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Want To Be Duke’s Adopted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190)
입양된 며느리는 파양을 준비합니다-190화(190/241)
엘리가 번쩍 눈을 떴다.
손에서부터 시작된 빛이 폭죽 터지듯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내 빛이 곧 맑은 녹음의 빛과 황금빛으로 나뉘어 뒤섞이기 시작했다.
찬란한 축복의 빛이 검은 하늘을 물들였다.
탄생을 기뻐하듯 주위를 마구 배회하던 빛이 엘리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따스한 감각.
엘리는 젖은 시야를 깜빡였다.
‘설마 이 빛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엘리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빛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한데 뒤섞이던 빛이 에르하르트에게로 날아갔다.
세례처럼 은은한 빛이 그를 감쌌다.
기운을 읽은 데미안이 빠르게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어쩌면.’
입술을 깨물던 데미안이 가슴에 박혀있던 검을 뽑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빛이 그에게 스며들었다.
피로 흥건한, 꿰뚫렸던 곳이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엘리가 황급히 에르하르트 곁으로 다가가 가슴께에 귀를 붙였다.
두근. 두근.
선명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꿰뚫린 가슴 또한, 작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너덜너덜해진 옷자락만이 방금 전 비극이 거짓이 아님을 이야기해 주었다.
엘리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살았어.
아빠가 다시 살아났어.
눈을 질끈 감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녀의 입에서 다시 어린아이 같은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데미안도 억눌린 신음을 내뱉을 수 있었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엘리. 공작님께선 그냥 잠드신 것뿐이야.”
그러곤 이성을 잃은 엘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귓가에 연신 속삭였다.
아버지는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았노라고.
네가 그를 살려냈노라고.
확신을 주는 음성에 엘리는 떨리는 숨을 토해내며, 에르하르트를 와락 끌어안았다.
* * *
깊은 어둠.
에르하르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것만 인지할 뿐.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았으니, 이대로 평생 눈 감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그래, 어차피 이 삶에 미련 따윈 없으니까.’
미련 따윈…….
“에르하르트 슈에츠, 이 멍청이!”
그 순간, 귓가로 벼락이 내리치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내게 사과하지 않는다면 오늘 일을 후회할 거예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이윽고 들리는 목소리엔 저의 목소리도 함께였다.
“정말 몰라서 물어요? 계속 틱턱대고, 인상 팍 쓰고, 무서운 말만 하고. 부인한테 할 태도인가요? 당신 친구를 봐요. 얼마나 끔찍이 부인을 아끼는데. 볼 때마다 부러워 죽겠어요!”
“내가 항상 그대 뒤를 졸졸 따라다녔으면 좋겠나?”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표현이 서툴러서 미안하군.”
“그거라도 아니 다행이네요!”
성난 목소리가 뾰루퉁한 대답을 내뱉었다.
“그, 있잖아요.”
그러다 다시 눈치 보는 어조로 바뀌었다.
“내가 외부 복도를 늦게 가봐서…… 확인이 늦었는데…….”
“…….”
“온실…… 혹시 당신이 만든 거예요?”
“말하지 않았나. 표현이 서툴러서 미안하다고.”
담담하게 말하고는 있으나, 서운한 기색이 뚝뚝 묻어났다.
“……아니, 그걸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가보라고 말했어야죠. 아니면 같이 가달라고 하든가.”
“…….”
“……많이 서운했어요?”
“그다지.”
“표정을 보니 그게 아닌데?”
눈치를 볼 땐 언제고, 잔뜩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서운했겠네, 우리 공작님. 알았어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위로를 해줄게요.”
“그게 뭐지?”
“바로 이렇게, 안아주는 것.”
그런데 대체 누구일까.
누구이길래 이렇게 자꾸만 가슴이 조여오듯 아파오는 것일까…….
“우리는 행복할 거예요. 가족은, 서로 사랑하는 거니까.”
그래, 가족.
그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를?
누구를 지켜야 하지?
“오늘만큼은 아버지로 할까.”
“……아빠 해주실 거예요?”
“네가 원한다면.”
그 순간,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빠.”
“악몽은 다 제가 가져갈 테니까…….”
“함께 있게 해 주세요.”
새싹 같던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성장하는 나무처럼 또렷하게 변해 갔다.
그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어둠이 점점 걷히기 시작했다.
시체처럼 굳어 있던 손가락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저희 엄마가 그랬거든요. 가장 좋은 위로는 안아주는 거라고.”
“아버지.”
가족.
그래, 그의 가족의 목소리였다.
이렇게 누워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멈춰 있던 공간이 깨지고 자각을 축복하듯, 천천히 시야로 빛이 들어왔다.
이윽고 어둠이 완전한 종말을 맞이한 순간.
“아빠!”
에르하르트가 눈을 번쩍 떴다.
그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밤하늘을 수놓은 보름달이었다.
푸른빛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몰아치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조각난 기억들이 이제 막 혼란을 깨우친 이성 사이로 파고들었다.
곧 그가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 그는 분명 이성을 잃었었다. 끊임없이 죽이라는 음성이 그를 재촉했고…….
아이들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몇 번이고 속삭였다.
아이들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광증보다 앞선 본능이었다.
그래서 미련 없이 제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는데…….
어째서 살아 있단 말인가.
‘게다가 몸속에 맴도는 이 기운은…….’
그가 가슴께를 더듬었다.
