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insurance money from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98
099. 피처럼 붉은 와인. (3)
099.
부순덕이 진짜로 자신과 타인의 미래를 보는 건지는 내가 알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숨겨온 비밀을 파악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골드를 얻어낸 방법이 보험금인 거까지 파악한 지는 모르지만, 지금 내가 보유한 골드를 알아낸 것만 해도 범상치 않은 능력이었다.
그러한 부순덕이라는 여자가 뱀파이어의 권속이 되었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보르센 남작 옆에 딱 붙어서 훈련 잘 받은 강아지처럼 헤벌쭉한 얼굴로 아양을 떤다.
나이도 적지 않은 아주머니의 그런 모습은 참 보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언제부터 꾸민 거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어떤 시기에 부순덕을 권속으로 만들었는지도 예상도 안 되었다.
그녀의 능력이 본인의 능력인지 아니면, 보르센이라는 뱀파이어의 권속이 되어 얻은 건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2차 침공 시작과 동시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함정은 오래전부터 진행됐을 거다.
왜 나라는 존재에 관심을 가졌는지 모를 가공할 힘을 가진 괴물.
부순덕이라는 인간을 이용해서 날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한 보르센 남작.
그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가 나며 허공에서 날아오는 건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들이었다.
빠르게 날아온 물건들은 나와 보르센 사이에 정갈하게 놓였다.
보르센 남작은 놓인 의자 중 자신에게 가까운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서 앉았다.
퇴폐미를 품은 남자는 다리를 꼬더니 한 손으로 반대편 의자를 가리켰다.
나보고 앉으라는 듯 말이다.
당연히 난 그런 짓거리에 반응해주지 않았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이미 부모님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결했다.
그 과정이 너무도 이상한 점이 많아 다시 되짚어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저 괴물과 어울려줄 이유는 없었다.
이런 내 모습에 피식 웃은 보르센 남작.
창백한 피부의 뱀파이어는 양팔을 가볍게 탁자에 올리고 턱을 괴었다.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자네를 해치울 생각이었다면 이런 귀찮은 일을 꾸미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내가 아니었으면 자네의 감동적인 만남도 없었을 거 아닌가. 그러니 그 보답으로 가볍게 와인이라도 마시면서 얘기하자고.”
딱!
여전한 개소리 이후에 다시금 튕긴 손가락.
이번에는 테이블과 의자 대신 여러 음식과 와인병, 잔이 날아왔다.
허공을 날아서 차려지는 안주와 술은 보는 것만으로도 무슨 영화 같은 모습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신비로운 모습.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알아서 물건들이 날아서 세팅되는 장면은 신기하게만 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이면을 살펴본다면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배력이 무슨.’
이런 일이 가능한 보르센의 능력은 내가 가진 스킬인 염력과는 달랐다.
아니, 어쩌면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마력으로 일부의 힘만 지배하는 것이 아닌 이 공간 자체를 마력으로 지배하여 모든 걸 통제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편하게 앉게나. 시간이라면 충분하지 않나. 어차피 방해될 요소들은 전부 치웠으니까.”
재차 권하는 보르센 남작의 말에 잠시 망설이다가 테이블 반대편에 앉았다.
방금 보인 무력시위가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귀찮은 방법으로 초대했는지 듣고 싶은 마음도 일부 있었다.
“독이나 미약 같은 건 안 넣었으니 편하게 마시라고.”
쪼르르르륵.
‘독은 몰라도 미약은 뭔 개소리야.’
스르륵 날아온 와인이 내 잔에 피처럼 붉은 와인을 채워주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와인의 향은 싸구려 와인만 마셔본 나에게도 놀라울 정도.
자꾸 나도 모르게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와인이 좋아 보여도 저런 말을 믿고 냉큼 마시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
말을 저렇게 해도 진짜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
고작 맛있어 보인다고 마시는 멍청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내 옆에 쓱 끼어드는 고양이 한 마리.
“안 마실 거야?”
“이걸 왜 마셔? 미쳤어?”
“뭐, 그럼 내가 대신 마시고.”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옆에 앉은 멜라파가 내 잔을 빼앗아서 홀짝였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보르센은 다시금 와인을 한잔 따라서 날려 보냈다.
당연하게도 난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적이 준 음식을 먹을 만큼 정신 빠진 놈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와 비교할 수 없이 경험 많은 베테랑 용병인 멜라파는 뭘 하는 걸까?
적이 준 와인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꼴깍꼴깍 잘도 마신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으으으으음. 이거 진짜 좋네. 설마 이 와인 하이엘프의 눈물?”
