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198)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198화
사실 러시아 제국까지 포함할 것도 없이 대영제국 하나만 상대한다 하더라도 독일 제국의 바다는 안전이 보장된 지역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적이 하나 더 생긴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피부에 와닿는 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빌헬름의 히스테릭한 발언들의 마지막을 장식한 건 그래도 본인은 티르피츠 제독을 믿고 있으니 그에 걸맞은 성과를 가져다주기를 기대한다는 말이었다.
“저 덜떨어진 슬라브 친구들마저도 영국의 신형 전함을 베끼는 데 거의 성공했다고 하니 우리에게도 불가능 한 일이 아닐 것이오. 여태까지 제국 해군을 육성하는 데 탁월한 모습을 보여준 제독 또한 지금까지의 모습에 부합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라 믿소. 방금까지는 다 내가 제독을 믿기에 했던 말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좋겠소.”
사실 러시아가 영국의 전함을 카피한 것이 아니라 영국이 러시아의 전함을 베낀 것이었지만, 독일 측은 이렇게 알고 있었다.
사실 수량만 많지 한 세대 뒤떨어진 함선들만 잔뜩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 제국 해군이 저런 신형 전함을 제일 먼저 만들기 시작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좋소, 아주 좋소.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소.”
황제는 다시금 이성을 되찾았는지 평상시 콤플렉스인 짧은 팔을 다시금 주머니 안으로 넣어 숨긴 채 제독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방을 나섰다.
사실 티르피츠 또한 무능하다는 평가를 듣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신형 전함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대영제국의 해군력을 따라잡지는 못했었지만, 그들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느끼도록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라고 해서 왜 카이저가 본인을 닦달하는지 모르겠는가?
하지만 최근 들어 티르피츠의 탈모 증세가 머리를 넘어 수염에 미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의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우선 티르피츠 본인이 세운 티르피츠 계획의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과연 동일하게 자신들도 전함을 건조하는 것만이 영국의 해군력을 따라잡는 길 인지에 대한 의문이 자꾸만 생겨났다.
영국 해군력의 3분의 2 정도 전력을 목표로 대규모 해상전단을 되도록 비밀리에 건조한다는 ‘티르피츠 계획’에 알맞은 함정은 전함이 아니라 사실은 잠수함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사실 영국이 새로운 전함을 만들어내기 이전부터 본인이 세운 계획의 부작용들이 독일 제국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지만, 제독으로서는 그런 것들에서 눈을 돌린 채 모든 게 영국 탓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매일같이 ‘오늘은 영국에 대항할 수 있는 전함이 완성되었나?’라고 묻는 카이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전함을 건조하는 움직임을 보여주기는 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독의 머릿속에서는 별다른 대응책도 심지어 탐지방법도 없는 잠수함이야말로 영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비밀병기지 않겠냐는 생각이 가끔 떠올랐다.
물론 그 또한 거함거포주의자인 데다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카이저가 전함 대신 눈에 잘 띄지도 않고 투박하기 그지없는 잠수함을 먼저 만들겠다고 하는 말을 들어줄 리가 없었기에 현재 독일 제국 해군청의 최우선 목표는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생산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티르피츠의 머릿속을 잠시 차지했던 잠수함은 이내 다른 생각에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선진병영이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고 군대 내 폭행과 폭언이 당연시되던 시대인 만큼 카이저로부터 갈굼을 받은 제독이 본인이 받은 스트레스를 다른 곳에 풀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해군청 내 부장급 이상 인사들은 집무실로 튀어오라고 전해!”
아름다운 풍습인 내리 갈굼이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문화와 예술의 도시라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독일계통의 사람들은 빈이라 말할 것이고 프랑스계 사람들은 파리라고 말할 것이다.
빈에 버금갈 정도로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이 빛의 도시는 현재 반으로 갈라진 채 열띤 논쟁에 빠져 있었다.
파리에서 근 10년 동안 가장 욕을 많이 먹은 건축물이 에펠탑이라면 가장 저주를 많이 받은 사람은 드레퓌스라고 할 수 있었다.
1894년 독일로 프랑스군의 기밀을 빼돌린 혐의를 받아 유태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불명예 전역을 하게 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일이 이렇게 오랫동안 파리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체를 반으로 쪼개놓을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제대로 된 효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증거, 단 나흘 만에 종료되었던 재판 과정, 심지어 재판관들에게 가해진 상부의 압박 등 시작부터 결과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던 이 사건은 초반에는 흔한 유대인의 지금껏 본인을 키워준 조국에 대한 은혜도 모르는 배신, 유대인이 유대인 한 사건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정보국 소속이던 조르주 피카르 중령을 비롯한 여러 양심 있는 인물들의 소신 있는 발언과 행동을 통해 다시금 수면 위로 이 사건이 떠올랐을 때는 드레퓌스 사건은 더 이상 단순한 기밀 유출 사건이 아니었다.
드레퓌스가 유죄를 선고받는 과정에서 여러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던 데다 진범은 따로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었다.
그런데도 단순히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재심받을 권리마저 박탈하는 것을 목격한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통해 당시 대통령이던 펠릭스 포르에게 공개적으로 항의하면서 사건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이제 드레퓌스 사건은 그저 드레퓌스라는 개인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프랑스 인들에게 본인의 정치 성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자신이 믿는 프랑스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한 질문과도 같았다.
