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Want To Be Duke’s Adopted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76)
입양된 며느리는 파양을 준비합니다-76화(76/241)
헤론은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을 틈도 없이, 엘리의 앞에 앉았다.
“저를 기다리고 계신 겁니까?”
“네. 다시 오실 줄 알았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엘리 님을 시험한 것도.”
“네, 알고 있었어요.”
엘리가 방긋 웃었다.
헤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어떻게……!
“언제부터 눈치채셨습니까?”
“손녀가 있다고 말씀하실 때부터요.”
그때부터 알았다고?
헤론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자 엘리가 맑은 녹안을 깜빡이며 말했다.
“푸딩을 드실 때 헤론 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이렇게 단걸 좀처럼 접할 기회가 없다고요.”
“이런 건 처음 드셔 보시나요?”
“예. 좀처럼 접할 기회가 없어서요.”
“그런데 치아가 안 좋으신 분께서 사탕을 달라고 말씀할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험하는 자리라 생각하신 거군요.”
그 작은 말도 놓치지 않았다니.
헤론은 놀란 눈으로 엘리를 바라보았다.
엘리는 미소를 유지한 채 속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제 작전이 통한 듯했다.
처음 윈티아 이야기를 꺼냈을 땐, 엘리도 무척이나 당황했다.
클라이더 상단을 누구보다 아끼는 헤론이 왜 살로메 자작과 윈티아의 용서를 구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게 잘못한 사람을 쉽게 용서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싫다고 말하기엔…….
‘너무 건방진 꼬마 같지.’
그래서 엘리는 서명을 했다.
어차피 정답은 없었다.
이 자리는 저를 시험하는 자리였고 답을 만드는 사람은 저였으니까.
그리고 클라이더의 이름을 써넣은 건 옳은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이 정도면 통과인가요?”
엘리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놀라운 통찰력과 어찌 보면 발칙한 질문을 한 아이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공작님 말씀대로군.’
패자는 자신이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다.
애써 자신의 능력을 숨기곤 있지만, 재능은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
누군가는 아이답지 않은 모습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눈앞의 소녀는 상황을 다스리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그렇다면.’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헤론이 정중히 엘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엘리 님을 모시게 된 헤론 후퍼라고 합니다.”
전과는 확연히 다른 인사.
원하는 것을 이끌어 낸 엘리는 인형을 끌어안으며 활짝 웃었다.
“잘 부탁드려요!”
* * *
무사히 테스트에 통과한 나는 그날 이후부터 헤론의 수업을 들었다.
데미안과는 수업을 따로 진행했다.
데미안은 직접 가문을 이어야 할 후계자였으니까 가르칠 내용이 다르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안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가르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내게 기초적인 경제 체계부터 클라이더 상단이 어떤 일을 하는지를 가르쳤다.
더불어 전쟁 전후로 제국 시장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에 따른 귀족의 재산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려주었다.
“지금 같은 계급사회에선 작위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 님. 돈의 가치를 보셔야 합니다. 언젠가 시장이 팽창되어 돈의 가치가 하락한다면, 계급도 사라질 것입니다.”
“정말요?”
“예.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빈부격차는 심해질 것입니다. 가난한 평민들이 많아질수록 귀족들의 자리는 견고해질 테니까요.”
교육의 내용은 내가 정말 안주인 역할만 맡길 원했다면 알려주지 않았을 것들이었다.
놀란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헤론 님. 직원 명단에 여성분들도 계시네요?”
“예. 일하길 원하는 분들이 계셔서 고용을 진행했습니다.”
바로 고용에 성별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제국이 승전을 거둔 후, 귀족들의 재산은 점점 불어났지만 평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빈부 격차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여성들이 작은 일감이라도 얻기 위해 사회로 나왔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서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좋은 곳에 겨우 고용된다고 해도 문제는 그다음이지.’
사람들의 편견을 이기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헤론은 그런 여성들이 클라이더 상단을 찾았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안정성이 보장된다는 증명이니까요.”
전생에서 사회생활을 경험했던 나라고 해도 쉽게 내리기 힘들었을 결정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체계가 잡히지 않았지만,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수업을 들을 때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 직원들이라…….’
어쩌면 이건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나는 수업이 끝난 후에도 곧장 일어나지 않고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자 헤론이 물었다.
“오늘 수업 내용 중 궁금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별건 아닌데요…….”
나는 머쓱한 척 어색하게 웃었다.
“명단에 적힌 사람들을 살펴보니까 대부분 아이가 있는 엄마들이더라고요.”
“아이를 키우는 데엔 많은 돈이 드니까요. 저희도 그 점을 중점적으로 생각해 뽑은 것입니다.”
“음…….”
그의 대답에도 고민하는 기색이 사라지지 않자 헤론이 물었다.
“어떤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개의치 말고 말씀해 주세요.”
“그게요. 사실, 고아원으로 오기 전에 친하게 지냈던 이모가 있었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모도 밖에서 일을 하셨거든요. 그런데 아기가 너무 어려서, 이모가 엄청 고생하셨어요.”
뜬금없는 이야기라 넘길 수 있을 텐데, 헤론은 조용히 내 말을 경청해 주었다.
“특히 아기는 볼일을 자주 봐서 그만큼 기저귀가 수시로 많이 필요했어요.”
이 세계에도 기저귀라는 게 있기는 했다.
