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Want To Be Duke’s Adopted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57)
입양된 며느리는 파양을 준비합니다-57화(57/241)
감정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
친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 멍하니 손만 놓고 있었다.
‘데미안이 아니었다면 계속 정신이 팔려있었을 거야.’
저 사내가 내 아버지인지 아닌지는 당장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너무 아파요, 신관님.”
나는 울먹거리며 피투성이인 팔을 재촉하듯 흔들었다.
이바나와 아셀의 응급처치 덕에 흐르던 피는 멈췄지만, 상처는 그대로였다.
이대로라면 흉이 지겠지만, 신관의 신력이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신의 뜻을 전달하는 신관님께서 다친 아이를 그냥 지나칠 리 없으니까.’
오블리에가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짙은 녹안이 나를 마주했다.
이윽고 일자로 닫혀 있던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당연하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오블리에가 피 묻은 손수건을 품속에 감추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아프신 분 먼저 살피는 게 도리였는데…… 죄송합니다.”
오블리에가 벌써 멍이 든 손목을 붙잡았다.
아이답지 않은 악력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지만 참을 만했다.
오블리에의 작은 손이 환부, 바로 위에 멈췄다.
‘신성력이란 어떤 걸까.’
나는 제국에서 가장 성스러운 힘이라는 신성력을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오블리에가 손을 거뒀다. 그러더니 로브 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병에 불투명한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성수입니다.”
나의 의문을 알아차린 건지 오블리에가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신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섣불리 신성력을 보여드릴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기가 막히는 대답이었다.
다른 귀족들에게는 신성력을 마음껏 퍼부어주면서, 이럴 땐 안된다고?
‘그게 말이 돼?’
인상을 찡그리는 나와 달리, 오블리에는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성수가 들어 있는 병을 열었다.
내 환부 위로 성수가 쏟아지려 할 때였다.
탁!
그 순간, 데미안이 거친 손길로 성수가 든 병을 쳐냈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병이 깨졌다.
“데, 데미안?”
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데미안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한 얼굴로 오블리에를 향해 물었다.
“신관, 저기에 든 게 정말 성수가 맞아?”
노려보는 소년의 눈빛이 매서웠다.
* * *
‘저게 어떤 건데!’
오블리에는 분노로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형제님, 신께서 주신 귀한 선물을 함부로 내치시다니요.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내 빠르게 표정을 바꾼 그녀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성수가 아니잖아.”
그러나 데미안의 태도는 강경했다.
“대체 무슨 말씀을…….”
오블리에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잠깐.’
그러다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저걸 어디서 봤더라?’
오랫동안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떠올랐다.
‘뮬타의 약을 썼던 실험체.’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아, 자연스럽게 잊고 있었는데…….
‘이 아이가 클라이더의 아들이었단 말인가.’
하. 오블리에는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몰라봤다니.
데미안을 응시하는 오블리에의 눈빛이 짙어졌다.
‘이게 성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본 것도, 모두…….’
지금보다 한참 어린 데다가, 약에 취해 생사를 오가는 중이었을 텐데도 이것을 기억하다니.
‘하지만 증거가 없지.’
표면적으로 그녀는 신관이고, 데미안은 이제 막 제자리를 찾은 아이일 뿐이었다.
오블리에는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이게 성수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씀이십니까.”
“당신에게서 썩은 냄새가 나.”
날카로운 데미안의 말에 오블리에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잠깐만.”
데미안의 거침없는 말에 잠자코 있던 그레이스가 끼어들었다.
“신관님께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너…….”
그레이스가 울컥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데미안, 그레이스.”
그때, 엘리가 나지막이 두 사람을 불렀다.
“진정해. 두 사람 모두 너무 흥분한 것 같아.”
“엘리, 나는…….”
데미안은 억울한 얼굴로 엘리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악취가 풍기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내의 체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분명 이 여자에게서 나는 악취였다.
데미안은 이 냄새를 알고 있었다. 세포 하나하나에 박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냄새였다.
엘리도 저와 같은 고통을 겪을까 싶어 막은 것뿐이었다.
입안에 여러 말들이 맴돌았으나, 데미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서러운 마음까지는 참을 수가 없었다. 데미안의 눈가가 서럽게 일그러졌다.
엘리도 알고 있었다. 데미안은 이유 없이 남을 나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런 아이가 저렇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내뿜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블리에는 신관이다.
‘그리고 신전은 황제와 한편이지.’
자칫 제국의 두 기둥이 데미안에게 화살을 겨눌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엘리는 데미안이 밀쳐낸 병에 시선을 두었다.
불투명하고 하얀 액체가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저게 성수가 아니라면 대체 뭐지?’
신관은 왜 제 환부에 저걸 부으려고 했을까.
저 천사 같은 소녀가, 어째서.
“저…….”
그때, 긴장으로 가득 떨리는 목소리가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뜨렸다.
엘리의 팔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던 사내였다.
“모, 모든 잘못은 제게 있다는 걸 압니다. 하, 하지만 저는 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덜덜 떨며 말하던 사내가 엘리를 바라보았다.
“분명 제 딸입니다. 오랫동안 찾아 헤매었던 제 딸이요……!”
그가 처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눈동자에 서러운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거 참…….”
“어, 어쩌죠?”
제리트와 아셀이 난감한 듯 중얼거렸다.
“으, 으흑흑!”
모두가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못하자, 사내는 바닥에 엎드린 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작정 주장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
그때 메이가 냉정히 사내의 말을 잘랐다.
“엘리 님께서 당신의 딸이라는 증거가 있어? 마지막으로 아내를 만난 곳은 어디지? 아내의 이름은 기억해?”
메이의 질문에 사내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즈, 증거는 없습니다. 마, 마지막으로 만난 곳은 워낙 떠돌이 생활을 하다 보니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럼 적어도 부인의 이름은 알겠지?”
“……모릅니다.”
“모른다고?”
사내의 말에 제리트마저 인상을 찌푸렸다.
“아, 아내는 여러 이름을 썼습니다. 제게 진짜 이름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지요. 본인의 마음에 드는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라면서 끝끝내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사내는 스스로 말하고도 서러운 듯 끅끅거렸다.
아셀이 “말도 안 돼” 하고 중얼거렸지만, 엘리는 그의 말이 조금 그럴듯했다.
‘엄마도 본명을 알려 준 사람은 몇 없다고 했으니까.’
뒷골목을 전전하는 부랑자들의 이름은 시시때때로 바뀌는 법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유명한 도둑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수 있다.
“제가 믿음직하지 못해서 그런 거겠죠. 제 곁을 떠난 것도…… 모두 그 때문일 테고…….”
“결국 증거 같은 건 하나도 없다는 뜻이군.”
사내는 다시 울먹였고, 메이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엘리 님.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우선 상처 치료가 먼저입니다.”
“자매님.”
메이가 엘리를 데려가려 할 때, 오블리에가 또렷한 목소리로 그녀를 붙잡았다.
“너무 냉정하게 말씀하시지는 말아 주세요. 함께 확인을 해보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오블리에가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신의 말씀을 전하듯, 성스러운 몸짓이었다.
“자식과 부모는 신께서 맺어준 인연, 신의 대리인 된 자로서 이것을 외면할 수 없군요.”
인사 올리듯, 작게 고개 숙인 오블리에가 엘리와 눈을 마주했다.
“하여, 두 분께서 이어진 피가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해 드리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