“솔직히 드레퓌스가 유죄라는 게 말이나 되기는 해? 그가 스파이라고 선고받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증거부터가 말도 안 되지 않냐고. 명세서에 적힌 필적이 드레퓌스의 평상시 필적이 다르다는 것이야말로 그가 스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뭐? 이 새끼 이거 교양있는 신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빨갱이에 비밀유대조직에 사주를 받은 시온주의자였구만? 안 되겠다. 내가 자랑스러운 우리 조국 프랑스의 한 사내로써 너 같은 놈이 이 거리에 자유롭게 걸어 다니도록 둘 수는 없지. 일어나 이 자식아.”
어제까지만 해도 원만하기 그지없던 관계를 유지하던 친구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길거리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것은 이제 기사화도 되지 않을 정도로 흔해 빠진 일이 되어버렸다.
이뿐만 아니라 가족 행사를 위해 모인 일가가 식사자리에서 나온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서로 간에 절연을 선언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곤 했다.
막상 공개적으로 에밀 졸라로부터 공격받은 펠릭스 포르는 유부녀와 밀회를 즐기다 복상사함으로써 별다른 반응을 보여주지도 못했지만, 그의 뒤를 이어 집권한 정부에서도 드레퓌스에 대한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처음 열렸던 재판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요식행위에 가까운 재판, 군은 틀리지 않았다는 스탠스와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본인들의 명예를 지키기에 급급한 높으신 분들로 인해 재심에서도 유죄가 선고되자 여론은 들끓었지만, 이에 불을 지핀 일은 따로 있었다.
“Viva la France!(프랑스 만세!)”
국가의 안보와 군대의 위신을 위해 드레퓌스에게 내려진 유죄 판결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는 극우파의 한 사내가 다음과 같은 말을 외치며 에밀 졸라를 총으로 암살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나는 유대 비밀 조직의 사주를 받고 프랑스를 혼란에 빠뜨린 에밀 졸라에게 내려져야 할 마땅한 처벌을 내렸을 뿐이다. 국가가 인민주의자들로 인해 흔들리는 이 시기에 유대인 하나 구하자고 나라를 반으로 쪼개놓은 자에게 어울리는 결말은 죽음뿐이다.”
사실 프랑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톨릭을 믿는 보수파들이 이런 위기의식을 가지는 데는 얼마 전 독일하고 한판 붙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던 아프리카 위기 당시 공업 지역에서 일어났던 폭동도 한몫하고 있었다.
다행히 폭동은 다른 지역으로 번지기 전에 진압됐지만, 이 일로 프랑스 보수파가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보불 전쟁 이후로 원수나 다름없는 독일과의 일전을 앞두고도 본인들의 이득만을 챙기겠다면서 폭동을 일으킨 인민주의자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의 국민이란 말인가?
현장에서 체포된 사내가 한 말이 퍼져나가자 프랑스 사회의 반응 또한 극명하게 나뉘었다.
“이는 표현의 자유와 생각의 자유를 극심하게 침해하는 아주 중대한 범죄 행위이며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가치를 들고 일어나 본인들의 권리를 기어코 쟁취해낸 우리 프랑스 공화국의 신념을 무너뜨리는 정치적 테러 행위나 다름없다. 재판부의 엄벌을 촉구하는 바이다.”
에밀 졸라와 함께 드레퓌스 구명운동을 이끌었던 조르주 클레망소은 본인이 편집장으로 있는 로로르 신문 일 면에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기사를 작성했고.
“지금의 유럽은 화약고나 다름없다. 그대들은 지난 보불 전쟁의 악몽을 잊었는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군은 프랑스라는 국가의 마지막 보루이자 가장 날카로운 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군을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군을 보호하고 믿어줘야만 한다. 국민들이 군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과연 전쟁이 닥쳤을 때 그 군대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겠는가?”
로로르와 같은 일부 신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들은 다음과 같은 어조가 담긴 기사들을 작성해 1면에 게재했다.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신문에 대한 화형식이 잇달아 벌어지고 각자 본인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논지를 가지고 있는 신문사에 돌을 던지는 등의 일들이 이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에는 시위대가 들끓었으며 반유대주의적인 폭동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곤 했다.
거기에 이런 상황을 막아야 할 경찰 내부에서도 이번 일에 대해 반대되는 입장을 지닌 경관끼리 싸우느라 출동이 지연되는 등의 일이 벌어지자 정부도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재판부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공판준비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던 세기의 재판은 의외로 싱겁게 마무리되고 말았지만.
본인으로 인해 프랑스의 국론이 분열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며 에밀 졸라를 암살한 사내가 감옥 안에서 목을 매 자살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내의 가족은 유서의 필체가 평상시와는 다르다면서 이건 자살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지만, 경찰은 그대로 자살로 사건을 종결시켜 버렸다.
극단적인 음모론자들로부터 이미 프랑스 정·재계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비밀유대조직이 프랑스의 애국지사를 무참하게 살해하고 본인들의 권력을 이용해 자살로 사건을 종결지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빠른 수사종결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남은 것은 다시 드레퓌스였다.