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insurance money from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9
009. 우물 밖. (4)
009.
각성.
아포칼립스로 인해 발생한 피해에 대한 보험금을 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그것이 각성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일반 등급 아이템 하나와 희귀 등급 스킬을 얻었다.
보험금을 받기 위한 과정 자체가 남들보다 앞설 수 있는 발판이 되어버린 상황.
이미 난 남들과는 빠른 출발을 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시스템을 열고 아이템과 스킬을 얻은 건 나에게는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었다.
내가 진짜로 기다린 결과물은 아직 그 어떤 것도 선보인 적 없었다.
특히나 용병의 경우 불러내는 순간부터 감출 수도 없기에 애써 나중으로 수령을 미룬 상태였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발톱을 감추고 있는 날 건드렸다.
그저 주목받는 게 싫어서 적당히 꼴값 떠는 걸 무시했을 뿐이다.
괜히 일이 꼬여서 애먼 사람들이 엮일까 미뤄둔 것이다.
그런데 날 죽이려 하는 모습에 더는 기다릴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띠링!
[‘유일 등급 용병 소환권’을 사용합니다.]이런 상황에 내가 선택한 건 ‘유일 등급 용병’을 불러낼 수 있는 소환권.
3가지 보상 중 ‘안전성 보상’이란 이름으로 주어진 그 힘이었다.
왜 안전을 보상한다는 걸까?
거기다 이 보상에는 기한이란 제약까지 걸려있었다.
안전이란 문구와 기간 제한은 오히려 나에게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멈춘 건가?’
내 손이 소환권에 닿고, 메시지가 팝업된 순간.
모든 사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나까지 멈춰버린 상황에 당황하지 않았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정지된 세상은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지만, 이미 각성의 방에 들어갈 때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움직여지지 않는 몸이 답답하기는 할 뿐이지 변화를 기다리는 난 차분하기만 했다.
띠링!
그리고 메시지가 오며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유일 등급 용병’ 소환을 위한 룰렛을 시작합니다.] [‘장서후’님은 소환되는 룰렛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룰렛을 돌리는 방식인가 보네. 엄청나게 쪼개져 있어.’
지름 4미터가 될 법한 거대한 룰렛은 잘게 나뉘어 여러 이름이 적혀있었다.
너무 작은 글자에 읽기 힘들 만큼 많은 이름이 적힌 룰렛.
알 수 없는 이름 중에서 날 도울 용병이 있다는 얘기였다.
시간이 멈춰 몸이 안 움직이는 와중에 룰렛을 돌려야 했다.
방법은 머리로 전달되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마력을 움직였다.
손으로 잡고 돌리는 것이 아닌 마력을 적절히 주입해서 돌리면 되는 간단한 방식.
텅, 터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덩!
‘제발.’
힘차게 돌아가는 룰렛은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적혀있는 이름으로는 전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었고 너무 작게 나누어져 조절도 불가능한 수준.
그저 기도 메타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적어도 수백 개 이상의 이름이 적힌 룰렛은 몇 바퀴를 돌며 소리도 요란하게 울렸다.
멈춰진 시간 속에서 오직 나만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내 심박수도 따라서 빠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시끄럽게 울리던 소리가 서서히 줄어들며 종착지를 보여주었다.
터더더더더더더덩, 터더덩, 터덩.
텅, 텅, 터엉.
‘섰다. ······멜라파?’
마침내 멈춘 룰렛에 적힌 이름.
눈에 마력까지 밀어 넣어서 확인한 이름은 멜라파였다.
날 배려해서 한글로 적혔지만, 전혀 알 수 없는 존재의 이름이었다.
띠링!
[‘유일 등급 용병, 멜라파’가 소환됩니다.] [안전성 보상을 위한 용병으로 관련 임무만 수행합니다.] [제한된 기한만 유지되는 용병으로 3차 침공 종료 후 재계약 여부를 판단합니다.]파아앗.
뭔가 제약이 많은 메시지가 온 후 룰렛이 사라지고 빛이 뿜어졌다.
눈 부신 빛이 빠르게 사그라진 후 그곳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자리했다.
* * *
“······뭐야 저건?”
“그, 글쎄요.”
누구보다 당황한 건 날 죽이겠다고 말한 영광 컴퍼니 놈들이었다.
갑자기 자기들 앞에 커다란 고양이가 나타났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런데 그것도 보통의 고양이가 아니었다.
두 발에는 적갈색 구두를 신고 푸른색 계열의 정장을 입었으며 허리에는 두 자루의 칼을 찬 모습.