“호오. 이거 고양이 친구가 보기보다 상당히 식견이 넓군.”
“이야, 진짜라니. 오늘 아주 혓바닥이 호강하는 날이네. 야, 너도 마셔. 이거 진짜 귀한 거야.”
“아직 열 병 정도 있으니 오늘 얘기만 잘 되면 몇 병 선물로 주지.”
“진짜? 그럼 내가 잘 될 수 있게 도와야겠네.”
와인 이름이 하이엘프의 눈물인 건가?
그 말에 흠칫 놀라는 아슈리탄을 보면 보통 물건은 아닌 모양.
멜라파가 멀쩡한 걸 보니 괜히 나도 맛을 보고 싶었다.
그래도 잘 참는 아슈리탄이 있으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돕는다니, 뭘 하자고 할지도 모를 흡혈귀를 앞에 두고 한다는 소리가 이따위?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자네가 저 고양이 친구처럼 식견이 넓었다면 지금 내가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 텐데 아쉽군.”
“와인이라면 우리도 좋은 거 많으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할 말이나 해.”
“어떤 좋은 와인인지 궁금하군. 그래도 일이 먼저니 할 일을 해야 하겠지.”
와인을 무슨 피처럼 마시는 보르센이 와인잔을 살랑살랑 돌리며 입을 열었다.
“자네, 나하고 일 하나 하지.”
어디서 뭘 보고 다니는 뱀파이어일까?
어쩐지 쉽지 않은 하루가 될 거 같았다.
* * *
아포칼립스가 터지고 내가 정한 1차 목표는 같이 출발한 동료들의 부모님을 구하는 것.
그 결과가 사람에 따라서는 달랐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성과로 완수했다.
그런데 그런 성과를 내기 위해 들려야 했던 뱀파이어의 저택이 사실은 함정이었고.
부모님을 가지고 협박하던 함정은 또 다른 함정을 위한 미끼였다.
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리저리 팔려 다닌 상황에 썩 기분이 좋지 않을 수밖에.
“일? 지금 나보고 일을 하자고? 협업 요청이라고 하려고?”
“협업이라면 협업이겠지. 난 이곳에 묶여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내보낼 수 있는 건 몸이고 정신이고 기록이고 전부 애송이인 쓰레기뿐이지.”
사실 일을 하나 하자는 보르센의 말에 빈정거린 거였다.
그런데 저 녀석은 진심인지 진지하게 대답을 했다.
그리고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뱀파이어 남작의 사정이 바로 이해가 되긴 했다.
‘일반 뱀파이어들이 죄다 병신이긴 하지.’
스펙만 좋은 멍청이들이라고 보면 딱 맞는 것이 보통의 뱀파이어들.
싸우는 거나 행동하는 걸 보면 그냥 갑자기 생긴 힘에 휘둘리고 오만하기만 하다.
그래도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팩트이나.
일정 수준 이상의 적에게는 그저 아주 유용한 경험치일 뿐이다.
나 같은 사람 말이다.
“그럼 용병이라도 되라고?”
“용병이라. 용병이라면 용병이겠지.”
“말을 똑바로 좀 해. 뭘 어쩌라고.”
2차 침공 축제가 시작하기 전에는 아마 밖으로 나갈 수 없을 보르센.
녀석이 원하는 건 대신 밖의 일을 처리해줄 해결사일 거다.
그런데 협업도 아니고 용병도 아니란다.
“내가 원하는 건 말이야. 이 아이 같은 착함이지.”
“······그러면 그렇지. 괜히 말 길게 하고 지랄이야.”
협업이나 용병이 아니고 녀석이 원하는 건 부순덕 같은 마음가짐이었다.
결국, 말을 돌려 했을 뿐 권속이 되라는 말.
이성적으로 대화를 나누기에 기대했던 약간의 가능성이 지워졌다.
권속이라는 말이 굉장히 있어 보이기는 하나 결국, 누군가에게 묶인다는 의미였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노예가 되라는 말.
보르센이 한 제안은 딱히 내 예상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이 아이의 경우 미래를 본다는 알량한 힘으로 날 살폈지. 그러다 오히려 내 눈에 들어버리면서 나의 것이 되었다.”
“아줌마가 재수가 없었네.”
왜 부순덕이 저 꼴이 됐나 했는데 이유를 알았다.
아마도 자신을 살피는 걸 막거나 역으로 카운터 칠 수 있는 힘을 가진 듯 보이는 보르센 남작.