잘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엘리에게 받았던, 성수가 담겨있던 병이었다.
‘어째서 이게 깨져 있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던 그가 멈칫했다.
……아이들은.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나.
에르하르트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겨운 몸을 움직여, 아이들이 있는 곳을 찾으려 할 때였다.
뒤편에서 누군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따스한 봄을 닮은 체온. 떨리는 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한 악력.
엘리가 분명했다.
살아 있다. 다치지 않았어. 그가 찰나의 안도를 느낄 때였다.
“……아빠.”
이윽고 엘리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의 몸이 우뚝 굳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물어야 했는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빠, 저예요.”
그에 엘리가 울먹임을 참으며 한 자, 한 자 힘줘 말했다.
“제가…… 아빠 딸이었어요.”
물기 가득한 음성에 에르하르트는 넋 나간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한시도 쉬지 않고 눈물을 흘린 듯, 엘리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저를 바라보는, 물기 어린 맑은 녹안은 또렷했다.
처음부터 유리아를 떠올렸던, 그래서 더 아닐 거라고, 헛된 기대는 가져선 안 된다고 결심하게 만들었던 눈동자가 저를 바라본다.
그 아이가 말한다.
제가 당신의 딸이라고.
그리고…… 맞닿은 온기 사이로 전해지는 유리아의 기운까지.
순간 에르하르트의 숨이 멈췄다.
“지금, 무슨…….”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엘리가 제 딸이라면, 엄마로 생각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지 않은가…….
그가 언어를 잊은 사람처럼 더듬거리자 엘리가 대신 말을 이었다. 강한 확신을 담아서.
“저였어요.”
“…….”
“유리아 님과 공작님의 딸이…… 바로 저였어요.”
엘리가 눈물 젖은 얼굴로 헐떡이며 말했다.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던 그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엘리가 자신의 딸일 리 없었다.
그랬다면 진작에…….
순간, 에르하르트의 시야에 물기 어린 맑은 녹안이 비쳤다.
그가 이를 악 물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아이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공작님 가문으로 갈래요.”
당당하게 저를 데려가 달라 말한 것.
“제, 제가 만든 장식이요. 남작부인과 함께 만들었어요. 처음 만든 거라 볼품없지만…….”
저를 위해 그 작은 손을 움직여 매듭 장식을 만들어 준 것.
“악몽은 다 제가 가져갈 테니까…….”
이미 익숙해진 고통을 제 일처럼 슬퍼한 것까지.
아이는 쉬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제가 당신의 딸이라고.
이보다 더 강한 확신은 없으리라. 그의 턱이 덜덜 떨렸다.
“네가, 어떻게…….”
이윽고 딱딱하게 굳은 그의 뺨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빠…….”
엘리가 울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눈물 젖은 뺨을 쓸었다. 제 얼굴이 더 엉망인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그 손길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제 딸이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눈앞의 딸이 황제의 끄나풀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아이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막아주지 못했다.
이토록 아둔한 무지에 대한 죗값은 어디서 받아야 할까.
“내가…….”
그가 떨리는 입술 새로 죄책감을 토해냈다.
“미안하다, 내가…….”
사과를 내뱉던 그의 입술이 다시 닫혔다.
이제 와서, 제가 무슨 염치로 미안하단 말을 내뱉겠는가. 저는 아무런 자격도 없는 놈이었다.
그가 무너지려는 다리로 겨우겨우 버티고 일어났다. 절망을 만든 사람은 그였으니, 감당하는 것도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아빠, 안 돼요!”
그러나 이어진 말에 에르하르트의 발목이 붙들렸다.
“……저는 괜찮아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
“어차피…… 우리가 가족이 아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잖아요…….”
그에 에르하르트의 눈이 거칠게 떨렸다.
“이젠 알아요. 제가 황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던 거.”
“…….”
“그래서 모르는 척 해주셨던 거잖아요. 제가 수인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걸.”
황족은 그들의 원수였다.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엘리가 황제의 딸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엘리를 내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황후의 힐난에 혹시라도 눈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날까, 직접 그녀의 눈을 가려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엘리의 부탁을 받아들여, 학대를 일삼았던 고아원 선생들을 해고해 주었다.
엘리가 진행하고 싶은 사업을 묵묵히 지지해 주었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자신이 만든 못생긴 매듭을 예쁜 매듭이라 말하며 고맙다는 말을 해주었다.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 것도, 아프면 안 된다는 애정 어린 인사도, 네 몸을 가장 소중히 여기라는 말도.
전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가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가족이 아니라 말할 수 있겠어.’
“피가 이어지지 않았더라도, 저희는 처음부터 가족이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
“그러니 우리는 더 행복해질 거예요, 반드시.”
또렷한 척 애쓰던 엘리의 목소리가 다시 젖어들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서로가 가족임을 알지 못했던 건 그들의 탓이 아니었다.
소중한 것을 너무 많이 빼앗겨서, 제 목숨보다 귀중해진 것을 감히 욕심낼 생각조차 못한 것뿐이다.
엘리의 말이 맞았다.
엘리와 데미안, 두 아이들을 데려온 순간부터 절망으로 가득하던 그의 세계가 달라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족이었다.
에르하르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물이 그의 뺨을 잔뜩 적셨다.
한 번도 소리 내 울어보지 못 한 사람처럼 억눌린 신음만이 입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가 유리아가 세상에 남긴, 가장 아름답고 귀한 색채를 끌어안았다.
다시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