솜과 천을 몇 겹이나 덧댄, 빨아 써야 하는 다회용 기저귀와, 비닐과 비슷한 재질로 겉을 감싼 일회용 기저귀.
하지만 천 기저귀는 계속 빨아서 써야 했기 때문에 위생적이지 못했고, 코팅 처리한 일회용 기저귀는 자주 샜다.
편의성과 위생만 따지자면 일회용 기저귀가 더 좋았지만, 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하지만 평민이, 그것도 생활고를 못 이겨 어린아이를 두고 돈을 벌러 나가야 하는 집에 일회용 기저귀 같은 사치품이 있을 리 없었다.
“천 기저귀를 매일매일 빨아야 해서, 이모가 엄청 고생하셨어요. 비 오는 날에는 심지어 잘 마르지도 않아서 냄새도 고약했고.”
“…….”
“음, 그래서 뭔가 고민을 덜어줄 물건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민을 덜어줄 물건이라…….”
헤론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분야를 들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사실 얼마 전에 뤼겔 나무를 봤거든요.”
“뤼겔 나무라면 저희 동부에 서식하는 나무 아닙니까?”
“네. 선대 클라이더 공작님께서 슈에츠 공작님께 선물로 주신 거라고 들었어요.”
나는 신기한 사실을 알아낸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뤼겔 나무껍질은 흡수력이 아주 좋아요! 저번엔, 아…….”
나는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거 말하면 안 된댔는데…….”
“어째서입니까?”
“제리트 님이 비밀로 해달라고 했거든요…….”
“괜찮습니다. 편히 말씀해 주세요.”
헤론은 재촉하지 않고 내 답을 기다렸다.
‘좋아. 제리트의 이름까지 언급했으니 이제 자연스럽게 말하면 돼.’
어디서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듯이 제삼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거다.
나는 제리트와 함께 뤼겔 나무껍질을 이용해 마차의 얼룩을 닦아냈던 일을 말했다.
“그게 신기해서 그림 그릴 때도 써 봤는데, 물감을 흡수한 후에도 표면이 매끄러웠어요. 꼭 물처럼 흐르지 않더라도 충분한 시간만 있으면 나중엔 다 흡수했어요!”
그리고 흡수력이 무척 좋았다는 이야기까지 잊지 않고 덧붙였다.
“흐음…….”
헤론이 주름진 손으로 턱을 쓸었다.
“하지만 종이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와서 다른 종이를 만든다고 해도 미술 용품으로서 그다지 큰 메리트는 없을 겁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잖아요! 나는 어긋난 방향을 붙잡기 위해 재빨리 소리쳤다.
“미술 용품으로 쓰지 않으면 되잖아요!”
“예? 그 말씀은…….”
의아한 얼굴을 하던 헤론이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기저귀…… 흡수가 잘 되는 종이…….”
그러다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엘리 님. 이 생각, 어떤 분께 전해 들으신 겁니까? 제리트 님이 맞으십니까?”
좋아, 그 말을 기다렸다.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눈치 보듯 말했다.
“네……. 절대 말하지 말랬는데…… 역시 잘못한 거죠?”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그저…….”
강하게 부정한 그가 생각하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분을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 * *
하루도 빠짐없이 상회의 물건들을 만드는 살로메가의 제작소는 깊은 밤에도 운영되고 있었다.
짙은 피로만 가득해야 할 제작소에 미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거 들었어? 살로메 자작님의 이야기.”
“겁도 없이 슈에츠 공작님께 맞서다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던데…….”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우, 우리 주인님이 살로메 자작님이시잖아.”
“자작님 목도 날아갔는데 우리라고 대수겠어?”
바로 이런 소문들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영주가 통보도 없이 고위 귀족을 건드렸다. 영지전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또다시 전쟁 나겠네…….”
누군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깊은 침묵이 제작소 안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거나 부모였다.
책임져야 할 가정이 있는 자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바쁜 이 시점에, 영지전이 일어난다면 가족들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짙은 절망이 그들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이봐, 바헨! 바헨 있어?”
그때, 저 멀리서 호출 소리가 들렸다.
바헨이라 불린 사내가 손을 들었다.
“잠깐 일 멈추고 이쪽으로 와. 점장님께서 찾으셔.”
“저, 점장님께서?”
점장과 따로 면담하는 건 절대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잘리는 걸까.’
바헨은 울며 겨자 먹기로 앞으로 나갔다.
바헨과 함께 다른 두 사람의 이름도 함께 호명되었다.
각각 결혼하지 않고 늙은 부모를 모시고 사는 제인, 이제 막 태어난 쌍둥이들의 아버지인 로한이었다.
“하필 불러도 저 세 사람이야.”
“안쓰럽게 됐네.”
다른 직원들이 딱하다는 듯 멀어지는 세 사람을 향해 중얼거렸다.
“왔구먼.”
방 안으로 들어가자, 점장이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반겼다.
“점, 점장님. 무,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바헨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점장은 찬찬히 세 사람을 훑었다.
“모두 귀가 있으니 들리는 소문들은 알고 있겠지. 그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불렀는데…….”
점장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제발 해고만은 아니기를. 아니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때였다.
쿵! 땅을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들렸다. 모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점장의 발치엔 큰 상자가 놓여있었다.
“가져가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주도록 해. 필요하다면 부모님께 가져다 드려도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