그 상태로 일어선 채로 날 바라보는 모습은 모두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기.”
슥.
나도 어찌할지 몰라 말을 걸었는데 돌아오는 건 고양이 앞발.
마치 기다리라는 듯 검지 발가락을 내민 고양이 용병, 멜라파.
그 모습에 모두가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압도되어 기다리게 되어버렸다.
“으으음. 끝. 아우, 언어 패치 깔리는 거 오래도 걸린다. 아무튼, 반가워. 네가 의뢰인이지. 난 용병 기사, 멜라파야.”
언어 패치?
능숙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 말하는 거 자체도 놀랍다.
그렇지만 그 언어 패치 덕분인지 유창한 한국말은 정말 거짓말 같고.
놀란 건 놀란 거고 인사를 받았으니 내가 인사할 차례.
“반갑습니다. 정서후라고 합니다.”
“음. 여기 존대는 이상하네. 우리가 상하 관계도 아니고 편하게 말해. 그게 나도 편해.”
“어, 음. 알았어.”
말을 놓으라는 멜라파의 기세에 안 그럴 수 없었다.
사실 인간도 아닌 고양이에게 말을 높이는 것도 조금 웃기기도 했고.
“계약 기간이 제법 길어서 의뢰인하고 친해질 필요가 있지만, 일단 이 상황부터 정리해야겠네.”
“아무래도 그렇지. 지금 상황이 어떠냐면······.”
“나도 알아. 대충 살피고 왔거든. 딱 내가 필요한 순간에 적절하게 불러냈어.”
마치 손가락 처럼 긴 앞발가락으로 수염을 매만지며 말하는 멜라파는 재미있다는 듯 눈빛을 빛냈다.
그 여유가 넘치다 못해 장난스럽기까지 한 모습에 나도 절로 긴장감이 사그라들었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변하는 분위기를 느낀 건 내 일행도 마찬가지.
점점 퍼지는 묘한 분위기는 결국 날 막아선 영광 컴퍼니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상무님.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하던 대로 해!”
게임 같은 시스템이 생겨나고 스킬과 아이템이 등장했다.
레벨이라는 걸 높이면 육체가 강해지고 마력이라는 신기한 힘도 얻을 수 있다.
이런 기묘한 상황에 고양이 기사 하나 나타난 걸 놀랍게 여겨야 할까?
빠르게 정신을 수습한 영광 컴퍼니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당황은 했을지 몰라도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적인 나에게는 안타까울 정도로 정돈된 모습이었다.
스르릉.
그렇지만 군기가 잡힌 적을 보고 긴장한 건 인간뿐이었다.
허리에 찬 두 자루의 검 중 하나만을 뽑아 든 고양이 기사.
그리 길지 않은 검을 왼 앞발의 손톱으로 쓰윽 문지르며 날 보고 웃는 멜라파는 긴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검으로 인사를 대신할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십여 명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은 멜라파.
아니, 전혀 적의 기세를 신경도 안 쓴다는 모습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여유로운 모습이 고양이 외모와 겹쳐져 기묘한 나른함까지 전해줬다.
픽.
그리고 멜라파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시선을 옮겨 확인하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거짓인지 아니면 꿈이진 알 수 없을 혼돈에 빠져들었다.
“커헉!”
“사, 살려줘! 괴물이야!”
“막아! 개새끼들아 막으라고!”
같은 생명체라는 걸 인정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멜라파.
지구의 그 어떤 생명체와도 비교할 수 없이 잔상도 남기지 않는 고양이 기사의 움직임.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건 남겨진 시신과 피 그리고 비명뿐이었다.
그렇게 채 1분이 지나기 전.
우리를 앞에는 어떤 장애물도 남지 않았다.
* * *
“올라가서 회장을 죽여줘.”
나에게 멜라파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무시하고 생각에 잠긴지 몇 분.
결국, 난 결정을 내렸다.
후환을 남기는 건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이니까.
“패기가 넘치지만, 불가. 그건 내가 받은 임무하고 무관한 일이야. 약관 위반이야.”
“약관 위반이라고?”
“보험 약관 제대로 안 읽었지? 그럴 줄 알았어. 하긴 그 긴 걸 어떤 놈이 다 읽겠어. 이해한다.”
또 약관인가?
정말 집으로 가서 빨리 약관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집에는 있긴 하던가?
