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Want To Be Duke’s Adopted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217)
입양된 며느리는 파양을 준비합니다-217화(217/241)
“생각은 해 보셨나요?”
“…….”
“아, 여기 계시니 이미 대답은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겠군요.”
아샤벨이 그의 대답을 가로챘으나, 파비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태양제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파비안은 신전을 자주 찾았다.
신전은 라티오넬과 사이가 틀어진 상태였다. 당연히 마테오를 지지할 리 없었고, 성녀의 추방을 주장한 엘리도 지지할 리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전에게 파비안은 두 사람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전 황태자 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파비안은 단칼에 그들의 수작을 잘라냈다.
황제 자리에 욕심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테오와 달리, 파비안이 걷는 길은 온통 가시밭길이었다, 황제가 된다고 그 길이 꽃길로 변할리는 없었다.
그렇게 제 살이 깎이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던 파비안에게, 처음으로 가시덤불 속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이거, 저쪽 소각장에서 주웠어요.”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맑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천한 것 보듯 하는 눈초리에도 슬퍼해 본 적이 없는데, 난생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선심 쓰듯 던진 말에 이토록 기쁠 수 있다니.
그 목소리를 들은 후부터, 그는 더 이상 제 발밑의 가시가 아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가시덤불 속에 기꺼이 제 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그녀가 황제 자리를 원한다. 손에 가진 것을 모두 털어서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제가 경합을 포기하면 엘리가 좀 더 유리해질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전을 자주 찾았던 것은, 쉬이 거둬지질 않는 제 마음 때문이었다.
한때 엘리를 마음에 두긴 했으나, 그들은 이복 남매였다.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사이.
지금은 이렇게 괴롭지만, 아직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은 것뿐이라고.
덮어두고 모르는 척하면 언젠가 이 마음도 사그라들 것이라 생각했다.
어김없이 신께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1 황자 전하.”
갑작스럽게 아샤벨이 저를 찾아왔다.
“기도를 하러 오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도했는지는 말할 필요는 없었기에, 파비안은 필요한 대답만 했다.
“3 황녀님과 관련된 기도였나요?”
그러나 이어진 말에 파비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왜 제가 제 누이와 관련된 기도를 한단 말입니까.”
“어머, 아니었나요?”
아샤벨이 놀란 얼굴로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황자님.”
그러나 가려진 손 너머, 살짝 드러난 입매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3 황녀님을 마음에 두고 계시잖아요.”
“……!”
“그 증거로 한때 사교계에선 황자님께서 혼인 무효에 대해 자문을 구하셨다는 소문이 파다했지요.”
“…….”
“설마, 모른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시겠지요?”
파비안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모른다고 하면 분명 거짓말일 터다.
하지만 그가 깨달았을 땐,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후였다.
그가 혼인 무효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승전 연회 때 엘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것이 소문의 빌미가 되었다.
혼인 무효에 대해 물은 건 제 충동이 빚어낸 결과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승전 연회 때 엘리에게 다가갔던 건, 그녀가 눈여겨보는 아카데미 학생들을 소개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에게 따로 미안하다 말하고 싶었지만, 제 행동이 더 큰 화마로 번질까 그러지 못했다.
게다가 엘리와 데미안은 이혼과 추문이 무색할 만큼 잘 지내지 않았는가.
그래. 결국 저만 조용히 빠져주면 되는 일이었다.
“……다 지난 일입니다. 지금은 그 아이를 누이로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으신 건 아니고요?”
이어진 말에 그가 멈칫했다.
아샤벨이 빙긋 웃었다.
“그 세상 어떤 오라버니가 이복누이를 위해 황좌를 포기하겠어요.”
“…….”
“세상에선 그런 헌신을 사랑이라 부르더라고요.”
물론 이쪽의 경우는 헌신보단 짝사랑이 더 어울리겠지만.
그 속내를 뒤로한 채 아샤벨이 말했다.
“가지고 싶지 않으신가요?”
“……!”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요.”
그녀가 인자한 얼굴로 그와 낯을 가까이했다.
그늘진 얼굴 속 녹안이 번뜩였다.
“1 황자 전하께서 3 황녀 전하를 손에 넣을 수 있도록 만들어 드릴게요.”
“……성녀님.”
“겸사겸사 눈엣가시 같은 2 황자 전하도 없애드리면, 꽤 괜찮은 거래가 될 것 같은데요.”
“성녀!”
분노를 참지 못한 파비안이 노성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무슨 말을…… 그대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
“…….”
“오늘 대화는 못 들은 걸로 하지. 그러나 두 번 다시 내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간 가만있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아샤벨이 안타깝다는 듯 눈매를 아래로 내리깔았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요. 혹시 마음이 바뀌신다면 다시 저를 찾아주세요.”
그 말과 함께, 아샤벨은 몸을 돌려 기도실을 나섰다.
혼자 남겨진 파비안은 헛웃음을 흘렸다.
‘추방당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군.’
하지만 그 생각과는 달리 고요했던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이건 기대감이었다.
어쩌면, 정말 엘리를 가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
하지만 파비안은 다시 생각을 바꿨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그녀가 웃어주는 것.
