이다. 저 때문에 엘리마저 신뢰를 잃을 수 있었다.
“이 일은.”
그때, 에르하르트가 한참 만의 정적 끝에 입을 열었다.
“두 아이들에게 말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군.”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했다.
그러나 수많은 범죄자들을 마주했던 솔리오는 알고 있었다.
이지를 잃기 직전인 사람의 목소리가 그러하다는 것을.
하지만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솔리오는 그러겠노라 말했고, 에르하르트는 등을 돌렸다.
* * *
방문이 열렸을 때, 공작님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공작님.”
내가 다가가자 공작님이 느릿하게 시선을 움직였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공작님이 천천히 손을 올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어딜 좀 다녀와야겠구나.”
“……오래 걸려요?”
“장담할 수가 없어서 미안하군.”
공작님은 그렇게 말하며 데미안을 바라봤고, 데미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은 이윽고 우리 곁에서 멀어졌다.
나는 항상 태산 같았던 뒷모습을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돼?〉
들어가자마자 이모가 기다렸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항상 사고만 쳐놓고, 또 사고를 기다리는 건지 이모의 눈은 연신 반짝이고 있었다.
“계속 라티오넬 백작의 부탁을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도움은, 제 친구가 줄 거예요.”
그러자 이모가 오물을 뒤집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나보고 그놈 따까리 노릇을 하라는 거야? 그 자식이 네 엄마한테 어떤-!〉
〈언니.〉
메이의 조용한 부름에 이모가 분한 듯 입을 다물었다.
〈……계획이 뭔데? 라티오넬을 부흥시키려는 건 아니지?〉
그녀의 물음에 난 입술을 달싹였다.
“이모가 계속 이기면 귀족들은 이모를 해하려 들 거예요. 그때 이모는 고용한 사람이 라티오넬이라는 정보를 아주 은근슬쩍 흘려주면 돼요.”
라티오넬은 아샤벨과 함께 새로운 학술원을 짓겠다고 세상에 공표했다.
게다가 학술원 같은 교육 시설엔 여러 이해관계가 붙는다. 그와 엮인 가문도 많을 터.
그런데 교육 시설을 짓는 가문이 제국 내 최대 규모의 카지노를 운영하고 있다면?
당연히 학술원에 대한 신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러 귀족들도 함께 얽혀 있으니, 제 아무리 라티오넬이라도 비난은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그들의 학술원에 가지 않을 것이고, 선생들만 넘쳐나겠지.’
뛰어난 교육자라고 해도 따르는 학생이 없다면 속 빈 강정에 지나지 않다.
라티오넬은 고용한 선생들의 책임, 학술원을 유치하는 데 들었던 비용과 다른 가문과의 관계, 그리고 황후의 친정이란 이름까지 한꺼번에 잃게 될 것이다.
‘더불어 아샤벨도 라티오넬 쪽 학술원에 힘을 보태겠다 말했으니, 성녀로서의 체면도 구겨질 테지.’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암흑가에 지지를 표명한 것이니까.
〈나쁘지 않네. 역시 내 조카야.〉
판단을 마친 이모가 씩 웃었다.
〈그 재수 없는 낯짝을 보는 건 싫지만 최대한 노력해 볼게. 더 큰 붕괴를 위해서니까.〉
“감사해요, 이모.”
〈내가 더 고맙지. 평생 다시 못 볼 가족을 다시 만나게 해 줬으니까.〉
“…….”
〈섀넌도 기뻐할 거야, 분명.〉
이모가 빙긋 웃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누가 올지 모르거든. 그동안 잘 지내야 한다, 우리 조카.〉
〈엘리 님,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모와 메이의 인사와 함께 통신이 종료됐다.
웃으며 화면을 바라보던 난 천천히 표정을 흩뜨렸다.
“……엘리.”
묵묵히 내 뒤를 지키고 있던 데미안이 말했다.
“괜찮겠어?”
“……뭐가?”
“다 들었잖아, 우리.”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애써 짓고 있던 웃음이 빠르게 흐려졌다.
“성녀를 무너뜨리면.”
말을 잇던 데미안이 멈칫하고선 정정하듯 입술을 다시 달싹였다.
“……성녀가 정말 공작님의 딸이라면, 그래서 라티오넬과 함께 추문을 겪는다면, 공작님도 괴로워하실 거야.”
“그러니 좀 더 신중하게-”
“그전에, 정말 그녀가 진짜 딸이어야겠지.”
내 말에 데미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