“모르는 거 같으니 요약하자면 내가 맡은 임무는 네 안전을 지키는 거야. 3차 침공이 끝날 때까지.”
“안전만?”
“맞아. 아까의 상황은 명백하게 널 위협하는 놈들이었으니 내가 나설 명분이 있었어. 그렇지만 네가 지금 요구한 건 네 안전과는 무관한 요청이야. 그래서 안 돼.”
“하지만 살려두면 언제 날 다시 노릴지 모르잖아.”
“노노. 그런 식의 추측성 위험이나 네가 자초한 위험에는 움직일 수가 없어. 합당하고 직접적인 위험에서 널 지키는 것이 내 임무의 전부이자 내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야.”
단순히 임무가 아니라 굴레라고 했다.
멜라파가 원해도 어떤 제약 때문에 할 수 없다는 의미일까?
‘어쨌든 이용할 수는 없지만, 지켜주기는 한다는 말이네.’
멜라파가 가진 힘이 지금 내 수준에서는 판단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건 확인했다.
그러니 이 고양이 기사를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에 아쉬워하기보다는 안전해졌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다른 문제는 내가 강해지면 모두 해결될 문제니까.
“알겠어. 무리한 요구는 최대한 하지 않을게. 혹시나 내가 선을 벗어나면 언제든지 말해서 멈춰줘.”
“말이 통하니 좋네. 어느 동네 돼지 같은 귀족들하고는 달라.”
멜라파를 이용할 수 없다면 지금 내 힘으로 회장을 포함한 임원들을 노리는 건 힘들다.
남겨진 보상을 쓴다면 확률이 오르겠지만, 그조차도 결국 내가 위험해지는 방향이다.
내가 자초한 위험은 방치한다는 멜라파의 말이 있었으니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니 움직일 방향이 결정됐다.
위가 아닌 아래로 나아가는 것.
원래 우리가 정한 곳으로 갈 시간이었다.
“······야. 이제 설명해야지.”
“나중에 일단 여기부터 벗어나자. 괜히 시간 끌면 더 몰려올 거야.”
눈앞에서 벌어진 인간 학살극을 본 다른 이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나마 설명을 요구하는 이동찬에게 나중을 말하며 움직이기로 했다.
내 뒤에서 따르는 고양이가 영 신경 쓰였지만,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멜라파는 지금과 같이 예상 못 한 위험에만 움직인다고 말했다.
결국, 앞으로의 길은 내 힘으로 뚫어야 하니 집중할 때였다.
“원래 계획대로 움직입니다. 오늘 밤까지 목표했던 동찬이 집까지 가야 하니 서두르겠습니다.”
우리가 잡은 오늘의 목표는 이 건물을 빠져나가 이동찬의 자취방까지 가는 것.
회사 근처에서 혼자 사는 그의 집으로 가서 추가적인 동선과 일정을 잡기로 했다.
쌓아둔 식량이 꽤 많다고 했으니 그것도 겸사겸사 챙기고.
설명하지 않은 새로 합류한 기묘한 동행 때문에 굳었던 일행들은 내 말에 각자 무기를 들었다.
그들의 앞에 선 내가 피바다가 된 곳으로 향했다.
‘집중하자. 이제 실전이야.’
지독한 피비린내와 상하좌우로 나누어진 인간의 시체.
그 한가운데를 지나는 내 멘탈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직접적인 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는 내가 죽인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니 더욱 그랬다.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고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시체를 피해서 걸으니 아직도 온기가 느껴져 소름이 전신에 돋았다.
“우욱. 우애애액!”
뒤에서 들려오는 김선아의 토악질 소리는 다른 이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난 입술에서 피가 나게 꽉 깨물고 그 피바다를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더 아래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끼리릿. 끼힉!”
“캬아아악!”
피 냄새라도 맡은 걸까?
문 앞에는 명품샾 오픈런이라도 하려는 사람들처럼 고블린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얼추 스무 마리는 넘을 거 같은 놈들이 열리는 문에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이럴 거 같더라.’
식인.
고블린이 인간을 먹는 괴물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옥상에서 내려다본 그 모습이 지독하게도 머리에 남았으니까.
그런 괴물인데 이 난장판을 만들고 피 냄새를 풍겼는데 모른다?
그건 너무 쓸데없이 긍정적인 희망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염기 폭발.’
시나리오에 있던 장면이 현실로 찾아왔다.
그러니 당연히 나도 준비하던 걸 하면 된다.
츠즈즈즛, 우이이잉!
쩌────억!
내 손끝에서 염기가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