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120)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120화
종무원장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장소에 마련된 단상을 보자 참 오랜만에 민중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마지막으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연설을 한 게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하네.’
아마 황태자 시절 장관 회의에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말한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의 연설도 엄밀히 말하면 민중들이라기보다는 관료와 사회 지도층에게만 들을 수 있었던 상황이라는 걸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연설을 한 지 오래되긴 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황태자 시절에 연설을 하면 했지 차르에 오른 이후로는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행사를 이전보다 하는 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자리는 그동안 내 연설 실력이 녹이 슬었는지 아니면 아직도 괜찮은지 판단할 수 있는 시험대라고도 볼 수 있었다.
과거 동일한 장소에서 연설을 했을 때는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는데 그때보다 좋은 반응을 받지 못한다면 4년이라는 세월 동안 퇴화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신기하군요. 이런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뭐가 말입니까?”
“폐하께서 어떤 공식 행사를 앞두고 긴장하시는 모습을 제 눈으로 또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폐하가 극동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하시기 이전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군요. 아까의 제 말은 취소하도록 하겠습니다. 눈치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에게 과거의 어투로 말씀하시기까지 하니까요.”
이런. 머리로 느끼는 것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긴장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나와 인연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종무원장에게 여지없이 간파당한 모양이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시지요.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이들은 모두 폐하를 열렬히 존경하며 사랑하는 러시아의 신민들이니까요.”
“크흠, 고맙군요, 아니, 고맙군, 종무원장.”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스승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겠냐는 듯 행동하는 종무원장을 보고 있자니 입맛이 썼다.
이렇게 된 이상 멋진 모습으로 만회한 뒤 당당하게 다시금 차르로서의 모습을 보여줘야겠군.
“……이시자 러시아 제국의 차르이신 니콜라이 2세 폐하께서 그대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이곳에 와 계시다. 모두 영광으로 알고 경건한 자세로 있도록.”
기념행사의 식들이 진행되고 이제 내가 연설을 할 차례가 다가왔다.
나조차도 외우지 못한 작위들의 향연을 흘려들은 뒤 이곳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그 와중에 종무원장은 아빠 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고 보라지- 단상으로 다가가는 일은 여전히 익숙하지 못했다.
이는 단순히 연설을 오랜만에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마 매달 이런 자리를 마련했더라도 똑같았겠지.
그래도 이미 숙달해 버린 감정을 숨기고 엄숙한 표정을 짓는 기술을 활용하며 단상 위에 서자 오늘 여기에 모인 이들의 면면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절벽에 구멍을 뚫고 바위를 다듬는 와중에 다쳤는지 왼손에 붕대를 감은 이.
기차역이나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신발을 닦아주는지 콧등에 검댕을 뭍인 채로 서 있는 꼬마.
극동 지역에서 사업을 하는 모양인지 여기 모인 대다수의 사람보다는 훨씬 잘 차려입은 채로 외눈 안경을 치켜올리고 있는 신사.
그리고 4년 전 황태자 시절 연설했을 때와는 달리 곳곳에 보이는 상투를 틀거나 러시아식 복장이라기엔 어딘가 특이한 옷을 입고 있는 조선인들.
이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여기 모인 이들의 인종적 구성비율 또한 4년이라는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 만에 달라져 있었으니까.
“신민들이여.”
아무래도 무난하게 시작을 하는 게 낫겠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준비해 놓았던 말들은 많지만, 우선 종이 위에 글로 쓰인 내용을 말하기에 앞서 그대들을 보자마자 내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먼저 하고 싶구나. 고맙다. 지금은 이 한 마디를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다. 정말 고맙다. 그대들의 희생과 헌신이 아니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이런 자리는 마련되기까지 아직도 한참의 시간이 남아 있었겠지. 러시아 제국의 동과 서를 잇는다.
이 거대하기 짝이 없는 사업의 시작은 나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 시절부터 시작이 되었다. 비록 처음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했지만, 4년 전 아버지가 나를 이곳에 보낸 이후로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한번 정말 고맙다.”
며칠 내내 손질하고 검토한 연설문에 적혀있는 글에 비하면 투박하다고도 할 수 있는 문장들이었지만, 이 말에 담겨 있는 내 감정만은 진실이었다.
아무리 내가 예산이나 인력을 지원하고 원 역사에서 일어났던 공사 과정의 잘못된 선택들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들이 자발적으로 열심히 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속도로의 건설은 불가능했을 테니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몇몇은 과거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했던 말들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그대들을 결단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버리지 않겠노라고 했던 약속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날 했던 맹세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물자를 운송하고 인력을 보냈으며 심지어 나의 측근 중의 측근인 종무원장을 여기 블라디보스토크뿐만 아니라 극동 연해주 지역을 총괄하는 자리에 앉히면서까지 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종무원장이 극동에서 벌어지고 있던 부정부패를 적발할지도 몰랐으며 심복을 이곳으로 보낸 게 아니라 숙청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나비효과 덕분이기는 하지만, 보통 안에 숨겨져 있는 추악하거나 별 게 아닌 진실보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사람들은 현혹되기 쉬웠다.
내 말을 들은 군중들 가운데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말을 멈춘 나는 힐끔 종무원장을 쳐다보았지만, 그 또한 쓴웃음을 지은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입꼬리가 실룩이는 것은 피할 수 없었지만, 잠시 고개를 숙여 숨을 고른 뒤 다시금 근엄한 표정을 지은 후 나는 연설을 이어나갔다.