그걸 모르고 스킬을 남발하다가 임자를 만나 우리 모두 이 지랄이 난 거였다.
그래도 그걸 마냥 부순덕 탓을 할 수는 없었다.
미리 알 수 없던 위험이었고, 스킬을 쓰지 않을 방도는 없었을 거다.
그저 재수가 없게 걸려버린 것뿐이다.
“재수가 좋은 것이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스트레스에서 해방된 영원한 행복을 얻었으니 말이다.”
“그런 싸구려 행복 필요 없으니 딴 데 가서 알아보세요.”
누군가의 개가 되어 바보의 행복으로 살 생각은 죽는 것보다 없었다.
당연하게도 부순덕도 자의로 권속이란 이름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 그럴 거 같았다. 보통의 인간, 특히나 자네와 같이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인간은 쉽사리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없지. 대신 아주 작은 제약으로 시작할 수는 있는 법이네.”
“관심 없다니까 그러네.”
“아주 작은 것이야. 예를 들면 하루 한 번 나에게 안부를 묻는 정도만 해도 우리의 인연은 깊어지는 거지. 그걸 위한 계약은 자네에게도 큰 위협은 아니야.”
뭔 모닝콜 서비스도 아니고 하루 한 번 안부를 물으라는 건지.
뱀파이어가 하는 말이 맞는지 황당했다.
“그 작은 일만 해주면 자네는 당장 이곳을 떠나도 되는 것이네. 자네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말이야. 물론 그 전에 서로가 합의한 협업 제안서를 만들기는 해야겠지만.”
“그러니까 일은 공정하게 일대로 하고 그냥 나하고 연락이나 하고 지내자?”
“그렇게 보면 되는 거야. 난 굳이 이곳에서 자네들을 죽여서 얻을 수 있는 게 없어. 그저 저 새로운 세상이 어떨지 몹시 궁금할 뿐이야. 자네가 그 길잡이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거지.”
보르센은 말을 마치고 와인을 들어서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꼴깍하고 넘어가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전해졌다.
아마도 퇴폐미와 어우러지며 묘한 분위기가 잡혀서 그럴 거다.
‘솔직히 이해 못 할 거까지는 아니지. 왠지 더러운 기분을 조금만 참으면······ 확실히 이득이야.’
침공하기 위해 왔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이 묶인 상태.
대신 밖에서 움직여줄 뱀파이어들은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머저리들.
그래서 세상을 대신 돌아다니며 알려줄 사람을 초대했다.
일견 말이 아주 안 되지는 않았다.
거기다 내 앞에 있는 무서운 괴물은 얼마나 거대한 힘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
싸우거나 도망쳐서 이 저택을 빠져나가는 건 아마도 적지 않은 희생이 따르거나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고작 하루 한 번 연락이라면 사실상 너무도 남는 장사였다.
“진짜 하루 한 번만 연락하면 된다고?”
“시스템 제안서도 얼마든지 써줄 수 있다. 대신 연락을 위해서 작은 영혼의 구속이 필요할 뿐이다.”
영혼의 구속, 그러니까 권속으로 만들되 그 강도를 매우 약하게 해서 하루 한 번 정도 연락만 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울지, 약간의 손해를 보고 을의 입장이 될지.
보르센은 지금 그걸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막 나쁜 제안은 아니야.”
“나쁘지 않다고?”
“그래. 권속이라고 해서 말이 거창하긴 한데 그냥 저주 정도로 봐도 돼. 너한테 강제력도 없는 그런 귀찮은 정도가 전부인.”
와인에 넘어간 건 아닐까?
멜라파의 말은 나에게 꽤 충격적이었다.
앞서서 말릴 줄 알았던 고양이 기사가 괜찮다니, 자연스럽게 고개를 아슈리탄에게 돌아갔다.
“어려운 문제다. 싸운다면 분명 적지 않은 피해를 볼 거다.”
내가 약간의 피해를 보고 넘어갈지 아니면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울지.
어찌 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 같은 선택.
그렇기에 날 바라보는 뱀파이어의 입꼬리는 재수 없게 올라간 거였다.
‘······어쩔 수 없는 건가?’
감수하면 될 피해 때문에 내 가족과 친구들, 동료를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결국, 대표라는 자리에 있고 내가 선택한 이곳에서 내가 책임져야 할 문제였다.
그래서 선택을 하려고 했다.
《서후, 안 돼! 속으면 안 돼!》
날카롭게 내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목소리만 없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