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118)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118화
극동으로 가는 길은 이전에 시베리아 철도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갔을 때와는 달리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당시 거의 전 세계를 일주하다시피 온갖 곳을 들르며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던 여정과 지금의 러시아를 관통하는 강들을 따라가는 여정을 비교하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오쓰 사건 이후 이 몸에 빙의한 걸 생각했을 때 당시의 세계 일주는 지금의 내가 아닌 니콜라이 2세가 경험한 거나 다름이 없었지만.
이런 경우의 기억들은 직접 몸으로 경험했다는 느낌보다는 실감 나는 VR 체험을 했다는 느낌이 강했다.
‘뭐,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번 여정에서도 아예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
대표적으로는 본래 목적지로 가는 길에서 조금 벗어나 볼가강 유역에 있는 사마라 지역에 들른 일이 그나마 이번 여정에서 발생한 이벤트라고 할 수 있었다.
러시아 남부 쪽, 그것도 사마라까지 내려가는 데는 꽤나 시간이 걸렸지만, 내가 그곳에 들른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이 나라, 이곳에서 살아가는 신민들에게 책임감을 느끼게 해준 인물인 이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것 하나만으로 그를 만나러 간다고 하지는 않았다.
이반이 살고 있는 지역이 최근 실시된 농업 개혁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수확량 증가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이었으니까.
국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소위 ‘애국 지역’을 격려한다는 명목으로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감회가 새로웠다.
과거 기공식이 끝난 후 다가오는 기근을 막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던 중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중앙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농부들의 진술을 확보하려고 들렀던 장소.
그곳이야말로 내가 한국인이 아닌 러시아의 황태자로서의 자아를 받아들인 나에게는 뜻깊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당시 다 쓰러져 가는 집들과 녹색 물결이 넘실거려야 할 밭은 그저 메마른 먼지만 날리고 있었으며, 20대도 40대처럼 보이는 농민들만 가득했던 그 마을의 모습이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어느 정도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육체적 노동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농사일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인 이상, 여전히 액면가가 본래 나이보다 많아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당시에는 닳고 부스러진 희망이라는 감정의 파편 하나도 찾아볼 수 없던 그들의 눈에 생기가 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니까.
마을 주민들의 환대 사이로 보이는 이반 또한 여전히 얼굴은 중년의 그것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청년의 반짝임을 되찾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가지 의문이 있다면 그의 옆에 전형적인 범생이로 보이는 4년 전에는 없던 청년과 어지간한 장정과 덩치가 비슷한 여장부가 함께 서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반의 말로는 지난 농업 개혁 정책을 펼치며 농업 학교를 졸업한 이들을 각지로 파견 보냈을 당시, 이 마을에 도착해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해 정착했다고 하는데, 그 청년의 눈빛에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일이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배 안에서 나는 이반과 나누었던 대화를 회상했다.
저번 방문과는 다르게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춰 나를 기다리던 그를 손수 일으켜 준 뒤 이반의 집으로 가서 나누었던 대화였다.
지난번에 왔을 때 말했던 언젠가는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킨 셈이기도 했다.
첫 방문과 같은 황태자로서 돌아온 게 아닌 차르로서 돌아온 것이기는 했지만.
그와의 대화는 단순히 그동안 서로 간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4년 만의 만남이긴 했지만, 그와 가끔씩 편지로서 말을 주고받고는 했었으니까. 지난 시절 레닌을 조기에 체포한 것도 이반의 편지가 계기였다.
따라서 그와의 대화는 신변잡기가 주된 내용이 아닌 현장에서 이반이 직접 몸으로 경험하면서 느낀 농업 개혁의 진행 상황-실태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가 주제였다.
-그래서, 자네가 느끼기에 농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개혁안을 통해 얻은 것 중 가장 만족스러운 것과 제일 불만족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폐하의 곁에 있을 수많은 유능한 관료들에 비하면 제 능력이 미비하기 짝이 없지만, 저에게 하명하신 만큼 한번 능력껏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우선 개혁 초기 폐하께서 단호한 태도로 미르의 장로들을 비롯한 개혁 반대 세력을 쓸어내신 것은 참으로 옳으신 선택이셨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들의 반발과 테러로 인해 피해들이 발생했다고는 하나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폐하께서 개혁을 발표하신 지 2년가량이 지난 지금도 진행속도가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었을 테니까요.
이반의 대답 초반은 내가 행한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주된 내용이었다.
개혁 진행 과정에서의 반대파에 대한 단호하고 빠른 결단, 그를 통해 반대파가 결집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기에 와해시킴으로써 반동적인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반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들어갈 투입 비용을 최소화했다는 것이 주였으니까.
거기에 당장 오늘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던 농민들에게 다음 달, 다음 계절, 다음 해라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끔 해준 것에 대해서도 이반은 내게 감사를 표했다.
그 이후로는 첫 대면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신랄한 말솜씨를 여실히 드러냈지만.
