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152)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152화
57장 19세기의 마지막 한 해
유럽인들이 수천 년 만에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스포츠 행사인 올림픽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지중해를 사이에 둔 대륙, 아프리카의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올림픽이 열릴 수 있게 된 것이 아프리카에서 발생했던 프랑스와 독일의 갈등이 봉합된 덕분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유럽이 평화로워질수록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는 반대급부로 삶의 질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한 갈등 봉합도 따지고 보면 아프리카 대륙을 외세 세력의 수탈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결과라기보다는 열강들이 땅을 갈라 먹는 과정을 평화롭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막상 아프리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협의가 무색하게 땅따먹기가 총성 없이 진행되지도 않았지만.
“Das Flaggschiff des Feindes erscheint links! Die Verteidigung auf der linken Seite muss gestärkt werden!”(적의 주력이 왼쪽에서 출현! 왼쪽의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
“Que dit cet ami?”(이 친구가 뭐라고 하는 거야?)
케이프타운에 대한 보어인들의 압력을 해소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명목상은 협력관계였기에 함께 출동한 독일군과 프랑스군이었지만, 두 나라 사이의 언어장벽은 유기적이고 즉각적인 움직임을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하나로 통합되어 움직여도 보어인들은 만만찮은 상대가 아니었던 만큼, 이런 식으로 둘로 나뉜 군대는 영국군과 아프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본인들의 나라를 지켜온 보어인들에게 맛좋은 사냥감에 지나지 않았다.
두 국가가 트란스발 공화국 지역에 파병한 병력의 숫자는 보어인들의 병력 숫자를 월등히 상회하고 있었지만, 제2차 보어 전쟁이 빨리 종식되지 않고 사상자가 점점 늘어가는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합동 사령부를 만든다는 것은 처음부터 선택지에서 제외된 거나 다름없었다.
두 나라 사이의 해묵은 감정이 우선 합동 사령부라는 해괴망측한 존재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만약 만든다 할지라도 명령권자를 어느 나라가 맡을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질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점차 곪아 들어가는 보어 전쟁의 수렁은 서서히, 느린 속도지만 확실하게 독일과 프랑스의 발목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두 나라의 덩치와 국력에서 오는 힘으로 인해 자신들이 꽤 나 깊은 늪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아마 국민들부터 느끼게 될 것이다. 본인들이 거둔 성과가 사실은 성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두 나라가 이렇게 아프리카에서 헤매고 있는 사이, 조용하지만 가장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건 러시아였다.
그리고 동토의 곰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시계의 시침 또한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 * *
[파리에서의 국제 박람회 개막! 4월부터 11월까지 이어질 이번 행사에는 유럽뿐만 아니라 다른 대륙의 국가들도 참가하는 만큼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져…….] [올림픽의 실종? 이번 파리 국제 박람회와 함께 열릴 것으로 예상되었던 올림픽이 본인의 이름을 잃어버렸다. 국제 박람회 측은 5월부터 대규모 스포츠 행사가 함께 진행될 예정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제 선수권 대회’일 뿐 올림픽은 아니라고 밝혀…….]아무래도 쿠베르탱 남작은 이 세계에서도 파리 국제 박람회 측과의 정치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모양이었다.
올림픽의 불씨를 잇기 위해 전 세계적 행사인 박람회의 후광을 빌리겠다는 생각은 괜찮았다.
하지만 그가 고려하지 못한 것은 최첨단 기술과 상품들을 소개하는 박람회와 케케묵은 전통 의식에 불과한 올림픽의 결합을 파리 국제 박람회의 총 책임자인 알프레드 피카르가 그다지 곱게 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뭐, 그래도 이번 행사도 이름만 올림픽이 아닐 뿐 쿠베르탱이 생각하는 올림픽의 정신적 가치는 계승했다고 볼 수 있을 테니 그의 입장에서는 절반 정도의 성공을 거뒀다고 볼 수 있겠군.’
지난 빈에서의 협의 이후로 나는 여느 때처럼 바쁜 일상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다 해도 보어 전쟁이 종식된 게 고작 2년 전인데 박람회를 정상적으로 개최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게 프랑스의 잠재력이라는 건가?’
독일과 프랑스 청년들의 생명을 무수히 많이 잡아먹은 아프리카 대륙에 열린 지옥문이라 불렸던 보어 전쟁은 2년 전인 1898년 트란스발 공화국 정부가 항복을 선언함에 따라 종결되었다.
두 나라 모두 아프리카에서의 식민 활동과 함께 보어 전쟁을 진행하느라 막대한 양의 재화와 인력을 투입했음에도 투입 대비 산출을 따져보았을 때 과연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번 박람회의 정상 개최는 프랑스 국민들 저변에 깔려 있는 무기력증과 허탈함을 없애기 위함일 수도 있겠군. 독일도 참가 의사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는 걸 봐서는 두 나라 모두 이번 박람회로 보어 전쟁의 상처를 씻어내려고 하는 걸로 볼 수 있겠어.’
2년 동안 같은 전장에서 공통된 적을 앞에 두고 싸운 만큼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두 나라를 보자면 글쎄올시다였다.
