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125)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125화
이번 프로젝트와 관련해 함께 진행되던 차후 각 공방들이 개별적으로 외국과의 계약을 맺어 중구난방식으로 수출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한 포석도 차츰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공방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상행 행위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은 처음부터 나오지 않았다.
지금의 러시아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바탕으로 산업화 정책을 시행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 판매 루트를 개척하는 것을 제한해 무역 총액을 낮추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지만, 그것보다는 공방마다 판이하게 다른 상품의 질적 수준의 균일화와 품질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우리의 장인들이 만들어낸 수공예품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할지라도 본격적으로 수출을 했을 시 상품들의 품질이 천차만별에 어떤 것은 공장제만도 못하다면 러시아의 수공예품을 찾는 열풍은 그 현상이 일어난 속도 만큼이나 급속도로 사그라들게 분명하오. 사람들은 처음 본 것에 열광하는 만큼 그것에 익숙해지는 속도도 빠르니까.”
거기에 내가 회의에서 한 말은 공방별로 수출을 하는 것을 오히려 국가에서 나서서 보조금이나 무역 루트를 개척해 주는 식으로 장려하자는 의견을 가진 이들이 본인들의 생각을 포기하게 되는 결정타였다.
거기에 내가 이런 식으로 공방들을 중앙에서 통제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러시아 내에 존재하는 재벌가들에게도 국책사업이나 군납 등과 같은 계약으로 목줄을 잡을 수 있는 장치를 준비한 만큼 수공업자들에게도 내가 간편하게 제어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지금에야 국내에 남아 있는 인민주의자들 세력이 미미해 별로 티가 나지 않고 있지만, 머지않아 다시 러시아로 돌아올 것으로 생각되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수공업계는 그들이 침투하기에 좋은 토양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인민주의자들이 국외로 ‘수출’되는 것을 유도하는 정책을 시행하기 전,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 치세에서 외국으로 망명 혹은 추방당했던 이들은 러시아로 돌아올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니까.
‘대표적으로는 레닌의 사상적 스승이기도 했던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와 같은 이들은 내가 행한 정책으로 인해 외국으로 나온 이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구체제의 개가 된 변절자라며 비판하고 있다고 하니 인민주의 세력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수공업자들을 비슷한 분야끼리 묶어 국가에서 통제하는 조합으로 만드는 것은 경제적인 면과 국정을 운영하는 면에서 모두 이득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협동조합 건에 대해서는 우리 재무부에서 맡도록 하겠습니다. 내무장관님 동의하십니까?”
“끄으응, 동의하겠소.”
내가 인상 깊게 봤던 것은 이번 일에 대해서도 서로 자신의 관할이라며 기세 싸움을 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재무부와 내무부 간에 별다른 충돌 없이-못마땅하다는 듯 신음 소리를 내긴 했지만-재무부에서 맡는 것에 동의했다는 점이었다.
아마 지난번 공장 관련 감독 권한과 관련된 사항에서 재무부가 양보를 한 걸 고려해서 내려진 결정인 모양이었다.
사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점은 항상 나에게 인력 부족을 호소하는 재무부가 이번 일도 자신들이 맡겠다고 나선 거겠지.
자신이 소속된 부서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역으로 확대하는 것을 거부하는 부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말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한 장교의 말마따나 재무부도 자신들이 혹사에 시달릴지언정 본인들의 권한이 작아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미 재무부 구성원들에게 배정된 업무의 양이 최대치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기에 회의가 끝난 후 비테를 불러 넌지시 가능하겠냐고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번 업무는 재무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하는 식으로 진행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큰 틀을 잡은 뒤 조합장이나 조합 내의 핵심 요직에만 정부의 입김이 닿은 인물들을 임명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것이기에 충분히 가능합니다. 거기에 지난번에 설립한 내무부 소속의 신설 헌병대들의 도움 또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대화 말미에 그가 남긴 ‘다만 이번 분기에 폐하께서 약속하셨던 인력 확충을 해주신다면 훨씬 편하겠지요’라는 말은 비테가 여전히 나와 나누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하긴 그의 투정은 둘째로 치더라도 러시아 제국의 행정인력은 지나칠 정도로 적었었다.
그동안의 관료 사회는 하나의 또 다른 귀족사회나 다름없었으며 인구당 배정된 경찰 인력이나 행정인력은 다른 서유럽 국가에 비하면 이게 과연 국가로서 기능이 가능하냐고 물을 정도로 적었으니까.
거기에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높기 그지없는 인구 상승률은 앞서 설명한 적은 행정인력과 맞물려 절찬리에 행정부에 소속된 이들의 과로를 유발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1,000명당 인구 상승률이 20대 초반을 찍고 독일이 30명대 수준을 유지하고 있을 때 러시아는 홀로 50명대를 자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가구당 인원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던 미르의 방식에 기인하고 있었다.
자식이 많을수록 조금이나마 더 땅을 분배받을 수 있는 데다 러시아의 높은 영아사망률은 농민들이 자식들을 많이 낳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1897년 러시아 제국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인구조사에서, 의사이자 저명한 문학가인 체호프가 관련 작업을 돕는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조금밖에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서도 신생아 10명이 태어나면 1년이 지나기도 전에 6명이 사망한다는 것을 알고 경악했을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원 역사와 달리 높은 영아 사망률의 원인이었던 오염된 식수원이나 기근으로 인한 식량 부족 등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개선해 나가고 있기에 60%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러시아의 농촌은 부족한 것이 많았다.