-다만 폐하께서 농지를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이전에 폐하의 조부인 알렉산드르 2세께서 농노를 해방하며 그들에게 부과한 토지에 대한 취득 비용에 더해 이번에 미르를 해체하며 공동으로 경작하던 밭을 나눠 가지는 데 필요한 토지세를 이중으로 부과하신 것은 여전히 다음 해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농민들에게 있어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다행히 저희 마을에서는 농업 학교에서 파견 나온 학생이 빠른 속도로 마을 주민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제 여동생과 결혼해-여기서 그의 눈동자에 죄책감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정착까지 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도시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파견 인원과 그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가 쌓이지 않은 농민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도 감히 폐하께 조언을 드리건대 관련 대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한 내용 중 먼저 언급된 농민들이 토지를 취득하는 과정에서의 이중과세는 개혁을 시행하기에 앞서 논쟁의 대상이기도 했다.
농노 해방령이 할아버지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이기는 했지만, 그 이면에는 농노에서 농민으로 호칭만 바꾼 채 땅 주인에게 빚이라는 목줄이 잡혀 살아가는 소작농들을 양성했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 국가도 아닌 러시아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택할 수도 없었거니와 한순간에 모든 부채를 탕감해 준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농민들이 자신의 땅을 완전한 의미의 본인 소유로 만들기 위해 지불해 나가는 상납금이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꽤 컸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현재 투자 중인 사업이나 발전하고 있는 러시아의 산업이 제 궤도에 오르면 계단식으로 감면을 해줄 예정이기는 했으나 당장 이중과세라는 짐을 짊어져야 하는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와닿지 않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 외에도 이반 본인이 느낀 점들을 내게 말하고 나는 그것들을 경청하는 시간은 상당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아무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능한 관료들과 관련 정책들을 만들고 다듬어나간다고 할지라도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마라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
경호나 의전상의 문제로 그의 집에서 머무르는 것은 할 수 없었지만, 저녁 식사까지는 함께할 수 있었다.
차르에게 저녁을 대접한다는 사실에 이반의 여동생이 재료를 손질하다가 본인의 손을 손질해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되기는 했었지만, 다행히 저녁은 무사히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금 블라디보스토크로의 여정을 하기 위해 떠나는 나를 향해 이반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은 여전히 내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지난번 폐하께서 방문을 하셨을 당시 저는 솔직히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기대나 희망이라는 감정을 품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배신과 좌절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것 아십니까? 세상에는 희망을 가지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고 저에게 닥쳐오는 것들을 받아들이며 순응하니 차라리 사는 게 편하더군요. 하지만 폐하가 지금까지 보여주신 모습은 저 같은 사람들이 다시금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로서는 공산혁명을 예방하고 다가오는 시대의 폭풍 한복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행했던 일들에 대해 그런 말을 듣자 조금은 낯이 간지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지금까지 정책을 시행하는 데 있어 신민들의 삶의 질이 더 나아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적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는 나 스스로의 그리고 내 가족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더 컸으니까.
그래서였을까, 그의 마지막 말에 나는 별다른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폐하, 이대로 가면 내일 아침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만 휴식을 취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아, 그런가? 알았네. 알려줘서 고맙군.”
이런 내 상념은 내일 있을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는 보좌관의 말에 의해 끊겼지만, 잠자리에 누운 이후로도 나는 이반의 마지막 말을 곱씹다가 잠이 들었다.
* * *
“제가 준비한 환영 인사는 어떠셨는지요, 폐하.”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종무원장.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말씀을 낮추시지요. 저는 이제 이름만 종무원장일 뿐 한낱 지방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환영한다는 의미의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는 군악대와 우리를 향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꽃을 던지는 인파들이었다.
비록 3월 말이 되어간다고는 하나 기후상 꽃을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이런 식으로 준비한 것을 보면 대도시도 아닌 블라디보스토크가 나의 방문에 대해 얼마나 준비를 많이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긴 대기업 총수도 아닌 이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의 방문이니 어느 정도 당연한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가지 독특한 점은 군악대의 일원 중 두어 명이 동양인이라는 것이었다.
시청으로 오는 와중에도 길거리에 나와 있는 인파 중 조선에서 온 듯한 동양인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내 생각보다는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도시에 조선인들이 깊게 녹아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것 중 하나이기도 했고, 다행히 지난 베조브라조프 일당의 돌출행동이 블라디보스토크의 분위기를 외국인을 배척하고 슬라브 민족만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민족주의 성향으로 바꾸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알겠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시베리아 유형지를 돌아다니며 설교를 하던 당시 제자를 한 명 들였다고 들었네만,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 이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그 누구보다도 귀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포베도노스체프가 그냥 평민도 아닌 유형지에 있던 죄수를 자신의 제자로 들였다는 말을 들었을 땐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놀랍게 느껴졌다.
그런 만큼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의 태도를 바꿀 수 있었는지도 궁금하기도 했고.
그런데 종무원장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내 예상 밖의 것이었다.
“제 부족한 제자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지금 캄차카 지방관인 베조브라조프와 함께 있습니다.”
아니, 여기서 베조브라조프가 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