“물론 내가 그대들에게 약속을 지켰다고 말하는 것은 자랑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본인이 내뱉은 말을 지킨 것보다 여기 모여 있는 이들이 나에게, 아니 러시아 제국에게 해준 것이 월등히 크기 때문이다. 미세한 빛에 의존해 암흑 속을 나아가는 듯하던 나에게 그대들과 같은 신민들은 어둠을 몰아내는 달과도 같은 존재이다. 우리가 함께 전진해야 하는 길을 비추어주는 길잡이와도 같은 신민들을 가지고 있는 나는 얼마나 복 받은 황제란 말인가.”
여기까지 말한 뒤 나는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가볍게 단상을 내려다보았다.
하나, 둘 셋.
“폐하! 울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진정으로 저희들의 어버이이시며 목자이십니다. 눈물을 거두어주십시오!”
“맞습니다! 저희야말로 폐하를 섬길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부디 슬퍼하지 말아주십시오!”
좋아, 좋아.
나는 가벼운 연기로 군중들의 반응을 이끌어낸 것에 만족감을 느끼며 다시금 연설을 시작했다.
목소리가 가볍게 떨리는 듯한 연출은 잊지 않고서.
“고맙다. 오늘 이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대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것뿐이구나. 지난 세월을 살아오며 나의 어휘력이 모자라다고 느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으나 그대들과 같은 충직한 신민들에게 러시아어 아니 그 어떠한 언어로도 마땅한 수준의 찬사를 보낼 수 없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우리 러시아의 미래는 이곳 극동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지금 수행하고 있는 과업이 완료되는 날 당당하게 역사서에 기록될 것이다. 먼 훗날 가족들과 난롯가에 모여 앉아 있을 때 손자가 ‘할아버지는 러시아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나요?’라는 질문을 던질 때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할애비는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지 않았단다. 너의 할아버지는 저 멀리 극동에서 손발이 불어 터져가며 러시아 제국의 펄떡펄떡 뛰고 있는 동맥을 건설했단다’라고 말이다.”
이후로도 애국심과 자존감을 충족시켜주는 내용의 연설이 이어졌고 다행히 군중들은 폭발적인 반응들을 보여주었다.
원래부터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특성에 더해 지난 기근 때도 보여주었던 모습들이 그들의 반응을 좋게하는 데 일조한 것 같았다.
연설을 끝마치고 자리로 내려와 앉는 내게 종무원장이 몸을 기울여 속삭인 말은 어느 정도 뼈가 있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방금 한 말을 다시금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 지금으로써는 연설을 시작하시기에 앞서 보여주신 모습 또한 연기가 아니었나 싶군요. 그리도 이 노구를 놀리고 싶으셨습니까.”
아니, 연설에 앞서 보여주었던 긴장한 모습은 연기가 아니었는데…….
이런 가벼운 해프닝이 있었던 행사가 끝난 이후로도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이틀 정도를 더 머물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조선이나 일본과 관련된 보고들을 받기는 했으나 시간적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반면 여기서는 거기보다는 빠르게 정보들을 파악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었으니까.
그중에서도 조선과 관련된 정보를 보고받은 나는 당분간은 현상유지를 해도 되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한양뿐만 아니라 조선 각지에 위치한 광산들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들어간 국영회사의 경비원으로 탈바꿈한 러시아군들이 한반도를 장악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고종 또한 속으로는 러시아나 다른 국가로 근무지를 바꾸고 싶어하지만, 겉으로는 별다른 티를 내지 않는 데 성공하고 있는 베베르에게 구워 삶아지고 있는 형국이었으니까.
특히 여전히 조선계 러시아군을 자신이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고 여기고 있다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당분간은 착각 속에 있는 꿈나라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게 낫겠지.
아직은 조선 왕가에 대해 충성심을 바치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인 조선의 상황상 고종을 쳐내는 것은 시기상조라 여겨졌다.
다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조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똥볼차기를 언제까지 조선의 민중들이 참아줄지는 미지수였지만.
이외에 일본에서 날아온 교토 협약으로 보내지고 있는 배상금에 대해 자비를 보여달라는 의사를 정중한 어조로 거절하는 등의 추가 업무를 마치고 다시금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자 어느새 시간은 4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달이 바뀌자마자 나를 반겨준 것은 또 다른 일거리였다. 이번 문제는 지금까지 내가 행한 개혁의 부작용으로 인해 발생한 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재벌가들에 집중된 지원으로 인해 각 도시에 있던 수공업자들이 말라 죽어가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폐하.”
전형적으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나라들에서 발생하는 문제였다.
우선 다른 나라의 기업들과 비교해서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기업의 덩치를 키우는 게 먼저였기에 특정 기업들에게 지원과 투자가 집중되고 있을 때 소외된 중소기업체나 지금 이 상황에서는 수공업자들과 같은 이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까.
내게 관련 사항을 보고한 비테 또한 이는 필연적인 일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러시아 산업의 성장을 우선시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그와는 입장이 조금 달랐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인민주의자들이 잠잠하다고는 하지만, 추방된 이들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외국으로 나간 이들이 언제고 다시 입국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만이 누적되는 사회 계층이 생긴다면 그들이 다시금 뿌리를 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