이런 장애물들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인구 상승률은 여전히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관료를 확충하고 인원 수급에 힘을 쏟아도 관료 사회에 만연한 과로를 줄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최근에는 관료 사회에서 커피를 일컬어 재무부의 눈물, 내무부의 땀 그리고 폐하의 채찍이라고 부른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이니 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할 당시, 습지대였던 땅을 도시로 바꾸는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농노들로 인해 ‘사람 뼈 위에 건설된 도시’라는 이명과 함께 완공된 이후, 개혁정치로 고생한 사람들에게 ‘모든 책임은 표트르에게 있다’라는 말이 유행했다는 걸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나 또한 관료 사회의 불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전보다 중요도가 떨어지거나 맡은 일이 다른 부서에 비해 적은 부서의 인원을 과부하가 걸리고 있는 부서로 파견을 보내거나 봉급을 올려주는 등의 정책을 펼쳤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조만간 각 대학에서 졸업하는 인원들로 부족한 행정인력을 수급할 수 있을 테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군.’
아마 비테 또한 나와 지난번에 한 약속이 다가오는 졸업시즌에 이루어질 것을 고려하고 이번 일을 맡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거겠지.
현시점에서 최우선으로 인원을 분배받을 부서는 바로 재무부였으니까.
이러한 국내 문제만 하더라도 내 머리를 아프게 하기에는 충분했지만, 최근 들어서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것은 외국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아니 지금 시점에서는 대공이 아니던가?’
바로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라 불리는 사라예보에서 자신의 아내와 함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던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손에 의해 사망한 황태자가 요즘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현재 시점인 1895년에는 현재 오-헝 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후계자가 페르디난트가 아닌 그의 아버지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었지만,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그는 다음 해인 1896년 본인의 습관으로 인한 위장병으로 사망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끓이는 등의 소독도 없이 성스러운 기운이 서려 있는 물이라는 이유로 매일 성지에서 떠온 물을 마신 행위의 대가였다.
내가 니콜라이가 된 이후 한 일들로 인해 세계 역사가 바뀌었다는 것은 알고 있는 데다, 원래 알고 있던 것처럼 역사의 흐름이 흘러가지 않으리라는 점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루트비히가 매일 성지에서 나온 물을 마신다는 행동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일은 없었으니까.
사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요제프 1세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르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러시아만큼이나 복잡한 민족구성을 가진 오-헝 제국의 상황을 꿰뚫어 보고 ‘지금과 같은 형식이라면 국가가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해 오-헝 합중국 형식으로의 개혁을 꿈꿨던 페르디난트 대공은 현 유럽에 있는 군주나 후계자들 중 누구보다도 평화를 중요시한다고도 할 수 있었으니까.
그가 황위에 오른 후 구성할 예정이었던 내각의 인원들 중, 여태껏 제국 내에서 중요 직책들을 맡았던 헝가리계나 오스트리아계가 아닌 슬라브 출신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페르디난트 대공은 충분히 우리 러시아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지금은 러시아 내에 지난 베를린 회의에서의 아픔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 데다 오-헝 제국이 삼국동맹의 일원인 것을 생각하면 바로 관계를 개선하는 등의 행동을 취하는 건 무리여도 앞으로 시간이 지난다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지.’
거기에 오-헝 제국이 우리에게 불편함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인 러시아 제국의 남진으로 인한 발칸 반도에서의 이익 침해 역시 현시점에서 러시아가 확장주의적 행보를 멈춤으로써 어느 정도는 해소될 수 있으리라 여겨지고 있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페르디난트는 향후 내가 국제 외교를 하는 데 있어 최고의 파트너가 될 사람으로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남아 있었다.
첫째로 그가 아무리 오-헝 제국 내에서 불고 있는 민족주의 바람을 잠재우려 애쓴다고 할지라도 그게 제대로 될 가능성은 낮았다.
당장 헝가리계가 동군연합 당시의 조건과 다르지 않냐며 반발할 게 뻔했으니까.
원 역사에서도 페르디난트가 제시한 오-헝 합중국을 헝가리계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만약 자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밀어붙일 경우 정치적인 저항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충돌도 각오하라는 협박과 비슷한 말을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그가 민족주의 바람을 가라앉히고 제국 내 만연한 민족 간의 분쟁과 차별을 종식시키려 하는 움직임 자체가 페르디난트의 목숨을 위협한다는 점이었다.
극렬민족주의자들에게는 민족 간에 차별을 없애겠다는 말 자체가 자신들을 분열시키고 현 상황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말과 똑같이 들릴 게 분명했다.
그가 원 역사에서 목숨을 잃게 된 사라예보 사건 또한 페르디난트의 말대로 된다면 세르비아 민족에 포함된 인민의 지지를 잃을 것을 염려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아마 페르디난트는 나만큼이나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열렬한 구애를 받을 게 분명했다.
그들은 여전히 러시아 내에 있는 음지에서 폭탄이나 총으로 나를 위한 깜짝파티를 열어주려는 계획을 짜고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거기에 나는 극렬 슬라브 민족주의자 페르디난트는 극렬 게르만 민족주의자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리라는 것도 똑같다고 할 수 있겠군.’
나는 갑자기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그에게 동질감을 느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