계속된 의사소통 부재와 의견 충돌로 인해 두 나라는 함께 싸우는 것 대신 또다시 경계선을 그어버린 뒤 본인들의 힘만으로 싸우는 길을 선택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이용한 보어인들이 경계선을 왔다 갔다 하며 게릴라전을 펼치자 책임 소재를 두고 독일과 프랑스 파병군인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그러니 보어 전쟁을 토대로 한 양 국가 사이에 심어져 있는 뿌리 깊은 국민감정은 여전히 본인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더 커졌다고 볼 수도 있었다.
본국으로 귀국한 병사들로부터의 상대방에 대한 험담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고 하니까.
지난 빈 회의로부터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4년, 짧다고 하면 짧게 여길 수도 아니면 꽤 긴 시간이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이 4년은 여느 때의 시간과는 달랐다.
이 시간을 벌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써왔던 만큼 하루하루를 신중하게 그리고 최대한으로 사용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러시아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지나치게 넓은 국토라는 약점을 메꾸어줄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마침내 개통되었다.
아직은 단선이었지만, 원 역사의 불완전한 개통과는 달리 연료가 공급되는 한 기관차를 바꾸거나 열차를 철도가 아닌 다른 운송수단으로 옮긴 뒤 다시금 철도 위로 올리는 추태는 보이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개통 말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개통은 단순히 러시아의 서쪽과 동쪽을 잇는다는 게 아니었다.
철도의 완공 이후 일본에서 일어날 조짐을 보이던 반러 움직임이 세력을 잃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지금까지 불완전하고 위태롭기만 했던 러시아의 극동 통제력이 반석 위에 올랐다고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완공했다는 건 단순히 여행이 편해졌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러시아 제국의 차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앉아 저 멀리 연해주를 한 손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며 청나라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던 전략적 강점인 러시아 제국의 주력이 서쪽에 집중되어있는 동안 취약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러시아의 동쪽을 파고들 수 있다는 요소를 잃어버렸다는 걸 의미한다.그뿐만이 아니라 우리 영국에 남아 있는 인도라는 부드러운 배를 러시아가 다시금 별다른 부담 없이 간지럽힐 수도 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지난 협정의 결과로 페르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의 충돌이 사라진 지 몇 년이 흘렀지만, 지금의 우리 영국의 위치와 러시아 제국의 위치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체결될 때만 하더라도 영구적인 효력을 가진다고 일컬어지던 협정이 당사자들 사이에서의 힘의 균형이 깨질 시 얼마나 쉽게 휴짓조각이 되어버리는지 익히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횡단 철도가 개통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런던에 있는 한 신문에서 이런 사설을 발표할 정도로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도 막힘없는 열차의 질주는 크게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아직은 철도 개통만큼 주목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성과를 한 가지 더 거둘 수 있었다.
지난 모신-나강 소총의 개선안에 대한 업무를 훌륭히 완수해 낸 툴라 조병창의 인재들이 다시금 내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게 1호 시제품이란 말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모티브가 된 맥심 기관총과 별로 다른 게 없어 보이는군.
-예, 원판이라고 할 수 있는 맥심 기관총 자체가 워낙 우수한 기관총이다 보니 저와 다른 기술자들은 겉모습을 뜯어고치는 것보다는 러시아의 혹독한 환경에서도 정상적으로 그리고 정비를 받지 못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주력했습니다. 시베리아와 같은 추운 지방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같은 더운 지방에서도 작동할 수 있을 거라 자부합니다, 폐하.
-하긴, 무기는 겉모습이 얼마나 멋있느냐보다 얼마나 잘 본인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해 내느냐가 더 중요하니까. 고생 많았네. 그럼 이 기관총을 뭐라고 부르는 게 좋겠나. 지금처럼 맥심 기관총이라고 부르기에는 자네들이 쏟은 시간과 노력이 아까우니 앞으로 러시아 제국군의 가장 든든한 친구 중 하나가 될 기관총에 붙을 이름을 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네.
-사실 이미 생각해 둔 이름이 있긴 합니다만…….
툴라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릴 것만 같았다.
아무리 제정사회라고는 하지만 그런 이름이 붙은 기관총을 병사들이 들고 다닐 거라 생각하면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게 뭔가? 말해보게.
-옛! 저희는 차르의 분노라고 부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진창이 될 게 뻔한 전장에서 무겁기 짝이 없는 기관총을 짊어지고 다닐 병사들이 툭하면 ‘이 엿 같은 차르의 분노 같으니라고 쓸데없이 무게는 많이 나간단 말이야!’라든지, ‘누군지 몰라도 차르의 분노라고 무기 이름을 짓다니, 어지간히 아부하고 싶었나 본데’와 같은 말을 내뱉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병기 이름은 간단하고 알기 쉬워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맥심-툴라 기관총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로 결정했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솔직히, 조금 혹하기도 했었다.
차르의 분노라니 앞으로 수십 년간 전장을 지배할 기관총에 붙을 이름으로는 어울린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은…… 크흠.
이 외에도 아직 양산은 무리더라도 농업 현장에서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의 트랙터 생산에 성공했다든지, 저 멀리 캄차카 반도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사상 첫 세금으로 곰 가죽이 보내져 왔다든지와 같은 일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영향을 준 것 중 가장 큰 일은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