그러다 가끔 제게 시선 한 자락을 던져주는 것. 그뿐이었다.
하지만.
사기로 가득 찬 콜로세움에서, 그녀가 제가 아닌 데미안의 손을 잡은 순간.
이성이란 댐으로 애써 억눌러왔던 그의 감정이 결국 범람하기 시작했다.
많은 걸 바란 게 아닌데.
그저 네 시선 한 줌 만을 원했을 뿐인데.
너는, 어째서.
나를 제대로 봐주질 않나.
나는 어린 날, 네가 던진 시선 하나를 지금껏 붙잡고 있는데…….
파비안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마음이 점점 어둡게 물들었다.
저 녹안이 오로지 저만을 바라보게 만들고 싶었다.
아름다운 미소가 오로지 제게만 향했으면 했다.
그래,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애써 그가 숨겨왔던 진심이었다.
파비안이 굳은 얼굴로 아샤벨을 응시하자 그녀가 이해한다는 듯 너그럽게 웃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외면받는 기분이 어떤 건지, 드디어 깨달은 듯했다.
태양제 때, 아샤벨은 일부러 사기를 이용해 스스로를 공격했다.
아니, 공격이라기 보단 흡수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제 몸 일부는 사기로 이뤄져 있었으니.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엘리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제가 만든 사기를 정화한 것이다.
사기를 정화할 수 있는 건, 세계수의 힘을 가진 자밖에 없었다.
그 순간, 어긋나 있던 조각이 하나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신력의 흐름이 멈춘 것이 언제라고 했지?
그래. 슈에츠 공작이 다시 일어난 순간부터였다.
살인을 명했으나, 다시 돌아온 슈에츠 공작.
그리고…… 죽지 않고 돌아온 엘리와 데미안.
맑은 녹안. 세계수의 힘.
‘……너였구나.’
내가 가져야 할 힘을 가진 사람이, 너였어.
그래서 찾지 못한 거야.
아샤벨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일부러 마테오를 공격해, 카르티아를 궁지로 몰려던 제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제가 세운 계획을, 엘리가 유리한 방향으로 또다시 바꿔버린 것이다.
그래도 몇 가지 수확은 있었다.
하나는 어리석은 사랑을 깨닫고 복수심에 물든 사내였으며, 또 하나는…….
아샤벨이 싱긋 웃었다.
“그럼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먼저 전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아샤벨은 파비안과 함께 어딘가로 향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신전에서 따로 관리하는 감옥이었다.
일반 범죄자들과는 달리, 신성모욕을 저지른 사람들은 신전 감옥에 갇혔다. 황후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독방으로 들어갔다.
옥사는 몸조차 제대로 뉘일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어째서 이곳에…….’
옥사를 살피던 파비안이 눈을 크게 떴다.
카르티아는 그곳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폐하. 좋은 오후지요?”
“…….”
“아, 물론 여기엔 햇빛 한 잠 들지 않아서 모르시겠구나.”
“…….”
“아, 그것보다 좋은 소식이 있어요. 1 황자 전하께서 폐하를 만나러 오셨답니다.”
아샤벨의 장난스러운 말에 카르티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고요한 눈동자는 작은 떨림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제가 여기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성녀님. 어째서 이곳에 저를 안내하신 겁니까?”
“그 대답은 내가 하마.”
파비안의 물음에 카르티아가 대신 대답했다.
“난 그동안 네게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녀는 늘 흉내 내던 너그러운 황후 가면을 내던진 듯, 고상한 말투를 쓰지 않았다.
“마테오가 날뛰고, 너를 괴롭히는 것을 외면했어. 마테오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였지.”
“…….”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이구나. 정말 미안했다.”
“하.”
파비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황후의 처형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죽음을 눈앞에 두어, 이제 와 참회라도 하려는 것인가.
감히, 누구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싶으신 거라면 신관을 불러드리겠습니다.”
“…….”
“그분이라면 좀 더 차분히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죠.”
파비안이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대륙 전쟁 후, 다른 신탁이 내려왔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파비안의 발이 붙들렸다. 그가 고개를 돌려 카르티아를 바라보았다.
“동쪽의 아이가 북부를 향할 때, 새로이 떠오를 태양을 발견하리라.”
“동쪽의 아이라면…….”
동부의 주인, 데미안을 뜻함이 분명했다.
그리고 새로이 떠오를 태양은 분명, 엘리겠지. 엘리가 황제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륙 전쟁 이후, 신탁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전 교황 성하께서도 신병에서 일어나지 못 하고 서거하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큰 혼란을 가져올 신탁이니 알리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그 아이를 죽이면 신탁은 없었던 일이 될 테니까.”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선대 클라이더 공작 부부의 사고 후 교황은 신병을 앓아 깨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신병이 아니었다.
신탁을 발설해, 인과를 어지럽힌 교황에게 신이 벌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전 공작 부부를 죽이셨군요. 현 클라이더 공작이 3 황녀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파비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한데 이제 와 제게 그걸 알려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나를 이용하거라.”
“……예?”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나를 그릇으로 이용해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